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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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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환상여행
오영복
올해 「화제의 인물」로 60년대 말 픽켈 제작과 〈등산〉 잡지 창간을 하면서 역동적인
등산 활동을 한 오영복(66학번) 회원을 선정하였다.
등산 장비가 빈약했던 시절 혜성처럼 나타나 국내 최초의 픽켈을 제작하였고, 현재 월간 〈산〉의 전신이 되었던 〈등산〉의 창간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한국 산악문화를 개화
시키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현재 음식점을 경영하고 계시며 또다른 사업 추진에 시간적인 여유가 없으신데도 우리 편집위원들의 인터뷰에 자상히 응해 주시었고, 직접 수필까지 전달해 주셨다.
인터뷰 내용은 주로 픽켈 제작과 〈등산〉 잡지 창간에 주안점을 두었다. 수필「환상여행」은 22년 만에 설악산 토왕폭을 찾으면서 갖게 된 감회를 서술한 것으로 오영복 회원의 인간적인 면이 잘 표현되어 있다. - 김대원-
1998년 2월의 어느 아침, 설악산 적십자구조대의 마운탁 대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속초시 눈축제 행사의 일환인 제2회 토왕성 빙폭등반대회에 참석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렇지만 여러 가지 사정이 있어 확실한 답변을 못했다. 마침 토왕성 상·하단 초등을 한 크로니
산악회의 박영배 씨가 현재 울산에 있는 현대중공업 연수원의 인공암장 공사를 하고 있는데 나를 데리러 오기로 돼 있으니 그차를 타고 무조건 오라는 것이다. 예정대로 다음날 박영배 씨가 경주시 외곽에 있는 나의 집으로 찾아왔다. 그날따라 정리할 일들이 많았기에 일단 경주시내로 같이 나가 그를 먼저 설악산으로 출발시켰다. 그리고 나서 대충 일을 처리한 다음 갈까말까 한참을 망설였다. 이제는 흘러가 버린 22년 전 세월의 저편으로 단숨에 훌쩍 건너 간다는 것이 그렇게 간단치 만은 않은 것이다. 수많은 영광과 굴욕이 점철된 삶의 긴 터널…. 희망을 포기한 채 다람쥐 쳇바퀴 돌 듯하는 일상의 연장선상에서 갑작스런 과거로의 회귀는 쉽게 용납되지 않는 것이었다. 고산등반과 좀더 힘든 벽으로 향했던 젊은 시절의 열정은 잘못 산 인생살이와 함께 강물에 실어 보낸 지 꽤 오래다. 그런데 오십을 훌쩍 넘은 나이에도 정열이 넘쳐 해외등반을 나서는 사람들을 보면서 현실적으로 부족한 나자신을 얼마나 자책했던가. 목로에 홀로 앉아 소주 한 병을 넘어서니 이미 마음은 설국으로 기울어진다.
늦은 밤, 포항으로 가서 밤 11시에 출발하는 속초행 버스에 올라 전가의 보도인 독한 술 두 병과 함께 일로일로 북으로 향했다. 북행 버스의 전조등에 비치는 흰눈을 보면서 취기와 회상에 잠겼다. 1969년도의 기록적인 폭설 때, 혼자서 트럭을 타고 강릉에서 12 시간이나
걸려 양양에서 내렸다. 그런데 눈이 얼마나 많이 내렸던지 차는 다니지 않고 도로를 걸어서 속초를 지나 간성까지 갔다가 다시 속초로 돌아왔던 일들이 꿈인 듯 차창 밖으로 아른거렸다.
