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2-동악40년사

II. <<동대신문>>이 쓴 동악 40년
김환민

1958년 4월 29일(화요일)

뷘 대자연과 대결하게될 산악부를 創設乎 - 내(來) 30일 부원도 모집

본교에도 최초로 지난 8일 산악부가 창설되었다. 학생위원회 체육부 산하에 두게될 이 산악부는 그 창설 취지에서 등산은 체육부문중에서도 거대한 대자연을 정복하는 인간의지를 과시하는 것이라고 전제한 다음 불굴의정신력을 배양하며 나아가서는 투철한 인생관을 확립하는데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번 창설된 본교 산악부에서는 오는 30일 2교시가 종료된 뒤에 학생위 사무실에서 신입부원을 모집할 예정이라하는데 희망자의 많은 응모를 바라고있다. 한편 현재까지 가입한 부원명단은 다음과 같다.

△ 최영식(경4) △ 우종갑(경4) △ 이무진(경3)

△ 엄익찬(영3) △ 박병옥(경3) △ 안병석(경2).

1958년 7월 9일(수요일)

뷘 설악산 일대를 등반 - 산악반서 방학중에 실시

본교 산악반에서는 하기휴가를 이용하여 등반을 실시할 계획이 확정 되었다고한다. 그런데 이 등반은 오는 8월 10일부터 20일까지에 걸쳐 산악반장 최영식(경4)군을 비롯한 본교 산악반 전원이 태백산맥의 설악산 연봉 일대를 중심으로 도적소(盜賊沼) 일대의 답사와 대승령 및 대승폭 일대의 조사와 백담사 및 신흥사 등 사찰에 대한 유래 및 현황조사를 목적으로 8월 10일 서울을 출발하여 등정(登程)에 오르게 되리라 하는데 동 등반의 여정 코-스는 다음과같다.

◎ 서울 - 홍천 - 외가평 - 도적소 - 신흥사 -

속초 - 서울 ◎

1958년 7월 19일(토요일)

뷘 오는 4일에 설악산등반 - 전부총장,

정교수도 참가

기보=본교 산악반에서는 오는 8월 10일부터 10여일간에 걸쳐 실시 예정이던 설악산 일대의 등반일정을 변경하여 8월 4일 출발하게 되었다고 발표하였다.이러한 등반일정의 변경은 이번 등정에 동 산악반 고문인 본교 전 부총장을 비롯하여 정종 교수 및 임돈(교무과 직원)씨 등이 특별히 참가하게 된데 있는 것 같이 보인다. 내(來)월 4일 예정대로 행선지에 향발하게될 일행은 도합 10명이라 하는데 14일경 귀경하게 되리라 한다.

1958년 9월 초순경 (날짜 미상)

뷘 설악산 등반에 성공 - 방학 중 산악반서 실시

기보=본교 산악반의 설악산 등반계획은 예정대로 본 대학교 산악반 고문인 전기홍부총장, 정종교수 및 교무과 임돈씨 등이 특별히 참가한 가운데 실시되었다. 본교 학호단(學護團)의 후원을 얻어 지난 8월 4일부터 14일까지 10일간에 걸쳐 행해진 이 하기 설악산 훈련등반에는 합 12명의 인원이 참가 하였는데 이번 등반은 (1)도적소 일대의 답사 (2)대승령 및 대승폭포 일대의 답사 (3)봉정암 일대의 암벽등반 (4)백담사 및 신흥사 등 사찰에 대한 유래 및 조사 (5)적설기등반을 위한 제조건의 연구(천불사계곡) (6)외설악과 내설악에 대한 기상조사 및 행동중 규칙법 연구 (7)울산암 암벽등반을 위시한 것으로서 한국산악회를 비롯한 여러 대학산악부의 원정으로 기상상태, 암벽의 성질 및 고산식물의 분포는 소개되였으나 이번 미답상태이던 전기 제소(諸所)를 개척하여 후배의 활동로를 열어주는데 성과를 걷운것이다. 이번 하기 설악산 등반에 참가한 본교 산악반원의 명단과 부서는 다음과 같다.

대 장 : 최영식(경4)지휘,

대 원 : 배인환(경4)촬영, 최영달(경4)기록

권영시(정2)장비, 김종섭(정1)장비

김영근(경1)식량, 조영윤(정2)수송

정진영(경1)식량, 박병일(법1)수송.

1958년 11월 14일(금요일)

뷘 산악반 사진전 성대 - 설악산 등반 중 촬영작품 - 오늘 폐막

본 대학교 산악반 주최 하기설악산 등반기록 사진전시회는 지난 10일 오전 10시30분 전부총장이 테-프를 끊음으로서 막을 올렸다. 이 사진전은 지난 8월 10일부터 동 14일까지 10일간에 걸쳐 본교 등반대원 10여명이 설악산에서 촬영한 여러가지 사진으로 천불동을 비롯한 62점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초일부터 성황을 이루고있는 이 사진전시회는 14일에 막을 내릴 예정이다.

【사진=산악반 사진전시회장】

1959년 1월 8일(목요일)

뷘 적설기 설악산등반 - 기상조건 등 연구 5일부터 16일까지

산악부에서는 금 5일부터 오는 16일까지 12일간에 걸쳐 적설기 등반계획을 수립하고 최난인 설악산 천불동 【코-스】를 택하여 대원 5명을 편성하고 등정에 올랐다. 이 코-스는 이미 지난 하기에 등반을 마친 곳으로 이번 등반목적과 과제는 (1)천불동계곡 빙벽등반을 위한 제조건 연구 (2)외 설악산 및 내설악의 기상조건 연구 및 실태조사 (3)사진에 의한 보도 급 기록이며 행동개요를 보면 (1)도정 = 서울 - 속초 - 신흥사 (2)등반코-스 = 신흥사 - 천불동 - 대청봉(주봉) - 봉정암 - 오세암 - 조등령 - 신흥사 (3)귀로 = 신흥사 - 강릉 - 서울로 되어있다. 해발 1708미나 되는 태백산맥의 최고인 설악산은 수 3년간 한국산악회를 비롯한수 많은 산악단체의 원정으로 널리 알려진 굴지의 웅봉이거니와 이번 평소에 연마한 기술을 발휘하여 젊은 학도의 불굴의 기백과 면밀한 연구를 하게될 이번 본교 설악산 등반대원 명단은 다음과 같다.

대 장 : 최영식(경4)지휘, 운행.

대 원 : 임창우(생3)수송, 기상.

대 원 : 이종윤(정2)식량, 의무.

김종섭(정1)장비, 기록.

김경호(객원)기록, 기상.

1959년 2월 12일(목요일)

뷘 설악산 정복 본교 산악반

본 대학교 학생위원회에서 작년도 4월 30일 체육부 산하에 최초로 그 창설을 보게 된 산악부에서는 지난 1월 5일부터 17일에 걸친 13일간의 장기간의 등산실습을 하였다 한다. 그런데 동 산악반에서는 해발 1,784m나 되는 강원도 삼척에 위치하고 있는 거대한 설악산을 정복했다는 바 그 창립시의 취지를 충실히 이행하였다 한다.

그런데 동 산악반의 근본적인 목적은 대자연과 대결하여 인간의 투지를 과시하며 불굴의 정신을 배양하고 나아가서는 투철한 인생관을 확립하는데 있다고 하는 바 그 귀추가 자못 주목된다. 그리고 금번 설악산을 등산한 부원은 다음과 같다.

△ 최영식(경4) △ 김종섭(정1)

△ 김경호(정3) △ 유창서(경3)

1959년 5월 26일(화요일)

뷘 본교 산악부팀이 우승 - 한국산악회 주최, 등산경기대회서

한국산악회 주최 등산경기대회가 지난 17일(일요일) 시내 『자아문』밖에서 실시된 바 있는데 동대회에서 본교 산악부원이 우승을 하여 다른 『팀』들을 제압하였다. 그런데 동 대회는 3명이 1개의 『팀』을 구성하여 각자가 자기의 등에 2관의 모타를 메고 등산하는것으로 제한된 시간내에 기록을 내는 것이다. 여기에서 본 대학교 산악부원들은 A.B 『팀』을 결성하여 참가하였는데 B팀이 1위를, A팀이 2위를 획득하여 사계 전문가들을 놀라게 하였다. 한편 이날 참가한 선수명단은 다음과 같다.

