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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등반 보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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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울라기리 1봉
김헌상 이번 등반의 추진배경은 본교 개교 90주년을 기념하고 본 산악회의 창립 40주년을 기념하면서 특히 개교 100주년을 맞이하는 2006년까지 8,000m 이상의 고봉 14봉우리를 완등한다는 목표의 일환으로 세계 3위봉인 네팔 히말라야 캉첸중가(8,598m) 남벽루트를 등반 하기로 계획하고 추진 되었으나 산악회 내부의 문제로 원정 대상산을 다울라기리Ⅰ봉(8,127m) 북동릉 루트로 변경 하게 되었다. Ⅱ. 등반개요 1. 대의명칭 : 97 동국 다울라기리Ⅰ봉 원정대
3월 22일 우린 자금사정 등 여러 어려움을 딛고 한달간의 준비끝에 다울라기리원정이란 대장도에 나섰다. 나의 뇌리속엔 기내 창밖으로 스쳐가는 운해처럼 준비기간의 어려움이 한편의 파노라마처럼 스쳐간다. 3월 25일 후발대로 오신 이인정회장님과 오국근지도교수님이 우리의 숙소인 박영석 대장이 운영하고 있는 빌라 에베레스트로 오셨다. 3월 28일 이곳에 도착한 다음날부터 등반에 필요한 식량과 물품을 구입하여 부랴부랴 짐을 그럭저럭 꾸리고 나니 오후 6시다. 저녁 먹을 시간도 없이 대절한 버스에 올랐다. 셀파 까지는 자기가 아는 포터 10명을 고용하여 우리와 같이 동행한다. 3월 29일 5시 네팔 제2의 도시 포카라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불교의 성지인 룸비니가 그리 멀지 않다. 그래서인지 이곳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물론이고 아시아권 사람들과 삭발한 서양인들도 심심찮게 눈에 띤다. 또한 이곳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안나푸르나 트레킹 코스가 있는 관계로 세계 트레커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당초 셀파들은 포터를 더 구해 베니(Beni)로 향하고 대원들은 경비행기로 좀솜(Jomsom)으로 이동 후, 프렌치 패스를 넘어갈 계획이었으나 날씨가 좋지 않아 연기되고 말았다. 3월 31일 오늘도 비행기가 뜨지 않아 원래 계획을 수정, 버스를 빌려 먼저 출발한 셀파일행의 코스를 밟았다. 12시에 베니에 도착해 중식을 먹고나서 상행 카라반에 들어갔다. 빼어난 자연경관과 파란 하늘은 우리나라의 가을 하늘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이다. 4월4일 지대를 통과해 상행카라반의 마지막 롯지인 도방에 도착했다. 정글지대를 통과하다 다울라기리2봉 쪽에서 떨어진 눈사태를 만나긴 했지만 전원이 부상없이 통과할 수 있었다. 5일, 짐을 옮기기 위해 다시 정글지대로 들어가 어제의 눈사태로 임시 캠프를 쳐놓은 곳에 도착했다. 어제의 눈사태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눈덩이였으며 그 넓은 계곡을 두곳이나 막아 버렸다. 4월 5일 그제 발생한 눈사태 지역을 정찰해 보니 모두들 입이 벌어질 정도로 어마어마한 눈덩이였다. 그 넓은 계곡을 두 군데나 막아 버렸다. 포터들의 말에 의하면 눈사태 발생 후 2시간 동안이나 물이 흐르지 않았단다. 셀파와 포터들은 길을 가로막은 눈 위에 새로운 길을 뚫으려는 작업에 모두 동원되어 여념이 없다. 4월 6일 오후 1시가 넘어 이탈리아원정대가 베이스캠프를 설치한 3,535m지점에 도착했다. 베이스 지대는 온통 사방이 눈으로만 둘러싸인 눈의 천국이다. 우리팀은 9일 베이스캠프에 들어가기 전에 고소적응을 하기 위해 표고 4,500m에 임시캠프를 설치했다. 7일과 8일 이틀동안 그곳에 짐을 수송하며 고소적응을 한 덕에 삼일째는 상쾌한 몸과 마음으로 임시캠프에서 잠을 잘 수 있었다. 