지금은 얼마나 편리한 세상인가. 거침없이 달린 버스는 새벽 3시에 속초에 도착했다. 전화를 했더니 마 대장이 차를 가지고 왔다. 선잠을 자고 오후에 혼자 비선대를 올라갔다 왔다. 본부 측에서 마련해 준 저녁식사를 바닷가 횟집에서 성찬으로 풍성하게 먹었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호텔 앞에서 전원이 함께 출발했다. 육담폭포쯤 왔을 때 날이 밝아 왔다. 폭포 위를 가로지르는 다리가 잘 놓여져 있어 힘들지 않고 여유롭게 다리 중간쯤에서 토왕성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 옛날, 투지를 불태우며 쳐다보던, 한편으론 외경(畏敬)스럽기까지 하던 토왕폭을 이제는 차분한 마음으로 바라보게 되다니 …. 세월의 저쪽에 있었던 행위(行爲)의 山이 아닌, 지금 이쪽은 관조(觀照)의 山이 아닌가. 불가(佛家)의 화두(話頭)처럼, 행위자(行爲者)의 동반자(同伴者) 들은 어디가고 이제 인연(因緣)만 남았는가. 그 질긴 인연(因緣)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아무리 금강산의 구룡연이 빼어난 들 정열과 낭만으로 넘쳤던 이곳만 할까.
얼마 전 눈사태로 대형사고가 났던 곳을 통과하여 하단폭 접근로의 급경사 진 긴 빙판길에 들어섰다. 그쯤에서 나는 일단 나의 행색을 살펴 봤다. 검은 모자와 시장에서 급하게 산 1 천원 짜리 장갑, 모직으로 된 반코트에 청바지 차림, 하이킹용 신발에다 조그만 냅색이 전부였다. 76년 당시에 신었던 10발 아이젠은 고사하고 당장 신을 4발 아이젠 조차 없으니 올라갈 일이 염려된다. 그때, 전형적인 겨울 산의 정장차림을 한 사람이 옆에서 "아저씨, 겨울에 그러고 오면 죽어요."하고 경종을 울려 주었다. 졸지에 나는 화려한 외출에서 초라한 꼴로 바뀌어 버렸다. 무안한 마음을 세월로 돌리고 조심스럽게 사람들의 뒤를 밟아 올라갔다.
폭포 밑 대회장에 도착하니 히말라야 베이스 캠프를 방불케 한다. 주관을 한 적십자구조대의 고생한 흔적이 역력하다. 큰 가스버너에 끓인 오뎅과 뜨거운 국물로 아침식사를 한 후 개회식이 시작됐다. 폭포의 좌측 동굴 바로 밑에 눈으로 다진 계단을 만들어 본부석을 꾸미고 그 밑에 선수들이 정렬하자 행사가 시작됐다. 시,도 관계자 및 대산련 회장단의 인사가 있은 다음 나와 박영배 씨를 소개했다. 사회자가 초등 당시의 상황 설명을 하는데 다소 차이는 있어도 주된 부분은 크게 왜곡되지 않아 그런대로 무난히 넘어갔다. 개회식이 끝난 후 바로 경기에 들어갔다. 경기 방식을 보면 빙폭의 삼분의 이 되는 지점에 좌,우로 나란히 두 개의 로프를 고정시키고 그 위쪽에 두 명의 심판이 확보를 하고 있다. 출발점에서 두 선수가 동시에 출발하면 심판이 등반 기록을 재는 속도전인 것이다. 단거리 육상을 빙벽 위에 올려 놓은 것과 흡사하다. 또한 확보자의 위쪽에는 또다른 고정 로프에 매달린 사람이 경기 장면을 촬영하고 있고 출발점 바로 밑에는 대회 스폰서인 진로소주의 「참나무통 맑은 소주」를 붙인 입간판이 서 있다. 그 아래는 본부 텐트, 취사 텐트, 참가 팀의 텐트 등으로 좁은 바닥이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22년 전의 겨울에는 보름 동안 우리 동대 산악부 딱 한 팀만 있어 적막함과 무료함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이곳이 돗데기 시장이 되었으니 격세지감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때의 설악은 고요함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를 가라앉게
하지 않았던가. 위를 올려다 보면 거대한 빙탑이 우뚝 솟아 경건함마저 느끼게 하던 그 빙폭이 왜 이렇게 작고 초라한 모습으로 변모되었는지 의심이 갈 정도다. 어릴 적 보던 큰 못이 커서 다시 와 보면 조그만 연못에 불과하다는 세월의 현실감은 제쳐 두고라도 그것은 주위의 여건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모든 것이 얼얼한 나머지 혹시 착시현상에서 빚어진 결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떠다니는
흰구름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파란 하늘을 오락가락한다.