△ A팀 - 이종윤(정3), 이상학(영4), 한영웅(경2)

△ B팀 - 최경근(생3), 권영시(정3), 김종섭(정2)

1959년 6월 5일(금요일)

뷘 본교 산악부 신기록 수립 - 9회 전국 등행경기대회서

한국산악회 주최 제9회 전국 등행경기대회는 한국일보사와 조선일보사 후원으로 개최되었는데 본교 산악부에서 1, 2위를 찾이하여 대학부의 신기록을 수립했다. 동 대회에는 전국대학 22개팀이 참가 하였는데 본교에서는 A, B 양팀이 참가하여 B팀은 1시간 47분 4초로 대학부에서 1위를 차지하여 신기록을 수립하였으며 A팀은 2위를 차지하여 작년도 우승기록보다 17분이나 단축하여 본교 산악부의 면모를 과시했다. 그런데 동 대회에 참가한 선수명단은 다음과 같다.

△ A팀=이종윤(정3), 이상학(영4), 한영웅(경3)

△ B팀=최경근(생3), 권영시(정3), 김종섭(정3)

1960년 8월 15일 (토요일)

뷘 지리산 연봉등반 - 산악부

본교 산악부에서는 학생자치회의 후원으로 지난 1일부터 11일까지 11일간 지리산 연봉일대와 가야산을 등반하였다. 정치과 4년 권영시군의 지휘로 서울을 떠난 동 등반대는 구례 화엄사에 이르는 동안 노고단, 반야봉, 벽소령, 세석평전, 천왕봉, 마천, 해인사 가야산에서 사찰에 대한 유래 및 조사, 적설기등반을 위한 제조건의 연구, 기상조사 및 행동중 규칙법 등을 연구하고 대구를 거쳐 지난 8월 11일 귀경하였다. 동 일행은 다음과 같다.

△ 대 장 : 권영시(정4),

△ 대 원 : 정진영(경3),

김영근(경3), 강정수(법3), 김홍선(임3),

한영근(법3), 김민수(정2), 이중웅(임1),

심현만(생1)

1960년 10월 22일 (토요일)

뷘 가을과 등산 - 이준형(농경1)

뷘 확고한 계획이 필요 - 휴식하기 위해선 유모아가 필요

이제 스포츠 씨즌을 맞이하여 여러 운동의 활동도 있겠으나 등산에 대하여 일반적인 것만 말해보겠다. 근래에 이르러 갑자기 등산열이 높아져 매년 춘추를 통하여 수많은 등산가들이 속출하는데 이에 반하여 매년 일어나는 사고는 여러 사람들의 가슴을 아연케 한다. 1957년 백운대에서 양정고등학생의 추락 즉사사건, 1958년의 연세대학생의 즉사사건 등의 예를 든다면 이들은 미숙한 기술로 남을 흉내내다가 이런 참사를 일으켰다. 그래서 올해도 어떠한 사고가 나지 않을까 염려되어 특히 가을철에 등산 가고자하는 본 대학생들을 위하여 상식적인 것만 말해 보기로한다. 먼저 본론에 들어가기전에 본 대학교 산악부 활동에 대해 간단히 말하겠다. 「동국대학교산악부」가 발족한 것은 1958년 4월 「전부총장님」, 「임돈」선생님 등 제교수님들을 고문으로 모시고 25명으로 조직되었다. 첫행사로 선배 최영식형이 리-더가 되어 한국산악회에서 주최하는 단체등행경기대회(3인조)에 출전하여 3위라는 호기록과 모범상을 그해에 받았다. 동년 하기방학을 이용해 전부총장님과 임돈선생님, 세계일주 도상에 한국에 머물게 된 스위스 사람 막스 융캐베르티씨 및 부원 다수가 설악산을 내설악을 거쳐 천불동으로 횡단했으며 동년 10월 산악장비 및 사진 전시회를 본교에서 개최하였다. 59년 1월 3일 역시 최영식형이 리더가 되어 설악산 제1봉 코-스인 천불동계곡을 거쳐 정상에 무사히 왕복한 적설기등반에 성공하였다. 동년 5월 단체등행경기에 두팀이 출전하여 당당 1위(1시간 42분 2초), 2위(1시간 42분 11초)라는 기록을 세워 본교 산악부활동을 과시했다. 그리고 하기방학때는 천불동계곡을 거쳐 내설악으로 설산 원정을 하였으며 동년 10월에 헐키 등산경기대회에 출전, 1960년 한국산악회 주최 단체등행경기에 출전 등 금년 하기 방학땐 지리산(智異山) 피비린내 나던 피아골을 거쳐 천왕봉을 무사히 등반하였으며 매주 서울 교외 산에서 본 대학 山岳部員들의 활동은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다. 이상 본 대학 山岳部 활동을 살펴봤다. 다음은 등산시 필요한 제조건을 논하겠다.

「계획」 먼저 등산을 하고저 할때는 확고부동한 계획을 세워 그것을 꼭 실천한다. 서울 교외의 산들은 대부분 높이가 비슷하며 어느산이고 절(寺)이 있다. 하루치기에 있어서 대개는 절에서 폐를 끼치는데 절에서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아래 몇가지 사항을 들어야겠다.

1. 대상을 선택하고 그 산에 등산로를 조사한다.

2. 일기상태를 미리 파악해야 하며 일기가 나쁠땐 중지하는것이 상책이다.

3. 인원에 충분한 식량을 보유해야 한다.

4. 해지기 전에 완전히 하산할 수 있도록 시간을 잡는다.

5. 갖추어야 할 장비는 (A)리크샥크를 인원수대로 대소형을 막론하고 갖추어야한다. 대개는 소형 리크샥크나 군배낭이 적당하다. 여행용 빽이나 냄비를 가지고 오는 사람들을 보는데 이것은 외관상이나 활동상으로 좋은것은 못된다. 그리고 (b)신발선택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군용 워카를 사용해도 좋으나 없을땐 농구화가 제일 적합하다. 그리고 깔창을 두껍게 깔면 바닥이 부르트지 않는다. 신사용 단화에 징을 박은것 같은것은 특히 위험하다. 그리고 발에 땀이나면 발바닥이 부르트므로 모직으로 되어있는 두터운 양말을 신는것이 좋으며 출발전에 양말속 밑바닥에 세수비누를 칠하고 발톱을 깍고 소금에다 알콜을타서 10분쯤 당구면 발이 부르트지 않는다. 복장은 간소하고 튼튼한 천으로 마련된 옷을 선택해야하며 출발전 찌저진 곳이 없나? 검토하고 특히 여자는 4척을 바지로 착의해야 한다.

「주의사항」 산을 흔히 유흥장으로 오인하고 과음하여 사고가 많이 나는데 특히 등산시엔 술은 금물이다. 그리고 바위와 나무에다 낙서를 하는것을 종종보는데 그것 역시 병을 깨트려 점리는것과 함께 썩 좋은것은 아니다. 식사장소는 청소할 것과 태울것은 나무에 점화 되지않게 하여도 좋고 묻어버려도 좋다. 절에서는 본 대학생들이면 눈여겨 보니까 예의는 잊어서는 않되며 정숙해야된다. 또 상면관계에 있어서는 모르는 경우라도 친히 인사를 나누며 하산하는 사람은 등산객에게 먼저 길을 비켜주어야 한다. 그리고 여성을 만났을 경우 남자가 길을 먼저 비켜주는것도 예의이다. 또 백운대나 도봉산을 오르자면 Rock Clinber들의 Rock Clinbing것을흔히 목격하는데 이들에게 소리나 박수를 보내면 큰 실례가 되며 그들이 하는 흉내를 써뿔리 내었다가는 10중 8, 9 사고가 나니 이점 유의하여야한다. 또 인원선정에 있어서 서로 유의해야 한다. 흔히 산에서 동반인들끼리 알력이 생겨 먼저 하산하든가 서로 코스를 달리 행동하는것을 많이 보는데 이것의 주원인을 소홀히 하였기 때문이다. 우선 대상되는 산을 무사히 등산할 수 있는 체질의 소유자라야 한다.