더욱이 다울라기리(8,167m)등정의 발판이 되는 베이스캠프에 들어간다는 생각에 하늘을 나는 듯한 환상에 밤새 잠을 설쳤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어제 먹다 남은 밥에 물을 부어서 숭늉을 끓였다. 높은 고도였지만 머리가 약간 아플 뿐 심한 고소증세는 없었다. 아침 식사를 끝낸 후 텐트를 철수하고 카고백을 정리하려다 보니 경악을 금치 못할 상황이 전개되어 있었다. 지난 밤 식량을 급히 꺼낸 후 카고백을 닫지 않아 밤새 살쾡이로 추정되는 동물에게 많은 식량을 헌납했던 것이다. 여기 저기 과자봉지며, 과자 부스러기가 널려 있다. 대장님에게 한 소리 듣고 나서 베이스캠프 입성을 위한 준비를 했다. 날씨는 무덥게 느껴졌고 고소 때문에 한걸음 한걸음이 힘들기만 했다. 눈으로 보기에는 불과 100m앞에 보이지만 고소 탓인지 가도가도 끝이 없다.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꿈에 그리던 다울라기리 베이스캠프에 입성했다. 베이스 캠프 사이트에는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 없는 황량한 설원 위에 일본 고니시원정대의 깃발이 펄럭인다. 비록 일본대지만 우리와 똑같은 사람을 보니 거리감보다는 친근감이 먼저 느껴진다. 등산이라는 행위를 함께 하는 사람으로 또 산에서 만나 적대시하지 않으니 그도 우리를 적대시하지 않는가 보다. 4월 12일 처음으로 등반을 시작했다. 아침 6시에 베이스캠프를 출발해 멀고 먼 1캠프지로 향하는 마음은 가볍기만 하다. 베이스에서 1캠프 구간은 일본대가 10일 전에 헬기를 타고 베이스에 입성해 골 초입에 작업없이 등반을 할 수 있었다. 이 고정로프 구간을 지나도 평탄한 눈밭과 오르막의 연속이라 무척 지겹게 느껴졌다. 하지만 예년보다 많은 적설량으로 힘든 러셀작업을 해야 했고 오늘 제 1캠프 건설을 어떻게든 마무리지어야 했으므로 걸음을 재촉했다. 오후 2시에 제1캠프 건설을 마치고, 대장님과 한왕룡대원은 상태가 좋아 거기서 자기로 하고 나머지 대원은 하산했다. 4월 13일 무사고와 성공을 기원하는 라마제를 올리면서 저 높이 솟아있는 다울라기리에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인다. 처음 베이스캠프에 입성했을 때만 해도 일본대와 우리뿐이었던 삭막한 베이스가 이제는 스위스, 스페인 등 여러 팀들이 들어와 우리의 라마제를 함께 해주었다. 4월 18일 그동안 1캠프로 짐수송을 하며 전대원이 고소적응을 한 후 제2캠프 구축을 위해 아침 일찍 출발했다. 오후 2시경 기상악화로 인해 100미터 앞의 캠프지를 뒤로하고 쓰디쓴 후퇴를 해야 했다. 1캠프로의 하산길은 짙은 안개로 인해 1미터 앞이 보이지 않았으며 지친 몸을 이끌고 하산한다는 것이 두려움의 검은 그림자를 떠올리게 한다. 한참 하산하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설벽의 끝 낭떠러지다. 머리칼이 하늘을 찌를 듯 일어서고 온몸에 식은땀이 주르륵 흐른다.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길을 찾아 나서 오후 6시 반이 넘어 1캠프에 도착할 수 있었다. 18일부터 좋지 않던 날씨는 심한 눈보라까지 동반해 대원들을 몰아세웠다. 결국 전원이 하산해 베이스캠프에서 체력을 보강한 후 날씨가 좋아질 때 등반에 나서기로 했다. 4월 21일 베이스캠프가 있는 계곡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화창하게 맑아졌다. 아침 6시 김대원, 나, 정광교대원과 셀파 3명이 함께 1캠프를 향해 출발했다. 며칠 간 휴식을 취한 상태라 12시경에 1캠프에 도착했다. 4월 22일 오늘은 결단코 캠프2 건설을 마무리 짓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셀파들을 깨워서 마침내 오후에 캠프지에 도착하여 경사 60도의 설벽에 눈을 깍아서 텐트 2동을 쳤다. 캠프2에 올라오니 저 멀리로 안나푸르나 전경이 병풍처럼 막아섰고 발 밑으로 아름다운 운해가 펼쳐진다. 강한 눈보라로 인해 우리는 전원 베이스캠프로 철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우리는 또 며칠을 텐트 안에서 지낼 수 밖에 없었다. 