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오르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산의 참모습을 알고 산의 소
리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리고 산 사랑과
열정이 넘쳐 산과 사람이 더 자연스럽게 가까이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는 사람은 더구나 만나보기 어렵다. 그런데 이렇
게 희귀한 사람이 우리 곁에 있다.
눈덮인 설악의 고요가, 투명한 토왕 빙폭의 단호함 같은 것이 그대로 느껴지는 사람, 오
영복 회원. 굳이 누구에게 묻지 않아도 우리나라 산악 역사를
들춰보면 그에게서 산 냄새가 나는 이유를 금새 알 수 있다.
산악문화라면 불모지나 다름 없던 1969년 당시 최선웅,이인정,
장남석 씨와 함께 한국 최초의 등산 잡지인 ‘등산’지 창간을
주도한 사람이 바로 오영복 회원이다. 우여곡절 끝에 창간호를
내고 뒤를 잇지 못했지만 그때 펴낸 ‘등산’지가 한국 산악문
화의 씨앗이었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는 ‘모래내 금강’이라는 고급 피켈을 개발, 국산
산악장비의 보급에 선구자적 역할을 한 사람이다. 그때도 국산
장비가 생산되고는 있었지만 품질이 아주 졸렬했다고 한다. 때
문에 장비가 필요한 사람들은 비싼 값을 치르고 외국 산악장비
를 써야 했다.
우리나라 산의 지형과 우리 체형에 맞는 국산
장비의 개발은 장비의 수준은 물론이고 산악인들의 등산기술
수준을 한 단계 더 높이는 놀라운 개가였다.
현재 그가 머물고 있는 경주는 그의 고향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대부분의 성장기를 서울에서 보낸다. 그러다 인창고교 재
학시절, 동네 친구들과 산악회를 만들어 산행을 시작하면서부
터 산과 인연을 맺게 된다.
의기투합해서 결성 된 떠꺼머리들
의 산악회였지만 왕관 모형의 뺏지까지 만들어 달고 다닐 만큼
순수하고 열정이 넘쳤다. 당시 산악계에서는 꽤 인정을 받던
인왕산악회와도 교류를 하며 차츰 활동의 범위를 넓혀 나갔다.
그러나 산을 보는 눈이 조금씩 깊어지면서 그는 동네산악회의
한계를 실감했다. 좀더 체계적인 등반 기술을 익히고 폭넓은
등반 기회를 갖고 싶어했다.
그는 주위의 권유로 동국대학교
산악부에 가입하게 된다.이 산악부에 들어가야 뭔가 등반다운
등반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는데 전통적이고 체계적인 등반
기술을 많이 터득하게 되었다. 산행의 맛도 제대로 알지 못하
면서 선배 쫓아다니기에 바쁜 시절인 1학년 겨울(1968)에 북
알프스 등반을 다녀왔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심으로 실크
로드 답사를 계획하기도 하였다.
69년2월 설악 십동지 조난사고를 2개월여 간에 걸쳐 수습한
후, 이미 전부터 최선웅씨를 접촉해 등산잡지 창간을 모색해
왔던 그는 이일을 주도적으로 추진하게 된다.
장남석씨와 최선웅(당시25)씨를 소개한다. 최씨는 출판사 출신답게 방 안이 서
적으로 가득차 있었으며 책도 종종 빌려 읽었고, 산에서 서울
고니 경기고니 학맥을 따지는 분위기를 싫어하였다. 이러한 점
에서 자연히 친분이 두터워졌고, 당시에 산 관련 학술분야에서
는 김정태, 손경석씨등이 부각되고 있었으나, 젊고 열의가
있는 그를 보고 소개해 주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장남석씨는 부모가 재일교포로서 재산가였고, 명동에서 솜다리
장비점을 운영했는데, 그를 산선배로 따랐고 당시 거금인 300
만원으로 등산지 창간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하는 역할을 하였
다. 후에 그는 등산지가 창간호로서 중단이 되자 등산지를 끌
어안고 인수봉에서 투신함으로서 짧은 인생을 마감했다고 한
다.
최선웅씨가 편집장, 이인정씨가 사진기자를 맡아 한국최초
의 등산잡지인 ‘등산’지는 발간되었는데 아쉽게도 1호로서
중단이 되고 만다. 등산잡지의 발행은 획기적이고 선구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다.
1학년 겨울(1968년) 에 일본 북알프스 등반에서 피켈과 아이젠
을 사용하여 등반하였으나, 피켈을 처음 사용해 본 대원들은
사용법을 배워가며 등반을 해야했다.
이 북알프스 등반 후, 장비의 필요성을 절감하던 차에 어느 거리에서 한 여인의 피켈
비슷한 지팡이를 보고 쫓아간 것이 김수길 씨와의 만남이 되었
다.