체질이 약한자가 등산도중 못 올라가면 전원이 난처한 입장에 처해진다. 그리고 마음놓고 유모어를할 수 있는 처지라야 한다. 미국의유명한 등산가 Charles.S.Houston 박사는 『등산대원 선정에 있어서 각자의 건강상태도 중요하지만 유모어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더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유모어를 몰이해하는 것이 알력의 첫째 요인이 되는것이다. 또 불필요한 물건을 소지 않는것이 좋다. 흔히 군용 단도나 등산용 아닌 로-푸를 가지고 다니는 것은 타인에게 좋은 인상은 주지 못한다. 이상 간단히 계획과 주의사항을 들쳐 보았는데 다음은 서울 근변에 위치한 산들의 등산로를 살펴보겠다.(계속)

1961년 5월 8일(월요일)

뷘 산악부 단체상 획득 - 본교 OB팀도 우승 - 제 11회 등행경기

한국산악회 주최로 지난 30일 열린 제 11회 단체등행대회에서 본교 산악부 B팀은 최우수 단체상을 획득하였고 졸업생팀인 OB팀은 일반부에서 1위를 차지하여 본교 산악부의 전통을 다시한번 과시하였다. 이번 등행대회에는 대학 19팀, 일반 5개팀, 고교 43개팀 등 도합 67개팀의 선수 200명이 참가하여 일대 열전을 전개하였던 것인데, 3명으로 구성된 한팀이 20 키로그람에 달하는 모래를 짊어지고 경복고를 출발하여 험악한 산비탈과 바위를 뛰어넘어 백운대를 정복했던 것이다.

20키로매타의 이 코스를 시종 달리었던 본교 선수들은 모범적인 기록을 수립하여 최고 우수상을 획득은 하였으나 대학부에서는 경희대 B팀에게 석패를 하였던것으로 이번 대회의 기록과 우승팀 및 본교선수 명단은 다음과 같다.

▶ 일반부

본교 OB팀(2시간 9분 39초)

▶ 대학부 1위

경희대 B팀(1시간 44분 17초)

▶ 최우수단체상

본교 B팀, 한양대 B팀

1963년 11월 22일(금요일)

뷘 마의 암벽 - 울산암 도전기 - 이구용

지난 10월 28일 서울을 떠난 산악부 설악산 등반대 6명은 뻐스편으로 속초를 거쳐 동일 저녁 秋色 짙은 설악산 등산의 입구 신흥사에 도착하여 「륙색」을 풀었다. 이미 낙엽도 다 버린 앙상한 가로수의 서울거리를 두고 떠났건만 위도가 높은 설악심곡은 이때가 제철인 양 단풍이 한창이었으나 석양녘의 천자만홍을 드린듯 진붉은 산정을 관상할 겨를도없이 내일의 행정을 준비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또르륵 - 똑똑 - 』새벽 선하는 법당의 몇탁소리에 곤한 잠을 깨어 밥을 짓는다, 점심준비를 한다하고 부산을 떤후 울산암을 향해 떠난것은 해가 반공에 올랐을 무렵이었다.

우리가 이제 도전하려고 하는 울산암은 신흥사 서북방 2키로미터 지점에 있는 표고 800미터의 바위산이다. 그 모양은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바윗덩이로 되어있어서 먼데서 한눈에 보면 시커멓고 울퉁불퉁한 자태가 흡사 괴물의 험상과도 같이 보이는데 여기에는 한가지 재미있는 전설도 전해오고 있다. 옛날 그 어느쩍에 금수강산에 금강산 2만 2천봉을 꾸미기위해 전국에 기암기봉들에게 소집령이 내려서 온통 전국의 바위들은 금강산으로 모여들었는데 그때에 울산암은 울산(지금 경남)에 있어서 금강산에 가기위해 북상하는 도중 설악산 쯤 왔을때 1만 2천봉이 모두 들어찼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 그자리에 그냥 주저앉아 버린것이 지금의 울산암(일명 울산암)이라는 것이다. 일컬어 1만 2천 1번째 봉(?)이라고나 할까. 이상과 같은 울산암에 록크라이밍을 시도한 것이 이번 등반의 목적의 하나였다. 여기에 대한 만반의 준비는 갖추어졌다. 40미터 「자일」하나에 보조 「자일」30미터, 함마 두개, 「하켄」20개, 「카라비나」3개 등.울산암의 전면 능선에도착한 우리는 곧 망원경으로 「코스」를 세밀히 관찰한다. 『있다 그것은 거기에 있었다』. 그것은 선구자 「말로리」가 향하던 고극 「에베레스트」로 오르는 길도 아니건만 마의 암봉 울산암으로 오르는 한줄기의 「크랙」(바위가 갈라진 틈)은 분명히 거기에 있었다. 그렇다. 저것이 우리의 「코스」다. 우리는 곧장 그리로 달려가 괴물의 입모양 떡 벌려져있는 암벽 전면의 「침니」 (바위와 바위사이의 터진 틈)를 오르기 시작했다. 바위질은 단단한 화강암이다. 「홀드」가 없어서 손잡을 곳이 마땅치 않는것이 난점이었다. 그런대로 제1피치의 30미터 「침니」 코스는 끝냈다. 제 2피치의 40미터 반「침니」도 .오르면서 보니 멀리 구름에 싸인 설악주봉 대청봉이며 그로부터 좌우로 민듯이 흘러내린 설악 연봉의 능선과 천불동의 삐죽삐죽한 칼날같은 암봉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있어 한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제 4 「피치」에 당도한 우리는 여기서 오도가도 못할 궁경에 부닥쳤다. 「앙카」줄을 단단히 묶은「톱」(선등자)이 길이 35미터 쯤 되는 「크랙」의 30미터까지는 무난히 올라갈 수가 있었으나 나머지 5미터 가량은 90도 경사의 난 「코스」인데다 손잡을 데가 없어서 아주 난색이었다. 「하켄」을 두드려 박자니 쇠도 바위를 못당하여 꾸부러지기만 한다. 그런데다가 설상가상으로 예기치도 않은 안개가 동쪽으로부터 몰려오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우리가 선 울산암을 감싸버렸다. 안개속에 행동은 더욱 부자연스럽기만 하다. 그런데 그 망할놈의 까마귀는 아까부터 건너편 봉우리에서 왜 그리 짖어대는지……. 할수없이 행동을 중지하고 주저 앉았노라니 습한 공기에 한기가 온몸에 스며들어 싸늘해진다. 불안과 공포가 자꾸만 주위를 압축시켜온다. 이 짧은 시간이 왜 이리도 지루한지. 어서 이 마의 암벽을 벗어나야 할텐데. 『사느냐? 죽느냐?』의 생의 문제를, 아니 생에의 강렬한 애착을 이 순간처럼 절실히 느껴본적이 없었다. 그러나 다음순간 우리는 다시한번 필사의 노력을 다하여 전진을 기도했다. 그런 즉 어디서 초인간적인 힘이 나오게 되었는지 난공불락으로밖에 생각 안되던 그 직벽을 우리는 차례로 오르고 만것이었다. 이리하여 정상에 오른때가 오후 4시 40분 - 실로 6시간만에 200미터의 암벽을 오르기에 성공한 것이다.

이튿날 아침 신흥사를 출발하여 천불동계곡에서 2박한 일행은 11월 1일 눈발 날리는 가운데 해발 1,708미터의 대청봉 정상에 올랐다가 11월 3일 귀경했다.(영문과)

1964년 3월 27일(금요일)

뷘 해외로 뻗는 산악전통 - 북알프스 - 일본 최고의 험산 - 「히말라야」 정복위한 수련계획으로

뷘 『정상에 태극기 꽂고 오겠다』최대장 談

『어진자는 산을 좋아한다』(仁者樂山)는 옛 성인의 말씀이 있다. 풍설 휘몰아치는 「히말라야」의 고극을 오르다 오르다 끝내는 필생의 신념과 정열을 거기에 함께 파묻어 버린 등산가 「말로리」는 『그것이 거기있기 때문에 오를 뿐』이라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험준한 산봉을 향하여 한발, 한발, 발걸음을 옮겨놓는 등산가에게 산은 거대한 대자연의 신비로서 미소하며 우리에게 인내와 노력, 자비와 겸손을, 그보다 더 귀중한 「휴매니티」의 완벽을 불어 넣어주는것이다. 무릇 산에 오르는 이는 산의 깨끗한 정기를 호흡하며 그안에서 인생의 예지를 배우고 「삶」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으며 거치른 인생항로의 올바른 지침이 되기에 끊임없는 열망과 낭만을 거기에서 추구하는 것이리라. 오는 4월 5일 산악부원 6명은 산악동대의 명예를걸고 일본 북「알프스」(3000m급) 연봉의 정복에 나선다. 등반대는 약 1개월간 일본에 머물면서 소기의 사명을 다하게 될것이다. 다음 산악부의 연혁과 대장 최영식씨 담(談), 북「알프스」의 면모를 더듬어 본다.

