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시간여행 : 백두산 기행문
유태원


올 99년 여름은 유난히도 무덥고 지루한 여름이였던 것 같다. 피부에 느껴지는 IMF 시대의 고통과 이상기후의 연속으로 많은 고통을 주었고 국회는 연일 잠자고 국민의 힘이 되어 주지 못하는 정치는 머리를 아프게하고 매일 반복되는 일과는 변화를 원하며 새로운 탈출구와 창조의 씨를 찾아서 마음의 문과 정신의 문을 열고 싶은 마음에 보따리를 싸서 일상을 떠났다.

황혼에 물들은 중국 연길 공항에 도착하고 보니 새로운 세계와 접하는 풍물이 그래도 마음을 따스하게 감싸주는듯 했다. 시내 거리는 60년대 말의 어느 시골 읍내처럼 보였고 시내로 들어가 보아도 그리 낯이 설지 않고 다만 시간여행을 하는 느낌을 강하게 주었다. 질퍽하니 퍼진 노점 상인들의 호객행위나 잡다한 잡화를 손수레나 좌판에 펼쳐 놓고 흥정하는 모습은 우리 장터와 별 차이가 없는 삶 그 자체로 여유와 정이 담긴 모습이었다. 아침 일과는 일찍 시작되어 공원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무술체조인 태극권을 하며 신선한 공기를 음미하듯 춤을 추었고, 피어오르는 새벽 안개 사이로 어느 노부부의 무도 춤은 신비스럽기만하다. 아침 햇살의 눈부심과 백두산 천지를 볼 수 있을지의 의문과 기대로 설레이는 마음을 진정시킨다. 연길 시내를 벗어나 서울의 남산 격인 모아산(毛兒山)을 끼고 돌면 사과 과수원을 볼 수 있는데 대단히 커서 이곳 사람들은 맛과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수확철이 아니라 맛은 볼 수 없어 서운했지만 그들의 설명만으로도 맛을 본듯 했다.

해란강 굽이치는 용정 땅. 독립운동의 전초기지이며 독립운동가의 애환이 묻힌 유서 깊은 작은 마을이다. 가곡 「선구자」의 일송정과, 윤동주가 조국을 그리며 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이곳을 오르며 쓴 것이라고 한다. 잘 보관되고 정리된 용정중학교의 작은 박물관은 독립운동의 역사를 말해 주었고, 민족애가 꿈틀대는 용솟음을 느꼈으며 투쟁의 역사 현장을 보니 마음이 숙연해졌다. 넓고 푸른 평야의 훈훈한 바람과 탁 트인 넓은 들판은 마음을 한결 가볍게 해주고 옹기종기 모여진 촌락의 시골풍경은 시골 할아버지와 더불어 편안하고 포근한 온정을 느끼게 해 주었다. 시골집 주막들이 모여있는 아담한 마을 이도백하(

二道白河)는 백두산 아래 첫 동네로 마을 인심이 좋고 백두산 산채나물이 유명한 이곳은 산나물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꼭 둘러볼 만하다. 푸짐한 산나물과 손두부에 독한 곡주로 입맛을 돋구고 시원한 백두산 천지의 천연수로 몸과 마음을 정화하듯 들이키니 온세상의 허풍과 허세도 떨어지는 듯 했다.

비포장도로 양편의 원시림 숲은 터널을 이루며 끝없이 연결되어 있었고 숲속은 그 깊이를

알수 없을 정도로 검고 신비스럽기까지 했다. 곧게 뻗은 나무들이 하늘을 찌르며 양편에 도열하여 있고 너무 울창하여 하늘을 볼 수가 없었다. 지프차로 굽이굽이 아슬한 포장도로를 올라가면 고산식물로 옷을 갈아 입고 왼쪽으로 펼쳐 진 능선은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또다른 능선에 연결되는데 …. 원시림의 푸르름이 검은 능선으로 변하고 나즈막한 구름이 띠를 이루며 운해로 변하니 능선의 장엄하기가 비할 때가 없고 탁트인 산천이 나무 바다를 이루니 백두의 정기가 흘러내림을 보는 듯 푸르른 능선은 끝이 보이질 않았다.