이런 날씨에 운행한다는것은 큰 화를 자초하는 행위일 뿐이다. 날씨가 점차 수그러들자 다시 캠프2까지 진출하여 26일 이번 등반의 등정관문격인 C2~C3 난구간을 우리팀이 처음으로 뚫었다. 사실 이 구간은 각팀들이 서로 눈치만 보고 있던 터였다. 그도 그럴것이 이 구간은 거의 직벽에 가깝고 청빙이며 더우기 7000m대의 고도에서 이러한 등반을 한다는 것은 엄청난 체력 소모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4월 23일 전대원이 1캠프에 모여 정상등정 계획에 관해 의논했다. 1조로 박영석 대장님과 한왕룡, 김헌상대원이 정상공격에 나서고 2조로는 김대원, 정광교대원이 정상공격을 나서기로 결정했다. 만일 내일부터 날씨가 좋아진다면 우리는 쉽게 정상에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았다. 4월 24일 박영석대장, 한왕룡대원, 나와 셀파들이 6,700m의 2캠프로 출발했다. 엊그제 만들어 놓은 텐트 양옆으로 일본의 고니시팀과 후아니토가 이끄는 스페인 바스크팀이 들어섰다. 바람이 염려되어 걷었던 텐트 한동을 다시 치자니 플라이가 엉망으로 변해 있었다, 어제 고소증세로 밤새 고생한 정광교대원이 플라이를 밟아 입구가 엉망이었는데, 강한 바람에 갈기갈기 찢겨져 버린 것이다. 대장님의 심한 질타를 듣고 난 뒤 텐트 한동을 다시 치고 이번 등반의 제일 어려운 구간인 3캠프 건설을 위해 일찌감치 휴식에 들어갔다. 해질 무렵 스위스대의 코비가 올라와 설동을 판다고 난리를 친다. 그는 정상 등정보다는 스키를 즐기기 위해 이곳까지 온 것처럼 보였으며 한편으론 그런 그가 부럽기도 하였다. 4월 25일 새벽에 기상해보니 안나푸르나 산군쪽으로 시커먼 먹구름과 동반한 천둥번개가 몹시도 불안하게 만든다. 먹구름이 점점 이쪽으로 몰려와 점차 험악해지는 날씨를 보고 대장님은 계속 불평만 하시다 하루 더 제 2캠프에 머물기로 결정했다. 4월 26일 대원과 셀파들이 번갈아 가며 고정로프 작업을 해 가파른 설벽구간을 돌파해 나갔다. 수없이 많은 기존의 로프들이 널려 있었고 그중 쓸모있는 것도 몇가닥 보였다. 우리는 새 로프와 기존에 설치된 로프를 적절히 이용해가며 별 어려움없이 루트작업을 해 나갔다. 능선에 올라서는 마지막 50m구간은 눈이 많이 쌓여 러셀작업이 어려웠으며 갑자기 나타나는 암벽부분에 청빙이 돌출되어 록 하켄과 아이스 스크류 설치 작업에 많은 시간이 소모되었다. 우리팀이 가장 어렵게 마지막 능선오름 구간을 뚫고 하이라이트 구간의 고정로프 작업을 마쳤다. 능선을 넘어 텐트를 칠만한 공간을 확보한 뒤 스노 샤벨을 사용하려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피켈로 얼음을 깍아내고 텐트사이트를 만든 뒤 어렵게 텐트 한동을 설치했다. 주위에 하켄과 스노바를 박고 텐트를 꽁꽁 묶었다. 마지막 50m만 쉽게 넘어 왔더라면 더 높은 위치에 3캠프를 설치할 수 있었을 텐데라며 모두들 아쉬워했지만 기존의 3캠프보다 200m 높은 지점인 약 7,500m에 캠프를 건설한 셈이다. 무엇보다 우리팀이 이 루트의 등반 관건인 제 2캠프에서 3캠프에 이르는 구간을 우리의 힘으로 안전하게 돌파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꼈다. 이제야말로 내일의 날씨가 좋아지기를 기도할 때였다. 4월 27일 새벽 0시 30분에 기상하여 날씨부터 살폈다. 구름이 엷게 끼었으나 바람은 없다. 모두들 좋은 날씨의 징조라 위로하면서 2시 반에 3캠프를 나섰다. 동트기도 전인데 랜턴 불빛 4개가 옹기종기 모여 조금씩 고도를 높여가고 있었다. 암릉구간을 이리저리 오르다보니 어느덧 동이 텄고 멀리서 보면 스노 밴드로 보이는 구간까지 올라섰다. 대장님과 사다인 까지는 암릉이냐 설벽이냐를 놓고 의논하는 듯 싶었다. 머리속엔 작년에 이곳까지 왔다가 아쉽게 후퇴한 기억이 떠올랐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작년보다는 지금이 훨씬 상황이 좋다는 것이다. 우리는 눈사태의 위험 때문에 최소한 100m이상의 거리를 유지하며 올랐다. 한발자국씩 내디딜 때마다 눈구덩이에서 들리는 굉음은 설벽 저끝까지 전달되는 듯했다. 