【사진은 일본 북「알프스」의 穗高연봉.】

… 국내 험산 모두 정복 …

본교 산악부는 1956년에 창설되어 그동안 대학 산악계에 굴지의 명문으로 한국산악운동의 발전에 공헌을 해왔다. 창설이래 4회의 한라산등반, 5회의 지리산등반, 9회의 설악산등반 등 국내 유수의 고산을 등반하여 적설기 또는 하기의 등산기술을 습득, 연마해 왔다. 한국산악회 주최의 등행대회에서도 매년 우승 또는 입상을 하여 명실공히 산악동대의 전통을 이어왔다. 지난해 11월에는 대한산악연맹 주최의 제2회 학생특수체육등산대회에서 장비상, 실적상, 운행상 등 3개 부분의 상배를 획득한 바 있다. 이번 일본 원정등반을 위해서 작년 8월에는 한라산을, 그리고 11월에는 설악산의 천불동과 울산암을 등반한 바 있으며 지금도 원정의 마지막을 대비해 서울 근교의 산악에서 맹훈련 중에 있다. 이번 본교산악부의 『한일친선 교호등반』은 일본 福岡市에 본부를 둔 「알파인·클럽」의 주선으로 실현케 될 것이다. 그런데 일본 북「알프스」의 원정계획은 산악인의 숙원이 되는 「히말라야」정복을 위한 훈련중의 하나이다.

… 북「알프스」는 최고기술 필요 …

일본 북「알프스」는 일본 본주의 長野현에 있는 산악지대로 평균 3,000m급의 봉우리만 10개 이상을 포함하고 있어 일본에서도 최고의 등산기술을 요하는 산맥이다. 이곳에서 동기에 적설등반을 연마한 자는 「히말라야」에서도 훌륭히 활동할 수 있다는 것을 일본 등반대가 「히말라야>의 「마나슬루」 등정에 성공함으로써 입증한 바 있다. 북「알프스」의 동기등반은 곤란과 위험이 항상 존재한다. 여름에는 간단히 올라갈 수 있는곳도 있으나 겨울에는 눈이많아 고도의 빙설 등반기술과 「스키」술, 설중 노영기술과 함께 눈사태에 대한 지식이 겸비된 종합적인 등산기술을 필요로한다.

… 닦아온 기술로 최선 다할터 …

대장 최영식씨 談=우리는 아직까지 국내의 설악, 한라, 지리산 등지에서 동기등반을 해왔다. 이번에 일본 북「알프스」를 오름으로써 기후와 지형조건이 다른 외국의 산에서 그간 쌓아온 경험과 기술을 처음으로 시련해 보게 된 것이다. 이번에 우리가 가게 될 일본의 북「알프스」는 일본에서도 가장 험준한 산으로서 등산인들의 조난사고가 빈번한 곳이며 일본의 「히말라야」 원정대들이 훈련도장으로 등반을 해온 산이다. 이 기회에 일인들이 「히말라야」 등반에 사용한 제반 등반장비를 연구하여 앞으로 「히말라야」 원정에 앞서 준비에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리라 생각한다. 평소에 우리가 연마해 온 기술과 경험을 살려 최선을 다할 각오이며 북「알프스」 정상에 태극기와 동대 산악부기를 꽂아놓고 돌아오겠다.

컷 = 북<알프스> 약도. → 표는 등반「코스」

- 히말라야의 시인 -

■ 듀부라 ■

만약에 내가 그 어느날

산에서 산에서 쓰러져 눈감을 때,

오랜 산동무인 너에게

이 같은 쪽지를 남기는 것은.

우리 어머님 만나러 찾아가 달라.

그리고 이렇게 전하여 다오.

난 참으로

행복하게 죽었노라고.

언제나 내곁을

어머님 손길이 지켜 주셨기에

조금도 괴롭게는 죽지 않았노라고.

아버지께도

난 사나이였노라고 여쭈어달라.

아우에게는

자! 너에게 바톤을 넘겨준다고.

아내에게 말하여 달라.

내가 없대도 살아 가라고.

네곁을 떠나서, 내가 살아 왔듯이라고.

귀여운 내어린 것들에게도

이 말을 전해 주려마.

너희들 모두가

「애단손」 험한 바위골에서

내 피묻은 손톱자욱, 볼수있을거라고.

그리고 나의 벗

너에겐 이렇다.

나의 픽켈을 가져가 달라.

픽켈이 치욕으로

죽는 일을,

난 쑥스럽게 원하지 않는다.

어디든 아름다운 「훼이스」로

네가 들고 가달라.

작은 하나의 「케른」을 만들어

그 위에다

그 위에다 꽂아 주려마.

- <주 : 듀부라는 불란서의 시인이며 등산가> -

1964년 5월 8일(금요일)

뷘 한국 산악사상 최초로 일본원정 - 3일, 본교 등반대 6명 출발

뷘 북 알프스 정복 기약=3천M 급의 富士산, 穗高岳 등 1개월에 걸쳐=『알파인·크럽』 초청받아【부산에서 본사 이구용 특파원 기(記)】

본교 산악부 일본 북「알프스」 등반원정대 일행 6명은 3일 하오 5시 「아리랑」호 선편으로 부산을 출발, 약 한달동안 일본 북「알프스」를 비롯한 고산등반의 장도에 올랐다. 민완식(34)교수가 인솔하는 일행은 대장 최영식(33=대한여행사사원, 한국산악회 등반위원,동대 OB) 동문을 비롯한 대원 이중웅(24=동대 OB), 임신철(23=임4), 유지영(23=철4), 이규복(21=농경2) 군 등 6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국 산악사상 초유의 거보를 내딛은 이번 「한일친선 교호등반」 일본 원정은 일본 福岡市에 본부를 둔 「알파인·크럽」(대표=美濃井芳夫)의 초청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일행은 4일 일본 小倉항을 경유하여 열차편으로 福岡에 도착하면 그곳 「알파인·크럽」 산장회원 4명과 함께 5월 9일 일본 최고의 富士山(3,776M)을 등정, 1박한 뒤 다시 열차편으로 북「알프스」의 입구인 松本에 도착하여 上高地에 올라 5월 13일 壑澤에 「베이스·캠프」(전진기지)를 설치하면 1주일 간의 본격적인 정상공격에 들어가게 된다. 이들은 奧穗高岳(3,190M)을 비롯하여 前穗高岳(3,090M), 壑澤岳(3,103M), 槍岳을 극지법 등반방식에 의해 오를 것인데 최고봉인 奧穗高岳에는 5월 15일경 등정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한·일간의 산악기술 교류와 상호 유대강화에 획기적인 계기를 이루게 될 이번 등반원정은 상호교환 등반의 조건아래 일본까지의 교통비와 등산장비, 지리 안내 등 제반편의는 초청자측에서 부담키로 되어있는데 오는 7월 하순에는 동수의 전기 일본산악회원을 본교에서 초청하여 설악산(1,708M), 한라산(1,950M) 등 국내 1급의 고산 등반을 등반하게 될 것이다. 한편 이들의 귀국은 5월 하순경이 될 것인데 3일 부산항을 출발하기에 앞서 인솔자 민완식교수는 다음과 같이 출국소감을 말했다.

인솔자 민완식교수 담=먼저 이번 우리가 도일하기까지 많은 협조와 격려를 해 준 동창회, 재학생 여러분 및 산악계 선배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며 계속 많은 성원을 보내주길 바란다. 학교의 명예와 국가의 긍지를 걸고 등반에 임해 우리의 맡은 바 임무를 끝까지 성공적으로 수행할 각오이며 이 기회가 한일간의 이해증진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된다면 다행으로 생각하겠다. 아무쪼록 여러분의 아낌없는 성원과 편달을 바란다.

원정대 결단식 - 1일 학생처장실서

산악부 일본 북「알프스」 등반원정대 결단식이 1일 오전 10시 학생처장실서 원정대를 대표한 대장 최영식 동문은 대원선서를 낭독했으며 총장을 대리한 이희균학생처장은 대원들에게 『학교의 명예와 전통을 빛내고 돌아오라』는 요지의 격려사를 했다.

친지 등 환송객 - 서울역에 백여명

2일 하오 3시 일본원정대가 서울을 출발하기에 앞서 서울역에는 학교직원 및 동창회, 총학생회,산악부 등 학교관계 환송객과 원정대원의 가족, 친지 등 백여명이 전송을 나와 이들의 장도를 축복해 주었다. 한편 산악부 부장 박번웅(임3)군과 본사 이구용특파기자도 동도 통일호 특급열차편으로 이들과 함께 하부했다.