기상대에 오르니 여름에도 두꺼운 외투를 입고 있었으며 변덕스러운 날씨는 여전하여 개스가 끼고 바람도 심하게 불었다. 천문봉(2670m)에 도착하였으나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우뚝 솟은 비석에 천지라는 글씨 뿐 바로 서있는 땅도 보이지 않았다. 천지 보기가 쉽지 않다고 하더니만 하며 궁시렁대고 있는데 구름사이로 시커먼 것이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사람들이 천지라고 했다. 믿어지질 않았다. 구름속의 바다였다. 너무 시퍼렇게 빛나서 섬뾵한 기분이 들 정도다. 흑백필름을 준비하고 있는데 나에게도 기회는 왔다. 장엄한 천지의 모습이 구름을 헤치고 서서히 그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가슴이 벌렁벌렁 뛰었다. 히말라야 산맥의 흰 피나클 파노라마를 보고 가슴이 뛰듯이 그때 그 감동이 오랜만에 전해지는 것을 느꼈다. 푸르름과 넓고 장엄함에 놀랐다. 한라산 백록담에 플러스 알파 정도로 생각했는데 차원이 달랐다.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고스란히 담고 싶었다. 멀리 달문도 보이고 자일봉(2596m), 녹명봉(2603m), 백운봉(2691m), 청석봉(2662m)까지 한 눈에 들어왔다. 여섯 번 와서 오늘 처음 본다는 사람도 있었다. 행운이었다. 멀리 북한 쪽 장군봉(2750m)도 보이고 뒤로는 장백폭포의 물줄기가 하얀 용이 되어 꿈틀거리고, 원시림사이로 송화강 줄기가 보였다. 능선은 완만하게 원시림과 연결되어 있었고 좌측으로는 소천지도 숲위에 둥실 떠 있는 듯이 보였다. 초원의 푸른 풀이 끝없이 원시림과 이어졌고 융단을 깔아 놓은 듯하다. 이름모를 고산 꽃들이 만발하여 황홀경을 이루고, 서서히 완만하게 높아져 장애물 없이 탁트인 백두산은 가슴 속에 시원한 감동을 끊임없이 공급하고 있었다. 천지의 크기와 색감은 공포감과 경이로움까지 들어 야릇한 감정을 느꼈다. 민족의 산이라고 한 말이 실감났고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하나도 없다.

하늘에 있는 거룩한 못, 천지는 대택(大澤), 대지(大地), 용담(龍潭), 용왕담(龍王潭), 해안

(海眼), 온량박(溫凉泊), 달문지(澾門池) 등으로도 불리고 있다. 수치로는 둘레가 14.4km, 길이 4.64km, 너비 3.55km, 최대 깊이 384m, 평균 수심 213.3m, 수면 표고 219m로 세계에서 가장 깊은 산정호수로 여의도 만하다. 호수 색도 연초록색, 진초록색, 검푸른색, 검은색 등 물색선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 물은 달문(澾門)을 통해 송화강으로 흘러간다. 압록강과 두만강은 천지 물이 직접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따로 발원지가 있는데, 압록강은 장군봉에서 남서쪽으로 2.9km 떨어진 해발 2457m의 동남쪽 530m 지점에서 발원하고, 두만강은 기생화산

무두봉 북서쪽 기슭의 해발 1880m에서 첫 흐름이 시작된다고 한다. 대자연 속에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생각하고 삶의 의미를 생각하며 창조자의 위대함을 되새겨 보았다.

맑은 날씨가 행운을 주어 이토록 장엄한 천지를 보게 되니 다행이었다. 능선을 따라 하산을 했다. 푹신한 양탄자를 밟고 가듯이 상쾌한 기분이었다. 앞이 탁 트여 푸르름이 검은 지평선까지 뻗어갔다. 좌측으로 웅장하게 떨어지는 장백폭포가 낙차의 폭음을 토하며 우리를 반겨주고 있다. 줄기차게 떨어지는 폭포는 속세의 묵은 감정과 잡념 모두를 파괴라도 하듯이 용트림하고 있었다. 표현할 단어를 찾지 못했다. 직벽에 떨어져 협곡을 지나는 물줄기는 신비스러운 소리와 색, 모양을 하고 있었다. 물 거품은 저녁 햇살을 받아 계곡에 반사되어

은빛 찬란했고 영혼을 부르듯 심도 깊은 음향을 내며 흘러흘러 가고 있었다. 대자연에 취하고 감정에 취하며 허공에 부웅 떠 있는 듯한 기분을 한참동안 즐겼다.

백두산 온천수에 몸을 담구고 그 오묘함을 즐기려니 그동안 보낸 시간이 꿈속에서 보낸 듯 아쉽기만 하다. 창조적인 생각과 마음의 문을 열고 살자고 다짐하면서 백두산 천지의 물로 갈증을 달랜다. 온천수의 따스한 정을 동악가족 모두에게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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