눈사태를 당해본 경험이 있는 대원들로서는 긴장감의 연속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눈사태의 위험은 제쳐두고라도 러셀의 고된 작업 또한 굉장한 것이었다. 모두 허리까지 빠지는 상황이 계속되다 보니 전진이 더딜 수 밖에 없었다. 거대하고 가파른 설벽을 활모양으로 가로질러 설벽을 통과한 후 우측 능선의 마지막으로 보이는 봉우리 아래의 꿀르와르를 기어올랐다. 다행히 청빙이 아니라 안자일렌이나 고정로프 없이 올라설 수 있었다. 왜 항상 마지막 구간은 이렇게 힘든 것일까? 8,000m가 넘어서 그런지 아니면 마지막이라는 심리적 위압감 때문일까. 내 머리위론 까지와 한왕룡대원이 거의 끝까지 올랐고 대장님이 거리를 두고 올라오셨다. 이제 몇 미터 안 남았다는 생각도 잠시 뿐 봉우리 너머로 더 높아 보이는 봉우리가 이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큰 산은 큰 산이구나’생각하니 입에서 절로 불평이 튀어 나왔다. 대장님이 올라오시더니 까지와 자일을 묶고 능선을 넘어섰다. 한왕용 대원과 나도 말없이 따라갔다. 2시간을 그렇게 눈보라 속에서 몇 개의 능선을 넘었을까? 오후 2시 30분.... 드디어 우리는 등정소식을 BC(베이스 캠프)에 알릴 수 있었다. 역시 정상은 바람이 거셌다. 이렇다할 감정의 소용돌이나 그 흔한 사치스런 눈물 한 방울 나지 않고 그저 담담하고 차분해질 뿐이다. 왜 그럴까? 아무리 생각해도 나 자신의 심리상태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밑에서 수없이 외워왔던 동작들을 어떻게 하면 실수없이 하느냐로 머릿속은 가득차 있을 뿐이다. 그리고 안전한 하산에 대한 걱정이 서서히 고개를 처들 뿐이다. 흔히들 말하는대로 인간의 감정이란 역시 간사하고 변덕스러운 것 같다. 94년 첫번째 원정에서 시샤팡마를 올랐을 당시는 ‘내가 정말로 이 일을 해냈구나!’라는 감격과 흥분속에 히말라야의 꼭대기에 서 있는 자신이 정말로 믿기지 않아 혓바닥을 깨물어 보던 기억이 떠오른다. 한편 크레바스(빙하의 갈라진 틈)에 빠진 동료를 구했을 당시 죽음에 대한 공포감이 채 가시지도 않은 눈범벅이 되어 버린 그의 흐느껴 울던 얼굴을 대할때와 그의 체온을 느꼈을 때 나는 그와 부둥껴 않고 울었던 기억이 있다. 과연 그것은 순수한 연민의 정이거나 생존애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부리나케 하산을 시작하여 능선을 넘어 설벽구간에서 안자일렌(등반자끼리 서로 로프로 몸을 묶어 연결하는 것)하면서 조심스럽게 내려서자 상상할 수 없는 강풍이 몰아 쳤다. 앞을 봐야겠는데 도대체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모두들 잽싸게 바위틈에 숨었다. 문득 96년 에베레스트 참사가 뇌리를 스쳤다. ‘그때도 아마 이런 강풍에 당했으리라!’이런 불길한 생각을 떨쳐버리려 애쓰며 두어 시간만 참으면 되겠지 했는데 착각이었다. 시커먼 먹구름이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서둘러야 했다. 만일 캠프3를 찾지 못한다면 이미 체력이 다한 대원들에게는 장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강풍에 몸을 간신히 유지하면서 캠프3를 찾아 내려갔다. 이런 강풍에 캠프3는 과연 멀쩡할까 걱정하면서 올라온 흔적을 더듬어 찾아 내려서니 캠프3가 희미하게 보인다. 구세주를 만난 기분으로 대견스러운 텐트로 들어서자마자 모두 한차례씩 토한 다음 곯아 떨어졌다. 오늘이 내 29번째 생일인 것도 깜빡 잊은채. 4월 28일 모두들 컨디션이 좋지 않다. 캠프3를 출발해 능선을 넘어서니 캠프2와 캠프1이 반갑게 보인다. 캠프2에서 다른 대원들과 합류하여 BC에 도착했다. 그날밤 다른 팀들이 축하차, 그리고 정보 입수를 위해서 우리의 식당텐트로 몰려 들었다. 때마침 마을에서 올라온 맥주가 우리를 기쁘게 해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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