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 모

전치수 그는 누구인가!
하규용

그는 누구인가? 비범한 재능과 대조적인 현실적 결함을 가졌으며, 우리의 친구였으며, 국외자이기도 했던 사람, 그 자신은 바로 어떻게 생각하고 살려했는가 하는 점을 추적하기로 한다.

동국산악 편집위원의 원고 청탁을 받고 선뜻 대답했으나 과연 내가 얼마나 이친구를 이해했고 알고 있었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되었다.

택한 방법이 그 주변의 몇 분들을 만나게 만들었고 전화로도 물었으며 나름대로 추측해 보기도 했다. 나의 주관이나 편견보다는 좀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기회를 그가 살아있을 때가 아니라는 점이 아쉽다. 인생의 대부분이 그렇듯이 때가 지나고 나면 더 잘 보일 수 있음을 언제나 우리는 뒤늦게 알게 되는 것이다.

1948년생, 1999년 타계. 부친은 경상도, 어머님은 청주 태생이셨는데 부친은 일찍 돌아가시어 어머님과 누님 형님 밑에서 성장한 막내아들이었다. 서울 휘경동에서 출생 영등포국민학교, 휘문중고등학교 졸업, 대부분의 성장 과정은 영등포에서 생활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40세 정도까지는 상당한 어머니의 재산이 있었으며, 경제적인 어려움은 없었다. 이런 점은 그의 태평하고 때로 무심한 성격의 일면을 갖게 한 요인일 수도 있다. 어머님은 작은 키에 전치수의 외모를 많이 물려 주신 분 같았고, 단호하고 결단있는 분으로 보였으며, 경제적인 면에서 유능하신 분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 어머니는 전치수 사망후 일년이 안된 금년 1999년 10월 에 돌아가시었다.

그의 인생을 나누어 볼 때, 첫째 출생 및 성장 기타 청년기로 보아야 한다.

우리 산악회원들은 대학에서 만난다. 휘문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의과대학에 합격했었는데, 작고한 형님 (이분은 전치수보다 1년전에 타계)이 식품공학과가 유명하다고 동국대학교 식품공학과 진학을 권유한 것으로 안다. 대학 입학후 신입생 산악부원들은 10여명이 되었는데 춘계 희양산(경북 문경 소재) 산행 후에는 산악부 활동에 참여 하지 않았는데, 이는 그의 강요 받거나 억압받기 싫어하는 성격탓도 있었을 것이다.

이때의 산악부장은 오인환 선배였는데 하계 한라산 등반에서 폭우가 쏟아지는 정상부근에서 전치수와 같은 학과(식품과) 친구인 양찬석(?)이 우리와 만나게 되었다. 그 후에도 독자적으로 산에 다녔고 일 학년이 지나갔다. 그가 본격적으로 산악부활동을 한 것은 오히려 이학년때부터 산악부장이 된 삼학년 때였으며 선배와 친구들 사이에서는 그의 특이한 개성과 돌발적인 자기주장이 결국 별명을 만들게 되었는데 "괴물치"라고 불렀다. 이 별명은 이름보다 더 많이 사용되었다. 이 당시 그는 영등포역 앞에서 살고 있었는데 필자와 만나면 밥도 사고 술도 사주고 친구에게 쓰는 돈을 아까워하지 않았고 베풀기를 자연스럽게 했다. 그 집은 대로변이었는데 지금은 보험회사 사옥이 되었음을 보았다. 일층은 식당이었고 이층 삼층은 여인숙 이었으며, 사층이 살림집이었던 것 같다. 거의 혼자서 살고 식사는 아래층에서 해결하는 듯 했다. 당시의 나는 노량진에 기거하므로 가끔 가서 만나곤 했다. 이 시기에 많은 대화를 할 수 있었고 철학적 대담이 많았다. 그는 음악을 좋아했고 어떤 때는 바이올린을 연습하기도 했다. 소질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열심히 하는 듯 했다. 또한, 책읽기를 좋아했고 심각한 편이었다. 나도 작가가 되려고 독서를 많이 했으나 현실을 모르는 나이였다. 현실 모르기는 그 또한 어린아이 수준이었고 세월이 가도 그는 그러했다. 어떤 사안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말했고 그 논리가 항상 그렇듯이 벽에 부디칠 때면, 특유의 엉뚱한 발상으로 반전을 시키거나 대화 상대를 맥 빠지게 하는 것도 특징이었다. 이런 특징은 그의 평생을 통하여 간간히 보여졌고 아마도 때로는 사회 생활을 힘들게 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였다. 산악부가 도대체 되지 못하였다. 누구는 잘못됐고 이런 일은 틀렸다. 수준이 떨어진다고 직설적 자기 의견을 진지하게 말한다. 상대가 동의하거나 반론을 제기하면 주변 뿐만 아니라, 말상대 까지도 틀렸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물어본다. 도대체 너는 왜 화를 내며 잘못되었다고 부정적으로 보냐 그러면, "화내는 것? 부정적 견해? 아! 내 취미야"

그의 비약적인 발상이나 독선적 대화법은 주변 관련인들과의 융화라기보다는 두려운 존재로도 보이게 했고 배척받게도 했음이 사실이다. 경제적인 어려움과 힘든 현실을 모르고 자란 그는 훗날 많은 시련뒤에 사십이 넘어서야 아는 듯 했고 수용하는 듯 했다. 처지가 다른 나는 몇 년 뒤에 생활에 매달리는 속물로 변해갔고, 그는 그 후에도 순수했고 현실문제는 심각한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 심각한 것은 "더 이상적인 것" "독보적인 존재가 되는 것" "더 순수한 것" 등이었다.