「성공을 비오」 - 경북산악회서도

원정대가 탄 기차가 대구역에 도착하자 경북산악회에서 환송나온 동회 회원들은 깃발을 들고「홈」에 마중나와 일일히 대원들을 악수로서 환영해 주었다. 그리고 이들은 사과 한상자를 증정해주며 『성공을 빈다』고 따뜻한 격려로 사기를 북돋았다. 한편 부산에 도착한 일행은 이튿날 한국산악회 경남지부장 신업재(대한스키협회장)씨가 베푼 오찬에 참석했는데 신씨는 부두에 까지 나와 전송해주며 최후의 격려를 잊지 않았다.

【사진=좌로부터 아리랑호에 오르는 이중웅, 이규복, 임신철, 최영식, 민완식, 유지영대원】

1964년 7월 10일(금요일)

뷘 일본의 산악활동 - 본교 등반대 민완식 교수 담

뷘 산악크럽 무려 3천여 - 말끝마다 한국과의 교류 내세워

뷘 엄격한 군대식 훈련을 - 우리 원정대를 대대적으로 선전

◈ 본교 산악부의 「일본 북알프스 등반원정대」를 인솔했던 민완식교수와 일행 5명은 25일 동안의 일본 행정을 마치고 지난 5월 27일 무사히 귀국했다. 해방후 처음인 이번 본교 산악부의 일본원정은 학생단체의 해외원정이었던 만큼 자못 그 의의가 크다. 다음은 일본의 이모저모와 산악활동을 돌아보고 온 민교수의 소감을 간추린 것이다.

◈ 『일본에 가서 보고 무엇보다 부러웠던 것은 일자리보다 사람이 부족한 것이더군요.』 20년만에 일본에 다시 가 보았다는 민교수는 해방전보다는 엄청난 발전상을 보고 놀랐다면서 『그들이 패전후 고생도 많았겠으나 오늘같은 경제부흥을 이루기까지는 눈물나는 노력이 숨어있지 않았느냐』고 반문했다.

◈ 본교 등반대가 처음 일본에 닿자 그곳 산악회에서는 우리 일행을 크게 환대해 주었다. 방송국, 신문사, 산악회, 체육회를 쫓아다니며 한일간의 산악교류는 처음이라고 대대적으로 선전해 주었다. 그리고 “지금 일본에서도 우리나라의 산에 오고 싶어하며, 이번 우리의 도일을 계기로 앞으로 자주 교류를 갖자”고 한일친선을 말끝마다 강조하더라고. 세대가 바뀌어가는 일본. 웬만한 전장엔 대개 30대가 과장급자리에 앉아있다고 한다. 그리고 학생들은 정치에 대해선 우리나라 학생과는 달리 별로 관심이 없는것도 특색. 우리도 빨리 시국이 안정되어 학생들이 학구에만 전념 할 분위기가 마련돼야 할것이라고 아쉬워한다.

◈ 『일본의 산악활동은 한마디로 말해서 일대 붐이더군요. 휴일에는 기차정거장마다 륙색을 짊어진 젊은이들로 붐비고 극단적인 예로는 우리가 갔던(일본에서 제일높은) 북알프스에까지도 여자들만의 등산크럽이 오는걸 봤으니까요.』 또 직장마다 연중휴가를 얻어서 산엘 오르는 일반인들이 많은데 학생 등산크럽 못지않게 일반 등산크럽이 많으며 국내에 무려 3천여 산악크럽이 있다 한다. 그런데 일반등반대보다 대학산악부가 우수한 것은 단체등산시 무서운 훈련을 하고 있기때문이라 한다. 대학에 있어 산악부는 다른 어떤 체육부보다도 엄한 규율과 군대식의 훈련으로 기량을 쌓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와같은 철두철미한 훈련이 그들로 하여금 수차례의 「히말라야」 등반에 원동력이 되었을거라고 하면서 이런 점은 우리가 본받을만한 점이라고 민교수는 지적했다.

◈ 지금도 북알프스 계곡에선 「스키」를 타고 있었는데 대개 6월 중순까지는 「스키」를 즐길 수 있다고.

역시 산이 높으니까 기상조건이 다르고 밤에는 기온이 영하 5도까지 내려 가더라는 것. 이번 원정중에 곤란했던 점은 장비의 미비에도 있었으나 그보다도 식사에있어 달고 싱거운것 뿐이라 매운것을 먹는 우리 식성에 많은 고충을 받았다면서 더구나 체력이 많이 소모되는 산중행동에도 지장이 없지 않았다고.

◈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는 『우선 오는 12월에 일본등반대를 초청해서 한라산과 설악산 등을 오를것이며 내년 봄쯤 우리학교에서 다시 일본에 갈 수 있도록 해볼 생각』이라고 했다. 그런데 일인들에게는 한라산이 많이 알려져 있어 한라산에 오르고 싶어하는 산악인들이 많으며 북한에 있는 백두산이나 금강산엔 아예 갈 생각도 안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북한에서 일인들을 받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민교수 일행이 만난 일본 산악인들은 이구동성으로 국가를 떠난 사적인 친선을 가지고 싶어하더라고. <구>

1964년 7월 10일(금요일)

뷘 산악 에세이 - 산악인의 자세 - 박번웅

산령을 걷는 가벼운 차림의 하이커들로 주말이면 백운대 도봉산을 비롯한 서울 근교의 산을 메운다. 친지 혹은 다정한 벗들과 삼삼오오 짝을지어 푸른창공이 맞닿는 신록의 산령을 찾는다는 것은 의의있는 일이며 또 이렇게 「하이킹 붐」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은 퍽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럼 산에 오른다는 것이 다른 일반 스포츠와 다른 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자연과의 엄숙한 대결이라는데 있다. 팀웍을 구성하고 등반계획을 세우는 데는 다른 일반 스포츠와 다른바 없지만 그 상대가 인간이 아닌 산과 자연조건이라는데 그 특이성을 띄고있다.

자연은 잠시도 쉬지않고 변화하는 일종의 극한상황 지대인것이다. 하늘이 개이고 새가 지저귀는 산인가 하면 비바람 몰아치고 눈보라가 앞을 막는 변화무쌍한 산인 것이다. 자연과의 대결에서 인간은 깨알만도 못한 존재이지만 그 미미한 깨알은 불굴의 의지와 인내와 지혜로서 산이 있는 곳이라면 어느 극한상황 아래서라도 그 발길을 딛고야 마는 의지적인 존재인 것이다.