눈앞의 젊은이들에게 마음속으로 한 마디 던져본다. 문명의 이기가 된 모든 분야에서
등산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등반에 있어 첨단 장비의 활용은 어디까지가 마지노 선 인가.
등반의 속도에 대한 기록에 너무 집착하는 것은 아닌가. 한때는 스포츠라고 각광받던 등산이 물질문명의 지배구조 아래 광대 놀음으로 전락할 운명에 놓여 있지 않은가. 등산은 어디까지나 형이상·하학을 동시에 갖추는 종합 운동임을 부정할 수는 없으나 갈수록 형이하학적인 개념에 집중되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한참동안 눈 속에 서 있자니 한기를 느끼고 마주치는 사람마다 한 잔씩 권하니 하산할 때 쯤에는 제법 취기가 올랐다.
저녁식사 후 본부 임원들과 옛이야기를 안주삼아 좌석의 분위기를 돋구었다. 원래 산꾼들의 생리가 그렇듯이 초록(草綠)은 동색(同色)이라고 처음 본 선배이건 후배이건 스스럼 없이 대작하며 마음을 비우는 것 또한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본부 측에서 나에게는 별도로 방 한 개를 배정해 주어 VIP 대접을 해 주니 오로지 감사할 따름이다.
이튿날 새벽부터 왁자지껄한 소리에 일어 났으나 숙취에 정신이 오락가락한다. 곧바로 임원들과 함께 식사를 하러 밖으로 나오니 갑자기 기온이 급강하했다. 아침식사를 하면서 반주를 했더니 몸이 풀리고 어느 정도 정신을 가눌만 했다. 오늘은 대회 결승전이자 폐막식인데 복장과 장비 상태가 불량해 걱정이 앞선다. 마침 본부에서 오리털 파카와 오버 트라우즈,
낚시용 장화에다 4발 아이젠 그리고 스톡을 지원해 주어 마음이 느긋해 졌다. 역시 뒷동산을 가더라도 준비 만큼은 철저히 해야 하거늘 그래도 이곳은 명색이 엄동기 토왕성이 아닌가. 전원이 출발하고 난 한참 후에야 중무장을 하고 혼자서 어슬렁거리며 올라갔다. 역시 어제와는 다른 분위기다. 아름다운 옛추억을 반추하며 오르는 기분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감회로 엔돌핀의 수치를 최고도로 상승시키며 무아경의 세계로 빠져 들었다. 바로 정적(靜的)인 관념(觀念)의 산행(山行)을 하고 있는 셈이다.
대회장에 도착하니 돌풍과 진눈깨비가 온몸을 휘갈겼다. 북풍과 해풍이 짬뽕되어 그것이 젯트 기류를 형성하여 설악산 골골마다 몰아치는 매서운 설악산 돌풍이 시작된 것이다. 선수들은 동굴에 은신해서 차례를 기다리는 실정이고 덩치 큰 선전 탑은 하늘로 날아 올라 비룡폭 위 저 아래 골짜기로 처박혔다. 발은 얼어오고 장갑은 젖어서 아예 버리고 눈바람이 온몸을 갈겨 대니 그대로 서 있기 조차 힘들었다. 급작스런 기상 악화로 대회 본부에도 비상이 걸렸다. 최대한 빨리 끝내고 철수한다는 결론을 보고 하산을 서둘렀다.
하산길의 어려움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경사진 설벽 위에서는 돌풍에다가 표면에 쌓여 있던 눈이 회오리를 치면서 면상을 들이치니 고글이 없는 나는 눈을 뜰 수가 없다. 설상가상으로 4발 아이젠은 장화 위로 올라타서 장화 바닥이 스키 대용을 한다. 밑을 내려다보니 실히 백 미터는 넘어 보이니 잘못하면 저 밑까지 처박히기 십상이다. 두려워진 나는 스톡을 힘 있는대로 박았다. 까탈스러운 세상, 살 만큼 살았는데 무엇이 또 미련이 남았는지…. 얼어 붙은 손으로 아이젠을 대충 원상태로 돌려 놓고 벌벌 기면서 내려 왔다. 산소만 충분했을 뿐 마치 8천 미터 대에서 내려온 것 같다. 설악의 혼령들이 온산을 헤매이고 아우성치는 소리를 뒤로 한 채 육담폭포 밑 휴게소에 도착해 동동주로 어한을 달래니 그제야 살 것 같다.