몇년 뒤 대학생활도, 산과 등산에 대한 정열도 지나가고 군대 제대후에 그를 보게 된다. 이 때는 자기 형님과 무역업을 하느라고 바쁜듯 했으나, 아마도 그러한 것들은 그를 싫증나게 하였을 것이고 차츰 돈걱정을 모르고 자란 이 두형제에게는 현실적 패배가 성공보다 더 쉬웠을 것이다. 그의 형님은 일류대학 상대 출신이었는데 호인이었으나, 돈벌이에 유능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 후 그가 결혼했을 때, 산악부 친구들과 여의도 아파트에서 만나게 되는데 늦은 나이였고 곧 유일한 혈육인 아들 명선이가 태어난다. 세월이 가면서 그 아들은 그의 위안이며, 희망이었다고 한다. 학교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려 같이 밥을 먹으려 했고 친구처럼 대화하였다고 한다. 그의 결혼생활은 일년 정도였고 나머지 일평생을 독신으로 살다 가게 된다. 1974년 가을 즈음 언제나 그가 그러했듯이 바람과 같이 동국대학교 교정에서 만났다. 인도철학 석사과정 원생으로 보게 된다. 곱슬머리 장발을 하고 무언가 생각하며 스산한 교문 언덕배기를 올라오던 그의 모습이 지금도 선연하다. 이때 이후의 그의 생애는 힘든 고행이었으며 순탄치 못했으며, 만용과 방황과 실패속에서 꽃을 피우고자하는 철학자로서의 치열한 길이었다. 또 다른 친구와 학문, 진지함, 갈등의 시간이 온다. 그의 생애 중 가장 중요했고 최선을 다했던 약 15년의 흔적을 더듬어 보기로 한다.

1976년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 석사

1977년 형을 도와 무역업 종사.

1978년 미국유학(인도철학) 결심, 도미

1978년 그의 전공은 일본이 앞섰음을 알고 일본으로 유학, 동경대학 대학원

연수생 과정 입학.

1979년 동경대학 인도 철학과 동대학원 박사과정

1981년 잠시 귀국.

1982년 인도여행

1984년 인도에서 귀국.

1984년 - 1992년 동국대학교, 목원대학, 중앙승가대, 동방불교대학, 호서대 등

강사 역임

1990년 -1992년 불교사상 연구소 소장.

편저 및 번역서

<<인도 불교의 인식과 논리>> 카지야마 유이치 저. 전치수 번역.

1989년 7월30일 발행 민족사.

<<불교학의 기초지식>> 전치수 편역.

1992년 9월 30일 불교사상사 발행.

<<불성이란 무엇인가>> 타카사키지끼도 저. 전치수 번역.

1998년 11월 3일 여시아문 발행.

논문

<<一切智者의 論證>>

<<他者의 否定연구>>

<<法秤의 量評譯 연구>>등.

1999년 타계

그는 군대 제대 후,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 인도철학과 석사과정 학위를 받았다. 이후 잠시 형님과 함께 무역업을 하다가 미국유학을 결심하고 미국으로 간다. 목적은 인도철학 공부였다. 그러나, 인도철학, 논리학, 인식론 등은 일본이 앞섰다고 판단, 일본으로 가서 동경대학 대학원 연구생이 된다. 이때 지도교수 다카사키 지끼도(高奇直道) 가 그의 열성과 비범함을 알고 박사과정에 편입학 시키는데, 정신문화원 교수 이종철 박사의 말에 의하면 이 분야에서는 동경대학에서 공부한 한국 사람도 없었고, 한국의 학위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입학시킬 수도 없었다고 한다. 그 지도교수는 연구 업적이 많은 권위자며, 주임교수로써 학칙 내규를 바꿔서 그를 입학시켰다고 한다. 전치수에 대한 기대가 어떠했는가 하는 일화이다.