「알피니스트」는 변화무쌍한 대자연의 품속에서 한결같은 굳건한 기상과 불굴의 의지, 그리고 끈덕진 인내를 단련시키는 것이다. 또 극한상황하에서 솔직과 담백, 결단성을 배우는것이다. 무쇠라도 녹일듯한 뜨거운 태양아래 살을 에이는 듯한 눈보라치는 겨울날, 가을의 낙엽이 쌓인 산령을 걷는 젊음의 캬라반 - 그것은 젊은만이 누릴 수 있는 최대의 낭만이며 인간이 땅과의 접촉에서 얻는 가장 원시적이며 기본적인 쾌감을 만끽하는 행위인 것이다. 또 자일 하나에 몸을 의지하고 암벽에 도전할때 그들은 세상에 어느 연인들보다 더 깊고 굳건한 동지애로서 완전히 하나로 결합되는 것이다. 자일에 통하는 완전무결한 각개체의 결합! 그것은 공동운명의 극한상황 지대에서만 있을 수 있는 인간애의 극치인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산과 산우에 대하여 각별한 매력과 친밀을 느끼는 것이다. 산은 변화많은 사랑을 알피니스트에게 아낌없이 베푼다. 춘추계의 산은 어머니의 자애스러운 사랑을, 하계의 짙은 녹음과 뜨거운 입김은 애인의 뜨거운 사랑을 또 하계의 비바람과 동계의 눈보라치는 북풍은 아버지의 사랑스런 꾸지람같이 느껴진다. 산이란 어휘가 문법상에서 남성격인지 여성격인지는 모르나 산이 우리에게 주는 감각은 적어도 여성의 보드라운 촉감을 느끼게 하는것이다. 서울 근교의 백운대 도봉산은 서울여자처럼 세련되어있고 그위에 소요산은 경기미인으로 꼽아도 손색없이 산의 몸집은 적어도 아름다운 이메지를 우리에게 가져다 준다. 설악산은 강원도 산골처녀답게 건장하고 야성적이다. 또 남쪽으로 충북의 속리산을 보면 충청도 양반집 규수처럼 얌전하고 정숙한 느낌을 주며 지리산은 무뚝뚝한 경상도 기질의 여인으로 생각들며 제주도 한라산은 한국서 백두산 다음가는 제2봉이며 10월말에서 이듬해 4월까지 머리에 백설을 이고 있는 수려한 자태의 남방미인을 연상케한다. 이 아름다운 남방미인 한라산에서 겪은 고생담! 하계등반시 무서운 안개속에 오백나한으로의 방향을 잃어 무척 괴롭던 일. 오백나한이란 정상 백록담에서 서남쪽으로 내려오면 흡사 라한을 방불케하는 500여 개의 바위가 줄지어 있는것을 말한다. 또 정상캠프에서 풍속 30마일 이상의 비바람에 시달리던 밤, 설악산의 동계등반시의 몸서리치는 추위속의 카라반, 또 하계 설악종주등반 시도차 대승령쪽을 걷다 물이 없어 펀초에 이슬을 받아먹고 나중엔 활명수까지 마시던 일! 그러다가 물을 찾아 배낭을 멘채 뛰어들어 한없이 물을 마시고 맹꽁이 배처럼 되어 움직이지도 못하고 대원들이 주저앉아 서로 만족한 웃음을 웃던 일,이러한 고난의 지나간 일들이 지금 나를 더욱 산으로 유혹하는 모르핀이 될 줄은 나도 몰랐다. 그 고난의 순간에 다시는 등반을 않하겠다던 마음은 사막에 뿌려진 한컵의 물처럼 잦아들어 버렸다. 산은 어느 애산가 교수님의 말씀대로 나쁘게 표현한다면 아편과도 같은 매력을 지녔다. 그것은 세계 등반사에 빛나는 알피니스트들이 「산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간다」라는 어찌보면 극히 단순한 그것에 몸을 바쳤던 것이 증명하고도 남는다. 산은 희비의 양끝을 달린다. 이러한 고난의 등반인가하면 하루의 카라반이 끝난 후 캠프를 설정하고 시장한 가운데 대원들이 모여드는 식사는 얼마나 즐거운 식사인지 또 캠프 「화이어」에 둘러앉아 낙엽지는 가을에 자연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자연교향곡을 들으며 마시는 한잔의 커피맛, 거기에 곁들인 젊은이들의 활기찬 대화와 웃음! X-마스와 신년을 눈에 덮인 산에서 맞으며 즐기는 검소한 파티, 비바람 몰아치고 「눈보라가 설안경의 앞을 가리는 겨울등반」 정상에 퀘돈(초등반자의 기념비)을 쌓고 모든 고난의 결실을 보는순간의 하늘에 닿는 기쁨을 어찌다 표현하랴. 현재 우리나라의 산악열은 매년 높아져 일대 붐을 이르키고 있지만 여기에 반드시 병행되어야 할것은 하이커들의 질인 것이다. 서울 근교에는 질과양적으로 좋은 하이킹 코스가 많다. 이것은 전국을 둘러봐도 으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방 후 일인들이 물러갈때 일본 산악인들이 서울 근교의 하이킹 코스가 아깝다는 일화를 남길 정도로 우리 서울 근교의 하이킹 코스는 근거리에 있으며 산수도 수려하다. 참고로 인방인 일본은 록크라이밍을 하자면 2박 3일의 원거리에 있으며 그것도 산의 바위질이 좋지 못해 잘 부스러지는 바위이기 때문에 헬메트를 쓰고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지형적으로 다산국이기 때문이겠지만 우리는 자연의 혜택을 축복받은 나라인 것이다. 하이킹에도 몇가지 지켜야할 산에 대한 예의가 있는 것이다. 산중 행동은 곧 우리의 작은 사회생활인 것이기 때문이다. 주말에 산을 찾아 복잡한 매카니즘에 누적된 가슴을 펴는 것은 좋은데 과음을 하고 키타를 메고 트위스트를 추고 또 선남선녀가 갖가지 오두방정을 떠는데는 이해도 가지만 산을 사랑하는 애산가의 마음을 흐려놓는다. 산은 유흥장소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깊은 사려도 할 수 있고 또 자연에게서 무언의 지혜를 배우는 인간 수양장인 것이다. 금번 귀교한 일본 원정등반 대원들이 일본 북알프스 등반에서 가장 감명깊이 느낀 점은 등반자 상호간의 친밀한 인사였다고 한다. 근교 하이킹에서 느끼는 바이지만 이쪽에서 『수고 하십니다』라고 인사를 하면 상대방에서는 오히려 상한 눈으로 보며 피하는 느낌까지 준다. 눈을 떠도 코베어 간다는 각박한 인정에서 오히려 그런 인사를 받는 편이 이상하게 느끼는 사회의 삭막한 인정이 슬프다. 그때 『네 수고 많습니다』라고 밑천 안드는 미소라도 던져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또 바쁜 일정의 팀에게 길을 양보하는 미덕도 잊지 말것이다. 우리는 앞으로 엄숙한 산에서 좀더 겸손하는 태도를 그리고 무언의 교훈과 지혜를 배울 수 있는 지성의 발로의 기치를 높이 들어야겠다.

(임3, 산악부장)

1964년 9월 18일(금요일)

뷘 정점을 향한 젊음의 고동 - 가을을 사는 알피니스트

하늘이 높은 계절-구름 한점 없는 「코발트」 빛 원색아래 여기 약동하는 젊음이 가을에 산다.

험준한 암벽에 도전하는 「알피니스트」-그의 가슴은 정복의 의욕에 벅차 오른다. 철쭉이 만발하는 봄날의 산마루도 좋다. 벽계수 분류하는 계곡의 성하도 좋았다. 그보다 하늘이 높은 초추의 산령은 차라리 티없는 유리알 속을 보는것 같아 마음껏 자연을 향유할 수 있었다. 세파의 진애일랑 아예 초극한양 대자연의 품안에 마음을 던져버린 채 한줄기 검어쥔 「자일」 끝에는 정점을 향한 강렬한 맥박이 고동친다. 가자 하늘끝 맞닿는 저 산정까지! 그곳은 음이 쉬는곳. 정상을 향하여 젊음의 의기는 치솟는다.

【사진=백운대 인수봉에서, 산악부 제공】

1964년 11월 6일(금요일)

뷘 산은 무모한 모험을 싫어한다 - 조난자 4명 구조

뷘 산악부원들이 - 구조작업에 성공

◈ 지난 1일 주말 등반에 나갔던 본교 산악부원 14명은 도봉산 선인봉에 오르던 성남고교생 4명이 장비와 경험부족으로 조난하고 있는것을 발견, 경찰과 산악회에 연락하는 한편 본교교 직원과 산악부원 8명 등 도합 22명이 구조작업에 나선끝에 2일 낮 2시반 조난학생 4명 전원을 무사히 구조하는데 성공하였다.…

본교 박번웅(임3, 산악부장)군 등 산악부원 14명은 지난 1일(일) 오전 9시에 돈암동을 출발 예정대로 이날 오후 2시 전기 선인봉 전면 2코스와 3코스를 각각 등반했는데 2코스에 오르던 임신철(임 4)군 등 4명은 2코스 중간지점에서 오도가도 못하고 있는 성남고교생 4명을 발견 이들을 도와 정상을 향해 올랐다. 그러나 이날 하오 7시경 고교생들을 끌어 올리기에 시간이 늦어진 본교 부원들은 더이상 올라가지 못하겠다고 지친, 고교생들을 4핏치 박쥐 끝 안전지대에 옮겨논 후 동일 밤 8시반에 선인봉하 천축사에 돌아와서 앞서 3코스를 올랐던 부원들과 합류했다. 날이 어두워 조난학생 구출을 포기한 이들은 경찰과 산악회에 이 사실을 연락하는 한편 선인봉과 마주보는 언덕에 모닥불을 피워 바위중간에 있는 전기 조난학생들과 계속 신호를 교환하면서 날이 새기를 기다렸다.