모래내금강이 나오기 이전의 국산장비의 수준이란 거의 미미
한 수준이었고, 그나마 존재하던 것은 남대문에서 김종철 영감
에 의해 만들어진 ‘설악산’ 이라는 상표의 다소 졸렬한 것이
었다. 그곳은 장비제작을 전문으로 하는 곳이 아니고, 야전삽
과 같은 도구를 만드는 곳으로 , 제작 또한 용접을 해서 만드
는 극히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렀다.
이에 반해 김수길씨의 모래내금강은 따로 만들어 붙이지 않고
단조를 해서 생산했기 때문에 제작기간이 길었고, 작업도 수
월치 않았다. 그러나, 그만큼 장비의 강도는 강했고 우수했다.
당시에 외국 장비로는 유럽의 몬테로자나 샤르레가 있었는데,
샤르레 피켈 1자루만 있어도 장안의 화제가 될 정도로 희귀했
으며, 여행자나 유학생이 사가지고 올 정도였다. 일본에서는 가
제다, 삿뽀르, 센다 야마구찌, 호프, 에바뉴가 있었는데, 이들
일본제품은 일본 특유의 장인정신으로 닛뽄도를 만드는 것처럼
주문생산에 의해 사용할 사람의 키나 팔길이 등 용모를 고려하
여 만들어져 가격이 높았고, 구하는 것 자체가 어려웠었다.
초기의 장비의 재료는 탄소강이 많이 사용되었으나, 그리 강하지 못하였다.
소련에서는 이미 티타늄을 사용하였지만, 수입이 불가능했고,
당시 최고로 인정받던 취나드에서는 삼합금을 재료로 장비를 제작하였다.
철강산업이 낙후된 우리나라에서는 그러한 소재를 찾는 것이 어려웠다. 여러
궁리 끝에 생각해 낸 것이 대포의 포신이었다.
산악 장비는 생명과 직결되는 것인 만큼 강도가 좋으면서도, 부러지지 않을
정도로 유연함도 겸비해야 하는 특성을 가져야 하는데,
이러한 면에서 대포 포신은 안성맞춤이었다. 대포 포신을
녹여 작업을 하였다.
장비에 대한 아이디어나 정보는 주로 일본에서 발행된 책이나 잡지에서 구했는데 12발 아이젠,
토왕성 피켈, 아이스 햄머 등을 생산하게 되었다. 피켈의
샤프트는 메탈이 아닌 우드을 재료로 하였는데, 이것은 그가
차가운 쇠보다 감촉이 좋은 우드를 선호했기 때문이고, 지금도
<나무를 재료로 하는 장비를 지니고 다닌다고 한다.
<모래내금강은 철저한 장인정신에 기초한 국산장비로서
산악인의 환영을 받았고, 폭넓게 저변이 확대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 모래내금강은 그가 군에 입대하면서 김수길씨가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기위해 장비를 제작하고 판매함으로서
모래내금강만의 고유한 가치를 유지하거나 발전시키지 못하고,
평범한 그저 그런 정도의 장비로 전락되고 만다.
그가 군에서 제대한 후의 상황은 이미 복구하기 힘들 정도의
<어려운 환경이 되었다. 고척동에서 군수산업을 구상할 정도로,
쇠에 많은 관심을 갖고, 일본인들처럼 철저한 장인정신을
바탕으로 한 장비를 내놓고자 하였으나, 군복무 기간은 너무
긴 시간이었고 그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그는 이점을 굉장히
아쉬워하고 있다. 모래내금강의 사라짐은 오영복 회원의
개인적인 차원 뿐만 아니라, 한국 장비사에 있어서도 더욱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렸다는 점에서 크나큰 아쉬움이 아닐 수 없다.
젊은 후배들에게 들려줄 산행관에 대해서는, “예전에는
모험과 개척정신의 개념인 알피니즘을 제1로 삼았으나 지금은
굉장히 많은 등산인 들로 자연이 훼손된 만큼 자연과 환경의
보존이라는 화두로서 절대가치를 내세워야 하는 때가 아닌가”
하며 조심스럽게 언급한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산행의
품격이나 스타일, 가치 또한 생성, 변할 것이며 그러다보면,
산이라는 것은 사라지고 사람만이 남을 것이다”라는 다소
선문답 같은 말을 남겼다.
이번 인터뷰는 감자탕집에서 소주를
곁들이며 밤늦게까지 대화를 나누었는데, 항상 술자리에서
과격하게(?) 분위기를 주도했던 그의 모습은 전혀 없고,
시종일관 진지하고 엄숙한 분위기로 우리를 압도했고,
<조금이라도 자세하게 전하고자 했다.
“산악계에서
동국산악회만큼 전통있고 잘 운영되는 모임이 드물다. 항상
최고로서의 자부심과 자존심을 갖고 산행을 하자”고
후배들에게 당부의 말씀도 빠트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