그러나, 그 다카사키 교수의 퇴임 후에 신임 지도교수와 뜻이 맞지 않았다 하며 박사학위 취득을 못하고 후에 귀국하게 된다. 전치수의 누님이며 그의 힘든 생활을 평생 보살펴주신 무악재 "능인선원" 스님의 말에 의하면 당시 신임 지도교수에게는 사찰과 외딸이 있었는데, 독신인 전치수에게 결혼시키고 일본에 남기를 원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일본여자와는 결혼 안한다고 말해서 미움을 받게 되었다고도 한다. 그는 능히 그런식으로 말하고도 남을 성격이었다. 일본을 좋아하지도 않았고 일년에 한 두번 귀국할때도 책과 문방구 이외에는 일본제품을 하나라도 사가지고 온 적이 없었다고 한다. 어찌했던 박사학위를 받지못한 것은 훗날 귀국하여 교수직을 원했던 그에게 큰 장애가 되었다. 일본에서는 자비로 유학했는데 초기에는 어려움이 없었으나 중도에 그의 형이 실패하고 그의 몫이었던 부동산까지 부채로 넘어가게 되어 생활고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후배인 이종철 교수에 의하면 그는 후배에게는 베풀려했고 잘 대해 주었다고 한다. 일본 학생들과 기거했고 주로 기숙사에서 칩거하는 생활이었다고 한다. 언젠가 필자와 만났을 때 일본생활이 힘들다고 했고, 돈 씀씀이도 매우 검소해 졌다. 그로써는 악전고투의 생활속에서 연구생활을 한 것이다. 그는 불교논리학을 연구했고, 이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받으려고 했다. 그와 강사시절에 가까이 지냈던 동방대학 교수 道松(최성규)스님의 설명에 의하면 그는 불교(인도) 논리학은 국내에 기초가 없으므로 자기가 기초부터 만들고 완성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또 이에 대한 자료수집과 저술을 준비해 왔다고 한다. 서양논리학이 정반합에 의한 단순 전개라 하면 인도(불교)논리학은 복잡한 논리학이다. 인도는 힌두교가 주종인데 다신교이고 창조이론 등으로 복잡한 논리학이 발생했다. 불교논리학은 자연히 삼단논법이 아닌 오단 칠단논법으로 전개될 수 밖에 없는데, 그는 이런 분야에 적합했고 집착을 가지고 사색했을 것이다. 또 하나 그는 불교용어의 개념에 대한 분석을 집대성 하고저 했다. 불교에서 경전은 부처님 말씀이고 참선을 통한 깨달음이 부처님 마음의 전수라 할 때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수 받을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이거나 수행자로 제한되어 있으며 일반인들은 모두 말에서 말로 알아들을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용어에 대한 올바른 분석이 꼭 필요하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스크리스트 원어에서 -한문을 통한 이차번역으로는 안되고-직역을 해야 된다고 했다. 현 동국대학교 주명철교수가 뒷날 이러한 기관을 만들려고 할 때 기꺼이 참여하여 한국불교에 이바지하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일본에서 돌아와 국내대학에서 강좌를 맡는데 인도논리학 불교논리학 인식론 등을 강의 했다. 그러나, 그는 대인 관계에 무심했고 정직하나 직선적이고 비타협적이었기 때문에 마침내 문제가 일어난다. 1990년대초, 기독교 재단의 목원대학 강사때에 기독교에 대한 편견을 서슴없이 피력하였다고 하여 그의 강좌를 몰수한다. 또 중앙승가대학 강의에서도 비슷한 불협화음을 일으켜 학기중에 강좌를 타의로 중단하게 된다. 그 당시에 그는 스님들을 상대하는 강의가 있으면 아침마다 목욕을 하고 나갔었다는데, 그것은 고지식한 학문적 열의로 보고 학문적으로 논의 되어야 할 것이나, 우리의 권위적인 대학 풍토와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학계가 영합하지 못하는 그를 좌절시킨다. 그후 그는 번역과 저술준비에 몰두하게 된다. 이러한 일 뒤에 주명철 교수가 사석에서 동경대학에 다시 가서 박사학위를 취득하는 방법이 어떠냐고 하니 그의 말은 - 동경대학에서도 이 분야를 연구한 사람도 많지않고 자료수집관련 논문 서적준비 인식론에 필요한 상스크리스트어 원전번역 등도 준비해 놓았다. 하고는 싶은데 학위를 받아도 교수하기에 늦었고 무엇보다도 건강이 좋지않다. 하고저 하는 저술이라도 끝낼 수 있으면 좋겠다 - 라고 술회하였다고 한다. 그답지 않게 화내지도 않았고 열의도 있었고 담담하게 말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건들 후에 주위 사람들은 은근히 스님되기를 권유했는데 본인도 원치 않았고, 그렇게 되지도 않았다. 세월은 몇 년이 흘렀고 그가 죽기 몇 주전에 병석에서 나와 몇번 만나게 된다. 그는 동경유학시절에 주차장에서 넘어져 오른쪽 앞가슴이 반년이 넘도록 아팠다고 한다. 돈이 없어 병원에도 못갔는데, 이것으로 간이 나빠졌고, 간암이 되었다고 본인은 믿고 있었다. 고통스러울 때 내가 통증을 완화시켜 주었는데, 우리는 좀더 친구로서 이해되어 갔으나 너무 짧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 내가 인도논리학(불교논리학)저술을 위해 오랜동안 자료수집과 번역 등을 해놓고 메모를 준비하여 집필을 시작했다. 이렇게 누워있으니 계속할 수가 없어 안타깝다. - 그의 광기어리던 옛날의 눈빛은 사라지고 애처로웠다. 열정적이고 괴팍했기에 순수하기도 하고 솔직했던 사람. 돈도 모르고, 물욕도 없었던 우리의 친구는 재 한줌의 육신을 던져버리고 이렇게 살다가 갔다.

나무지장보살 마하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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