2일 아침 날이 새자 4명의 부원이 조난학생 구출에 나서는 한편 이날 아침 10시경 연락을 받은 본교 산악부원 6명과 임돈(제2 교무과장), 라언표(학생과 직원) 선생의 지휘아래 학교버스로 급거 도봉산에 출동, 12시에 조난현장에 도착하여 구조작업에 함께 나섰다. 오후 2시반 조난학생 4명을 전원 무사히 구출하여 안전지대에 까지 하산시킨 후 본교 구조대 일행은 귀교했다. 한편 이날 고교생의 조난이 본교 부원의 조난으로 와전되어 본교 산악부원들과 함께 현장에 달려가서 고교생들의 구조에 애썼던 본교 산악부 OB 유창서(한국산악회 안전대책위원) 동문과 김진수동문은 이번 고교생 조난을 『장비와 경험이 부족한데서 온 무모한 모험심에서 온 것』이라고 말했다.

- 안전대책반을 산악부서 구성 -

최근 서울 근교산악에서 자주 일어나는 등산 조난사고에 대비하여 본교 산악부에서는 안전대책반을 구성했다. 산악부원 10명으로 구성된 안전대책반의 연락처는 본교 체육진흥관리위원회(전화3 - 3131, 구내251)이며 임신철(임4, 전화72 - 9991)군을 반장으로 하고 있는데 명단은 다음과 같다.

△ 임신철(임4), 김충배(법4),

이구용(영3), 손수남(임3),

강성윤(행정2), 김규진(사2),

김형록(임2), 고수명(임2),

노세성(행정1), 유부열(농1).

【사진=구조작업 중의 산악부원들】

1965년 5월 7일(금요일)

뷘 설악산 등반대 출발 - 일, 산장회원 5명 來校

속보=본교 산악부의 초청을 받은 설악산 원정등반대 일본 알파인크럽 산장 회원 일행 5명이 예정대로 지난 1일 오후 2시 부산을 경유 통일호편으로 서울역에 도착했다. 본교 산악부원의 환영을 받으며 풀랫홈에 내린 일행은 서울역앞에서 출영나간 본교 산악부 회원과의 기념촬영을 마친 후 본교 뻐스로 남산일대와 팔각정을 돌아 오후 4시 중구 회현동 「우양여관」에 여장을 풀었다. 대원중의 田中博군은 내한소감을 “다만 많은 환영을 베풀어 주어 감사하다”고 전했다.

한국에 도착한 이틀 후인 3일 오전 10시 알파인크럽 대원 일동은 본교를 방문 조명기총장을 예방하였다. 알파인크럽 한국 설악산 원정대 대장 美濃井奔夫씨는 그들 일행을 환영하는 조총장 환영사에 답하여 『김중배군의 죽음에 대해 심심한 애도의 뜻을 표한다』고 말하고 『동대의 초청으로 양국간의 산악인 교류가 이루어진 것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그들은 예정대로 4일 본교 산악부원들과 함께 설악산을 향해 떠났다.

【사진=조총장을 예방한 일본 산장회원들】

1966년 2월 4일 (금요일)

뷘 빙점하의 영봉을 가다 - 정상에의 도전

뷘 한라산 등반기 - □강성윤

정종교수와 부원 6명으로 구성된 본교 산악부의 적설기 한라산 등반은 오랜동안의 최종 검토를 완전히 마치고 학교의 임돈선생님 외 산악계 인사의 전송을 받으며 서울을 떠난 것은 지난 1월 8일(21시)였다. 이번 등반의 루우트는 지난해 7월 하기 등반시 세밀한 검토를 한 바 있으며 등반 방식은 제주시에서 서귀포로 향하는 종주등반법을 택하였다. 겨울산의 등반에 있어서 결정적인 요소는 첫째는 기상인 것이다. 한라산은 폭풍설과 가스를 돌파하여야하는 등 급격한 기상의 변화가 심하며 더욱이 눈은 대륙지방의 눈질과는 달리 습설인 까닭에 더욱 주의를 기울어야하며 과히 흔하지는 않으나 국부적인 눈사태에도 대비하여야 한다. 우리가 제주시에 도착하였을때는 (10일 3시) 겨울날씨에 어울리지 않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산중 1일(1월 10일)의 일정은 제주시에서 관음사까지 였으며 캠프(C)1에 도착은 13시경 이었다. 첫날의 코-스는 체력의 조절로 비교적 짧게 잡았으며 C1에 도착 후 대원을 두 파티로 나누어 한 파티는 캠프준비를 하고 다른 파티는 코-스 정찰을 해야만 했다. 산중 2일을 맞이하여 전원 4시 기상에 이여 7시 30분 C1을 출발하 였으며 등반의 행동정지 시각은 16시로 정하였다. 끼었던 가스는 점차적으로 벗겨지면서 멀리 크라운봉의 자태며 개미 등에 쌓여진 적설이 태양빛을 받아 은빛으로 빛나고 있으며 좌측의 탐라계곡이 검게 도사리고 있는 모양을 한눈으로 볼 수가 있었다. 초원지대와 밀림지대의 적설량은 상상보다 적으므로 탐라계곡 입구까지의 도착은 비교적 수월했다. 그러므로 날씨 또한 기온도 섭씨 3도를 가르키는 좋은날이므로 내일의 일정을 줄이기위하여 무리하지 않는 범위내에서 수송과 렛셀을 겸하여 운행을 했다. 계곡의 적설량은 1200mm였으며 탐라계곡부터 개미등 입구까지의 적설은 그보다 좀 많았으며 계곡위의 대피소옆에는 소가 3마리 죽어있었다. 우리가 이곳에서 약 700M 쯤 전진하여 야영지를 정한 것은 15시 50분이였다. 오늘은 어제와는 달리 눈을 다져서 단단히 한 다음 그 설면에다 텐트를 쳐야만 했다. 기온은 떨어지기 시작하여 영하 4도C를 가르켰으며 한라산 특유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산중 3일 7시의 수은주는 섭씨 3도를 가르키므로 어제의 눈은 비로 변하는 현상을 나타냈으나 오늘의 일정이 용진각 대피소가 있는 지점까지므로 우리는 갈길을 향해 떠나야만 했다. 개미목의 도착시간은 14시였다. 아직 1711고지의 트래파스가 남아있는데 행동시간은 2시간의 여유밖에 없었다. 이 지점부터는 부득히 적설량이 2천mm 정도이므로 설피와눈사태에 대비하여 자일의 사용이 불가피하였다. 이곳이 예상하던 첫 번째의 난코스였다. 몸들은 둔해지기들 시작했다. 900M정도의 거리를 근 두시간 정도를 소비하여야 됐다는 그간의 고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모두들 그들이 평소에 쌓은 실력을 최대 발휘하여 무사히 예정시간대로 용진각에 도착하여 C3의 설치를 서둘렀다. 대피소는 눈사태로 인하여 눈으로 꽉차 있어 눈을 일부 쳐내고 눈 부록크를 만들어 Snowhall을 설치하여야만 했다. 계곡을 사이에 둔 맞은편 1711M로 된 봉으로부터의 밤새 쉬지않고 일어나는 천둥소리와도 같은 눈사태 소리를 들으며 그날의 피로를 설동에서 풀었다.

1967년 2월 27일(월요일)

뷘 일본 북알프스를 정복한 산악부

◈ 본교 산악부는 19일 일본의 북「알프스」 穗高山(3190M) 원정을 마치고 귀국하였다. 佛大 철학과 정종교수를 단장으로 한 산악부의 일본 원정은 上高地-西穗高岳의 루트를 극지법(Polar Sistem) 등반방식에 의해 정복한 것이다. 그런데 동 루트는 많은 적설량으로 일본에서 가장 어려운 동계코스로서 지난 1월 10일을 전후로 일본의 A급 등산대 10여 명이 조난을 당해서 구조작업이 벌어졌던 곳이다.

◈ 지난 1월 22일 맹호편으로 부산을 경유 선편으로 일본에 도착해서 그곳 「구슈」(九州)대학산악부와 합동등반대를 구성코 「가미고찌」에 「베이스·캠프」를 친 것은 지난 2월 2일이었다. 이어 적설 6M의 산정 극지법에 의해 공격하였다. 1964년 5월에 본교 산악부가 정복한 바도 있지만 이번 등반은 겨울이 휘몰고 온 엄청난 적설량의 「핸디캡」을 무릅쓰고 이룩됐다는데 의의가 있다. 한국의 적설기의 산악조건과 판이한 일본 북「알프스」는 참으로 많은 난관을 가져다 주었는데도, 성공했다는 것은 한국으로서는 최초의 장거로서 일본 산악에 도전한 셈이다.

◈ 본교 8명, 「규슈」대 6명으로 구성된 등반대에서 최종으로 산정을 공격해 태극기를 꽂은 대원은 오인환(물2), 오영복(임1) 양군이다. 등반대원 명단은 다음과 같다.

