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1. 최영식과 나, 그리고 東國山岳會
임 돈

내가 최영식형의 부음에 접한 것은 지난 1월 임신철군의 "캘리포니아"로부터걸려 온 장거리전화에 의해서였다. '손수남군의 집에 왔으며 몇 일 쉬었다 갈 것' 이라는 안부전화가 온지 하루인가 이틀 후에 또 걸려 왔던 것이다.

"영식이 형이 돌아가셨답니다. "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도시 믿기지 않는 일이다. 80,90 장수는 문제 없으리라 생각되게 단단한 사람이. 그렇다면, 사고사일까 하는데 신철군의 말이 이어졌다. "간이 좋지 않아서 병원 출입을 하셨던 것으로 압니다. " 아, 그랬었구나. 그렇다면 할 수 없는 노릇이었구나. 확실히 그는 애주가였다. 그러던 것이 내가 떠나온 뒤 과음으로 변한 모양이다. 언젠가 내가 일시 귀국했을 때 반주를 곁들인 식사를 하면서 " 임선생 미국 가신 후 많이 마셨습니다." 하던 말이 생각난다. 그래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서울에 국제전화로 확인하고 그후 귀국하여 묘지를 찾아가서 작별하고야 '다시는 못 만나겠구나'하고 명복을 빌며 돌아섰다.

최형을 생각하면 산이, 산을 생각하면 최형이 생각날 정도로 우리의 교우관계는 산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최형과 나는 산으로 해서 알게되었고, 함께 산행을 했으며, 내나이 30이 넘어서 최형 덕에 암벽등반을 시작하여, 북한산의 인수봉을 비롯하여, 백운대 정면벽, 노적봉, 그리고 도봉산의 선인봉, 만장봉 등을 오르내렸다. 그러면서 동국대학교 산악부를 창설하고 한국산악회 주최 등행경기에 입상하고, 하계 설악산등반과 그 직후에 보고서를 겸한 사진 및 장비 전시회를 개최하고, 동계 설악산등반(나는 불참)을 통하여 대학산악부로서 기초를 단단히 다진 것이 엊그제 일 같은데 벌써 40년이 넘는 옛일이 됐고, 이제 최영식형은 운명을 달리하고 나는 이국 땅에서 인생의 황혼을 맞고 있으니 감회가 새로우면서 감개가 무량하다.

나이 탓인지 가만히 있으면 지난 일들이 회상되는 일이 많아졌는데, 근래에는 최형과 산행하던 일들이 자꾸 떠오른다. 일요일마다 하루도 빼지 않고 산행을 하던 50년대 말인가 60년대초 어느 일요일 주봉 암벽등반을 하러 거의 다 올라가다가 주봉등반을 하다 실족, 부상당한 고등학생을 하산시키고 있는 유창서군을 만나 그 일행을 도와 도봉리 버스 종점까지 내려온 최형과 나는 맥이 빠져 누구의 의견이었는지 주봉은 다음기회로 미루고 시내로 들어오는 버스를 타고 돈암교에서 내려 동도 극장(재개봉극장)에 들어 간 적이 있다.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어찌나 졸음이 쏟아지는지 한참 졸다 깨어보면 옆자리의 최형도 코를 골고 있었다. 그리고 졸면서 잠결에 본 영화의 여주인공의 연기가 눈에 띈다 싶었다. 나중에 신문에 난 극장광고를 보고 그때 그 영화가 "여와 남"이었으며 여자 주연이 그때 인기절정이었던 도금봉이었음을 알았다. 또 한번은 어느 날(일요일이 아닌)저녁때 예고 없이 최형이 찾아왔다. 버스를 타고 광화문을 지나오다 보니 "씨내마 코리아-조선일보 4층에 있는 재개봉관-의 간판에 '산에서 돌아온 사나이'인지 제목은 확실치 않는데 산 그림이 굉장하더라"는 것이다. '산'이라는데 안가볼 수 없었다. 둘이서 그길로 직행했다. 가보니 '살아서 돌아온 용사'든가 이었으며 간판 그림에 험악한 절벽에 한 사나이가 매달려 있었다. 지금 자세한 것은 생각나지 않는데 미첩보원의 활약상을 담은 영화였지 않았나 싶은데 그런 대로 재미있게 보았다.

그리고 그 즈음에 최형이 "스키협회"에서 얻었다는 표로 단성사 시사실에서 "스키"에 얽힌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최형과의 영화 관람은 이것이 전부가 아닌가 싶다.

최형 대학졸업 직전인지 직후인지 산악부 고문이신 전규홍박사가 찾으셔서 부총장실로 찾아뵈니, "최군 취직했나?" 하고 물으시기에 "아직 못한 걸로 압니다. 좋은 곳 있으면 말씀해주십시오"하니 "그렇지 않아도 몇 일전 대한여행사 오사장을 만난 자리에서 " '보물'하나 줄테니 받으시오. 했으니 "찾아가 보라고 하게" 하시지 않은가. 전후복구가 어느 정도 돼가고 생활이 안정되기 시작하여 여가를 이용하는 '관광'붐이 일기 시작한 무렵이었다.

