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언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허긍열 (한국산악회 회원)

요즘 들어 부쩍 '새 천년', '새로운 밀레니엄' 등의 말들을 자주 듣게 된다. 산악계에서도 예외가 아닌 듯하다. 이러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여 우선 우리들은 지난날을 되돌아 보아야 하지는 않을까. 이 땅에 알피니즘이 도입된 지 어찌보면 1세기가 다 되어가고 있다. 서구 산악 선진국들에 비하며 그다지 길지 않은 등반역사 속에서도 우리 산악계의 고산등반은 나름대로 양적, 질적인 많은 발전을 이뤄 왔다고 본다.

하지만 다가오는 새 천년의 시대를 위해선 알파인 등반에 대한 우리들의 자세도 재고해 볼 필요가 있겠다. 고산준령에서 한국 산악인들이 행하고 있는 등반수행 방식이나 능력은 세계적인 현 추세에 비하면 아직껏 걸음마 단계에 불과한 실정이며, 한낱 양적인 숫자 채우기의 거품만 부풀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바로 그 근본원인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알피니즘의 역사는 분명 우리와는 다른 천혜의 자연조건을 지닌 알프스 지역에서 태동한 게 사실이다. 바로 그 천연적인 조건을 지닌 지역에서 자라난 알피니스트들이 수세기의 등반역사를 바탕으로 알파인 등반의 발전단계를 제대로 밟아 오늘날 히말라야나 카라코람의 고봉들에서 뛰어난 활동을 행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우리들은 그러한 자연조건만을 탓할 것인가? 근래 우리 산악계의 해외 등반 경향들을 되돌아 보지 않을 수 없다. 남을 의식하는 보여주기만을 위한 등반으로선 실질적인 등반수준의 향상은 요원할 뿐이다. 서구의 알피니스트들이 알프스 등반이란 알피니즘의 커다란 한 발전단계를 거치고서 히말라야의 고지로 진출한 반면, 대부분의 우리 산악인들은 올바른 등산관 없이 무작정 히말라야로 향하여 어떠한 수단을 써서든 정상에 오르려고만 하지 않았던가! 제대로 알피니즘의 발전단계를 거치지 못한 탓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로 인한 우리들의 등반행위는 남들에 비할 때 스스로 얼마나 많은 떳떳치 못함을 인식해야 했던가! 이제 우리 산악계도 허영의 거품을 빼고서 참된 등반정신을 고취하도록 노력하였으면 한다.

우선은 양적인 등반에서 질적인 등반으로의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본다. 요즘들어 매년 히말라야 고산으로 떠나는 우리의 원정대 숫자만을 따지고 보면, 결코 어느 나라에 비해 적지 않은 실정이다. 하지만 그 양적인 면에 비해 질적인 등반 수준은 그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고 본다. 이러한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 보면, 아직 우리들은 고산등반에서 고정 로프의 틀에서 멀리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고정 로프의 의존도가 높다는 것은 자연히 셀파나 대원의 수가 많아지게 되고 덩달아 전체 원정 규모가 커지는 원인이 아닐까. 특히 이것은 우리가 매스컴의 지명도가 높은 8천 미터급 봉이나 일부 유명봉을 선호하게 되는 이유이며, 이러한 악순환은 그만큼 우리들의 알파인 등반 발전이 더뎌지는 요인이 되고 있다.

고정 로프나 셀파에 의존해 오르고선 세계 초등이니 하는 구시대적인 사고에서 탈피 해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5.60년대의 초등루트를 오르고선 동양 초등이니 한국 초등이니 라고 허울대지 않는 양심이 필요하다고 본다.

또한 히말라야로 진출하는 젊은 산악인들 중에서도 알피니즘의 발전단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본다. 처음으로 행하는 히말라야 등지로의 해외 등반에서 셀파나 고정 로프, 극지법 등반방식 등에 의존하는 산행만 하다보면, 마치 그러한 등반이 알피니즘의 전부인 양 여겨지기 쉽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대부분의 고산 등반 초심자들은 산(山)에 대한 흥미나 열정을 쉽게 잃게 되고, 그만큼 히말라야 등지의 고산에서 알파인 스타일 등반 기술을 발휘하기 힘들어진다고 본다.