폐회식은 원래 현장에서 치르기로 했었으나 기상 악화로 여관의 연회장으로 바뀌었다. 이때 조그만 해프닝이 일어났다. 대회 입상자에게 줄 일부 상을 내가 시상할 예정이었는데 그 당사자가 행방불명된 것이다. 사람들이 식당 등 여러 곳을 찾기도 하였지만 정작 내가 있던 술집을 다행히(?) 비껴 갔다. 결국 식이 끝나고 난 다음에 나타나서 관계자들의 원성을 샀다. 그렇지만 그런 일들은 체질에 맞지 않아 크게 괘념치 않았다.
참가자들이 각자 제 갈 길로 뿔뿔이 흩어지고 난 후 대회 임원들과 쫑파티를 했다. 긴장했던 마음이 완전히 해이해져 흔쾌히 받아 마셨다. 뒷풀이로 속초시 종합운동장의 눈축제 행사장에 가서 돼지구이에 술잔을 기울이니 어느새 흥겹게 가락도 잡혔다. 술에 취하고 기분에 취하고 설악에 취하며 설국의 밤은 깊어만 갔다.
이튿날 물치와 양양 어간에 있는 전형적인 강원도식 한옥 구조의 고택에서 아침을 맞았다. 원래 서예를 하는 박영배 씨가 서예 공부를 위해 이곳에 자리잡고 프로 등산 가이드도 하고 있는 곳이다. 인간의 삶이 물질의 노예가 되어 선택할 권리를 잃고 사는 다수의 사람들에 반해 가진 것은 없어도 자기 개성대로 살아 간다는 건 얼마나 가치 있는 삶인가. 식전에 소공원 밑에 있는 호텔의 사우나에 들어갔다. 멀리 진대봉과 저항령의 흰 능선이 통유리를 통해 바라 보이는 욕탕에 들어 앉았으니 설악가의 노랫말이 떠오른다. 참으로 편한 세상이다. 이십여년 전에 이곳에서 발가벗고 앉아 저 능선을 바라본다는 것을 꿈이나 꾸었겠는가. 잘 정돈된 길과 고층의 호텔, 알프스식 산장풍의 여관촌 및 상가 등이 개발의 부산물이라면 산촌의 조그만 자연 부락에는 이포수와 반달곰, 산양과 은어, 갖은 약초, 금강초롱 등 야생화들의 보존이 있었다. 그 시절에는 여관 주인과 동네 주민, 산꾼들이 겨우 내내 밤만 되면 서로 모여 인정미 넘치는 세상사를 주고 받던 푸근한 낭만도 있었다. 이율배반적인
개발과 보존의, 공존할 수 없는 현실에 따라 다수의 원주민들이 마을을 떠나가고 거대한 콘크리트의 건축물만 위용을 뽐내듯 서 있는 이곳은 고향을 그리듯 찾는 이들에겐 그저 삭막할 따름이다. 마운탁 대장이 남에게 나를 소개할 때는 반드시 전(前) 산악인이라고 수식어를 붙였는데 그만큼 적절한 표현도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미 山의 실직자가 된 지 오래고 이렇게 변한 모습에 기 막혀 하고 있으니 말이다. 일부의 잘못된 부분을 뺀 설악산 전체의 모습은 죄수들이나 다녀오는 더욱 더 삭막한 금강산보다는 훨씬 자유롭고 아름다운 명산임을 명심하고 언제든지 그곳에 갈 수 있다는 점으로 감히 비하하거나 평가절하해서는 안 될 것이다.
흰 능선을 뒤로 한 채 박영배 씨와 함께 경주 방면으로 차를 몰았다. 지난 일을 지우기 위한 듯, 아니면 술로서 해탈하기로 작정을 한 듯, 마시고 또 마시며, 남으로 남으로 내려와
원점으로 돌아온 시각은 출발할 때와 같은 늦은 밤이었다. 이렇게 하여 나흘 간의 환상여행은 끝이 났다. 그동안 나를 초청해 준 설악산 적십자구조대의 마운탁 대장과 대원들, 대회 임원들, 설악산의 모든 가족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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