이렇게 해서 최형은 자기의 재능과 기량을 살릴 수 있는 사회진출을 하게되었다. 그후 출장, 특히 주말출장이 많은 최형의 직장사정 때문에 나와의 산행기회는 차츰 줄다가 아주 없어지게 되었다. 내가 동대 경영학과 전홍교수와 함께 산에 가기 시작한 것이 그 무렵부터이다. 전홍교수의 친구인 동아일보 전기준부장, 경기고교 김두호 선생외 몇 분이 일행이 되어 자칭 '미노회'라 하여 일요일마다 서울 근교산을 찾았다. 물론 '하이킹'이다. 연휴에는 설악산 현등사, 강화도 마니산, 속리산, 문경새재 주흘산, 소백산, 그리고 무주구천동 속리산 등을 찾았다.

68년 10월 동국산악회 발족후 월 1회 정기산행이 시작되면서, 그날은 나만 빠진 '미노회'는 따로 산행하던가 때로는 정기산행에 합류한 일도 있었다. 간혹 기회가 되면 최형도 '미노회'에 참가하여 하루를 즐기기도 하였다. 60년 9월, 내가 결혼하고 다음해 인지 다음다음해 인지 최형이 장가가니(그때 내가 장가갔었음) 그후로는 가족끼리의 두터운 교분으로 발전하여 60년대 말, 어느 여름에는 아이들(우리 둘다 아들 둘씩이었다)을 위하여 '만리포'해수욕장에서 함께 일주일을 보낸 일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최형과 산행을 많이 했는데 비하여 막영이든 산장에서든 여관에서든 함께 숙박한 일이 과히 많지 않다. 산행에서는 58년 산악부창립 직후, 첫 번째 설악산하계 등반때 부총장 전박사를 모시고 갔을 때와 68년 여름 일본입교대학 산악부와의 합동등반때 뿐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 외 어느해 연말 부산에서 있었던 정진영군 결혼식에 참석하여 여관에서 같이 지냈던 적도 있었다. (그때 차안에서 서울 대연각호텔 화재의 임시 뉴스를 들은 기억이 난다)

두 번의 산행이 다 같은 설악산이니 설악산과는 인연이 깊은 모양이다. 두 번다 내설악에서 정상경유 외설악으로 넘어갔다. 정상까지는 첫 번째는 오세암 경유고 다음 번은 쌍폭경유였다. 그런데 참가팀 구성이 어떻고, 경유지가 어디였든가가 문제가 아니라 그 두 번의 산행이 다 동대산악부의 앞날에 대단히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고, 앞으로의 나갈 길을 구상하는 좋은 기회가 됐던 것이다. 즉 첫산행 후에는 등반보고를 겸한 사진 및 장비전시회를 구상하여 대학산악부다운 행사 뒷마무리를 짓는 선례를 만들었고, 두 번째 산행 후에는 그전부터 말이 있었던 동국산악회 발족을 실현시킨 것이다. 산행하면서 우리 둘은 산악회에 대하여 몇 차례 얘기를 하긴 했으나 구체적인 얘기를 주고받지는 않았었다. 각자 마음속으로 이것저것 구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나는 생각이 자꾸 앞서가 발족후의 행사계획에까지 달려갔다. <회원이 자주 만나기 위해서는 월1회 산행은 해야겠고, 회원전체가 년1회 이상 산에서 어울릴 수 있는 행사도 갖아야겠고, 지성인의 모임답게 회법을 만들어야겠지. 그러자면 적지 않은 재정적인 뒷받침 필요할 텐데 그것을 어떻게 마련해야지...등등>이었다.

그 산행에서 돌아온 지 20여일 만인 68년 9월 6일, 발기회를 구성하고 그후 20여일 만인 9월30일 창립총회를 가져 동국산악회가 탄생한 것이다.

산악회를 만들었으면 하는 것은 산악부출신 졸업생이 해를 거듭할수록 늘어나면서 누구나 마음먹었던 것이었다.

사회 진출한 OB들이 많아져서 후배 현역 산악부의 하계, 혹은 동계등반 전에 돌봐주고, 격려해 주고, 돌아오면 위로해 주는 미담이 들려오고 또 직접 목격도 하니 흐뭇했다. 그런데 OB 몇몇이 화합이 잘 안 된다는 얘기가 들려올 때도 있었다. 그 OB들을 만나보면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오해일 것입니다. '라는 것이다. 이런 일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전 OB와 전 현역부원을 한데 뭉치게 하는 것이 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차에 강정수군이 찾아왔다. 장가가게 되었다는 인사차였다. 그 자리에서 산악부출신은 선후배 친부친을 따지지 말고 전원 초청할 것을 부탁하였다.