'등로주의'를 추구한다는 말이 요즘 들어 보다 많이 들려온다. 바람직한 말이다. 하지만 이것도 정당한, 순수한 스타일이 밑바탕 되어야만 그 가치가 더할 것이다. 제아무리 높은 봉우리에서 곧은 직등 루트를 개척한다고 하지만 고정 로프나 셀파, 산소 등에 의존한다면 극지법 등반의 한 부류일 뿐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작은 봉우리일지라도 그 알피니스트 개개인의 한계(능력)에 맞는 가장 자연적인 등반선을 따라 알파인 스타일로 올라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정당한 방식으로 등반에 임하도록 하자. 보다 정당해야 할 알피니즘이 다른 어떤 인간 활동들보다 '페어 플레이(fair play) 정신'이 결여되어 간다면 알피니즘의 미래는? 무작정 볼트를 난타하면서 암벽을 직등한다는 것은 구시대적인, 이미 1900년대 초에 유행한 직등주의 바로 그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앞으로는 탈 문명 원정 등반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다. 국내 어느 산만 가더라도 정상에서 무선 전화기를 이용하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근래에는 이러한 최첨단 통신 장비를 히말라야의 오지까지 가져가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앞으로는 어느 원정에서든 이러한 추세가 주류를 이룰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통신기기도 고정 로프와 마찬가지로 알피니즘의 모험성을 해(害)한다고 본다. 외부와의 단절(고립)감을 해치기 때문이다. 순수한 알피니즘은 어느 정도 고독이 따라야 한다고 보다. 그러나 전화 한 통화면 헬리콥터가 달려오는 상황에서는 그만큼 모험성이 줄어들 뿐이다. 야생에서의 실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장비만을 가지고서 진정한 성취감을 느껴 보도록 하자.

하지만 단순히 순수한 이런 명목적일 수도 있는 전위적인 목표에만 사로잡힐 필요는 없다고 본다. 실질적인 등반 행위를 즐길 수 있어야 되겠다. 사실 우리들이 행한 보다 나은 등반이었다고 생각했던 히말라야의 어떠한 벽등반이었든 설사 셀파나 고소 포터 등을 고용하지 않았고 고정 로프나 물량 공세에 덜 의존했더라도 과연 그 벽 전체 등반에서 등반자 개개인이 수행한 순수한 등반의 질과 양은 얼마나 될까? 과연 자신이 실질적으로 그 등반에 몰입해 진정한 만족감을 느끼며 선등한 피치는 몇이나 될 것이며 그 등반에서 자신이 얼마나 흡족해 했을까?

자신의 한계에 맞는 능력을 즐길 수 있는, 낭만스런 여유도 가져봄직 하다. 그리고 정신(생각)이 없는 산행의 가치(의미)가 얼마나 지속되겠는가. 그 가치라는 것도 단지 기록적인 면만을 추구한다면 껍데기 일 뿐인 것이다. 스스로가 만족하는 산행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들은 산에 왜 가는 가에 대해 다시 한번 자문해 볼 필요가 있겠다. 어쩌면 생명까지 위태로운 상황까지 자신을 몰고가는 이유는? 스폰서의 광고효과나 자신의 명예를 위해, 아니면 자아실현이나 새로운 기록을 위해? 좀더 그럴 듯 하게 말하면, 인간능력의 한계를 극복하고픈 불가능에의 도전의식 때문인가? 자신의 목숨에 비해 이러한 것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등산에선 프로가 허용되지 않는다고 본다. 왜냐면 그만큼 왜곡될 소지가 많기 때문이다. 자신과의 경쟁이라기 보다는 남들과의 경쟁이 앞서게 되고 등산에서도 시장원리가 적용되는 안타까운 현실이 아니던가. 아무리 인간본성에 경쟁적인 야성이 내재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이성적이었던 우리의 산악 선배들은 그러한 경쟁은 단지 '자기 자신과의 경쟁'으로만 한(限)하지 않았던가? 남들과의 경쟁은 단순히 등산을 스포츠로 전락시킬 뿐이다. 세상이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고 변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다면, 그 중 하나가 알피니즘(Alpinism)이 아니던가? 이제껏 등산이 너무 물질만능주의에 젖어 육체적인 면에 치우치게 되었으며, 그만큼 등반사고율도 커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여겨진다. 아무쪼록 새 천년의 시대에는 정신적인 면이 중요시 되는, 우리들 삶과 함께 고뇌해 볼 수 있는 보다 건강한 산악활동으로 발전했으면 하는 희망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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