68년 1월 14일 결혼식장에는 의외로 많은 산악부 OB와 타대학 산악부원이 참석하였다. 식후, 신랑 강군의 특별배려로 산악부 관련자 전원이 종로 한일관 같은 방에서 점심을 먹게 되었다. 이 자리에서 전부터 얘기가 있었던 산악회를 만들자는 의견이 이구동성으로 나왔다. 그 자리에서 모임을 만들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은 분위기였으나 졸속을 피하고 짜임새 있게 하기 위해서는 좀 여유를 가져야 될 것같이 산악부창립 10주년이 되는 그해를 넘기지 않기로 하고, 그날 회식을 마쳤던 것이다. 그후 차일피일 미루어 오던 것이 두 번째 산악부 등반을 마친지 한달여 만에 결실을 본 것이다.

73년 10월 3일 공휴일인 개천절날 저녁에 나는 김포공항을 떠나 이민길에 올랐다. 산악부원들의 산행에 지장을 안 주기위해 최형과 그때 ≪동국산악≫제 4호 편집을 맡고있던 강성윤군에게만 그 전날밤 나의 출국을 알렸었다. 그런데 많은 부원들이 산행을 단축하고 등산복 차림에 장비를 짊어지고 공항에 나와 환송해 주었다. 그후 몇 차례 일시귀국을 했었다. 그때마다 산 친구들은 OB는 물론 낯모르는 현역 부원들까지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다. 특히, 75년 10월 아버님이, 그리고 95년말 어머님이 돌아가셨을 때는 말할 수 없을 만큼 애들을 써주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산 친구들은 몇 년 혹은 10년이 넘어서 만났는데도 엊그제나 혹은 몇 달 전에 만났던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특히 최형은 내가 서울에 있는 동안 틈만 나면, 혹은 누구를 기다릴 때에는 종로 가까운 자기가 근무하는 '태화 빌딩' 9층 사무실로 오라는 것이었다. 그곳에 가면 차도 대접받고, 마음 편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조금이라도 같이 있고 싶고 나를 편안하게 해주려는 배려였던 것이다. 지난 5월 귀국시 그 근방을 지날 때마다 그때 생각이 간절하였다.

내가 최형에게 미안하게 생각하는 것은 미국 구경을 시켜드리지 못한 것이다. 돈 버는데 재주가 없는 나로서는, 금전적 그리고 시간적 여유가 없어 도저히 친구 초청은 할 엄두를 내지 못 했을 것이다. 몇 차례 '뉴욕'의 이구용군과 최형 초청에 관해 여러 가지 방법을 전화로 얘기한 적도 있었으나 결국은 실현되지 못했고, 작년 말경에 내년(2000년)에는 내나이도 있으니 은퇴하고, 그때 최형 내외분을 초청하여 미 대륙횡단을 할까 생각하여 98년 말 크리스마스 카드 겸 연하장을 보낼 때 99년 5월경에 일시 귀국할 것을 적어 보냈다. 자세한 얘기는 그때 하자는 생각이었다. 많이 달리지 않는 차가 있으니 휘발유 값과 '모텔' 숙박료만 있으면 식사는 취사도구에다 쌀과 밑반찬만 있으면 산에서 야영할 때처럼 지어먹으면 큰돈을 들이지 않을 것이고, 시일도 20여일 안팎이면 '요세미테', '옐로스톤', '그랜드케니언' 그리고 '나이아가라 폭포'등 이름 있는 국립공원도 보고, 미국 각지서 활동하고 있는 산 친구들도 찾아보게 될 것으로 생각하여 계획했었던 것이었다. 그랬던 것이 최형이 너무 성급하게 먼저 가는 바람에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 것이다.

이제 최영식군은 갔어도 그가 기초를 닦은 동국산악회는 후배들에 의해 꾸준히 발전해 나갈 것이다.

후 기

이 글을 쓰면서 내가 전에 쓴 글(동국산악 창간호, 제2호의 여명기나, 제8호에 인용한 동대신문에 기고한 '68년 일본입교대팀과의 합동등반기')과 중복을 피하려 했으나 그래도 중복된 부분이 있음은 40여년 전의 일들이고 지금 나의 주변에 자료가 없는 탓으로 돌려야 되겠다.

그때 글을 읽다보니 <68년 9월 6일 저녁 파고다빌딩의 한국산악회 회의실에서 토의를 갖고 11명으로 발족위원회를 구성했는데 발족위원으로는 최영식, 이상학, 김진수, 권영시, 유창서, 김충배, 김민수, 이구용, 노세성, 김항진과 내가 선출되었다. > 라고 되어 있는데 그중 최영식, 김충배, 노세성은 타계하고, 이상학, 이구용 그리고 나는 국외에 나와 있고 나머지 5명만이 활약하고 있으니 세월이 유수와 같고, 세상사가 무색함을 절실히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다시 한번 먼저간 산친구들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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