뺣 동대산악부

△ 단 장 = 정종교수

△ 부단장 = 반태중체육주임

△ 리 더 = 강성윤(행4)

△ 부 원 = 윤용규(응생4), 최인호(상3),

이성만(상3), 오인환(물2),

오영복(임1).

뺣 「규슈」대

△ 「치프리더」 = 西野(대학원2)

△ 부 원 = 中溝(대학원2),

本田(학부4),

高山(학부4)

△ 탐 험 부 원 = 日高(학부3),

藤康(학부3).

(극지법이란? = 눈오는 계절 또는 높은 산을 등산 할 때에 사용. 산기슭의 「베이스·캠프」(Base Camp)에서 시작하여 A·B·C 등 캠프를 설치하면서 대원이 전진하고 일부 후퇴하면서 「써포트」를 받으면서 최종에 조건을 가려 몇이 산정을 「어택」(Attack)하는 등산법.)

1967년 4월 3일(월요일)

뷘 정상공격대 - 續.일본 북알프스 등반기<상> -

오인환

2월 3일 7시 30분에 베이스 캠프에 대장님을 혼자 남겨두고 우리 조일 합동대 전원 12명은 니시오다까(西穗高) 산장(2,400M)을 향해 떠났다. 구름 한점 보이지 않는 쾌청이다. 연봉을 전세 내다시피한 우리들의 긴 카라반은 무릎까지 빠지는 설국의 숲을 뚫고 나갔다. 눈의 깊이가 더해가기 시작한다. 마이너스 10도에서도 땀방울은 샘솟듯 하는데 눈속에서 나부끼는 만병초를 보았을 때는 한라산에 온 착각이 일기도 했다. 어느새 九州大 팀은 50M나 앞을 섰다. 장신인 李형이 앞장서서 럿셀을 시작한다. 얼마 후에 尹형이 교대했다. 얼마를 오르다보니 트라파스의 지점이 눈앞에 나타났다. 리더인 姜형이 톱을 섰다. 서로의 간격을 3m씩 두고 한발 한발을 조심스럽게 옮겨 눈을 다져 가면서 계곡을 굽어보니 천야만야 아찔한 생각에 두발이 후들후들 떨리기 조차 한다.

이런 드릴을 몇번이나 겪었을까. 이젠 설피마저 쓸모없을 정도로 상반신이 온통 눈속으로 빠져 들어가자 서로가 픽켈에 겨우 의지하면서 오르고 또 올랐다. 마침내 오후 1시경에야 오늘의 목적지인 니시호다까 산장에 엄동기에 있어서의 한국 초유의 족적을 남기게 되었다. 우리는 기쁘고 또 자랑스러웠다. 산장근처에다 일본팀 텐트와 우리팀 텐트 둘을 나란히 설치했다. 캠프 1이다.

간단히 점심을 끝냈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지점은 2천 4백m의 고지요 적설량은 산장의 2층 지붕까지 뒤덮을 정도로 6m는 넉넉히 되는 셈이다. 오늘 운반해 온 2박 3일의 식량전부를 텐트속에 남겨두고 하오 2시 10분에 전대원은 빈몸으로 하산. 가벼운 몸, 홀가분한 마음, 빠른 동작-이렇게 해서 지나치게 긴장을 풀었음인지 앗차하는 순간에 그만 우리 리더인 姜형이 다리를 삐는 사고가 일어났다. 너무 빨랐던 하산동작에 왼쪽 발이 스노우홀에 빠진채 가 속의 힘을 이겨내지 못하며 뒤틀리고 만 것이다. 대원들의 부축을 받아가며 무거운 다리를 끌고 BC까지 간신히 내려왔다. 내일 이 사고가 어떻게 되려는지 걱정이다. 여기서 병원까지 가려면 26km는 걸어야하니 만일의 경우엔 일이 크겠다는 예감이 들고 리더를 잃은 우리들의 내일의 계획이 또 어떻게 되려는가 싶어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2월 4일 아침 8시 45분 다리를 다친 姜형은 崔형과 요세사와 군의 부축을 받아 썰매로 하산키로 하고 尹형과 李형과 吳군과 나는 일본측의 西野, 中溝, 高山 그리고 日高군과 더불어 C1을 향해서 떠났다. BC엔 鄭대장님과 本田와 藤康군이 남는다. 얼마를 가다가 李형이 더 못가겠다고 BC를 향해서 하산했다. 姜형의 썰매를 돕기위해서는 좋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도 간밤에 눈이 없었으므로 어제의 럿셀자리가 그대로 남아있어 오늘은 그다지 힘들지 않고도 오를 수 있었다. 짐도 어제보단 가볍고해서 오후 1시에 산장근처의 C1에 도착했다. 마이너스 20도라지만 「버너」덕분에 그다지 추운줄을 몰랐다. 한국에선 누구도 이만한 고지엔 오를 수 없는 만년설의 이국땅에서 눈을 감고 있으려니 트란지스터에서 우리 KBS의 박사들의 재치문답이 튀어나오고 향수어린 노래가락이 들려온다. 내일의 「어택」을 위해서 일본 대원들처럼 빨리 잠들어야한다. 제발 봐준김에 내일 하루만 더 참아달라고 마음속으로 빌었다. 별빛이 처렇게 아름다운걸 보니 안심도 되지만 여기가 엄동기의 일본 북알프스 연봉 위란걸 생각하니 걱정이 안될 수도 없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2월 5일 그야말로 우리 동대 산악사 아니 한국산악운동에 있어서 영원히 간직되는 니시호다까다께(西穗高岳) 「어택」의 시간은 왔다. 7시 30분 C1에 尹형과 日高군이 또 남고 나와 吳군과 西野, 中溝, 高山군 전원 5명이 출발 직전에 BC에 계시는 鄭 선생님과 「트란시버」로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하면서 떠났다. 우리 두 사람의 컨디션도 한국에서의 어느 등반때보다도 좋았고 날씨 또한 최고였다. 어쩌면 성공의 길이 열릴 것 같이도 느껴졌다. 우리들은 등반도구 외에 각자가 2일분의 비상식을 휴대할 것을 잊지 않았다. 일본 알프스등반에 있어서 낙석에 주의하지않고선 능선이나 정상을 한발자국도 옮길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눈사태도 또 잦다. 차츰 경사가 급해짐에 따라 눈의 틈에 스텝을 바가지 크기 정도로 깊이 파가며 전진을 계속하노라니 풍압이 높아짐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준비해 온 특수 방한모로 완전 복면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게끔 되었다. 계속 능선을 타고 오르다보니 어느새 C1에서 西穗高岳까지의 2/3 지점인 첫 피크 능선에 올라와 있지 않는가. 과연 80도의 경사진 페이스에 절벽타기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실은 獨標는 우리를 초청해 준 九州대 탐험부가 고집하던 최종목표다. 이제 九州 산악부와 합동대를 조직하게 됨으로서 더 전진할 수 있고 이대로 다른팀만 없으면 西穗의 정상까지도 오를 수 있는 것이다. 먼저 두 파티로 나누어 高山과 오영복과 中溝를 A파티로 하고 나와 西野를 B파티로 해서 각 파티는 자일로 서로 묶었다. 우리는 이렇게 생명을 같이하는 우정의 줄로 완전 연속등반을 시도한 것이다. 스탭 하나하나에 온 신경을 곤두세워가서 한발한발에 네명의 전생명이 달려있음을 실감하면서 흡사 갓난애의 걸음마처럼 발을 옮겼다. <물리과>

1967년 4월 10일(월요일)

뷘 정상공격대 - 續 일본 북알프스 등반기<하> - 오인환

B파티인 나는 조심스럽게 스탭을 가누어가며 픽켈로 전신을 의지하면서 오르기 시작했다. 몸에선열이나고 입술은 바싹바싹 타들어간다. 자칫 잘못하다 정신을 잃는 날엔 뽀얗게 눈보라치는 2백여 M도 넘는 왼편 계곡으로 굴러 떠러져 버릴 것을 생각하니 눈앞이 아찔하다. 현기증을 느끼는 순간 나의 시야엔 파란 창공이 트이고 하늘아래 끝이 없는 설원이 흡사 바다처럼 물결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발밑만을 지켜보고 오르던 탓이었던가. 하늘도 땅도 바다같은 설야도 내눈엔 없었던 것이 아닌가. 마지막 스탭을 고정시켜 올라서 보니 멀리 잡목이 우거진 속에 한점 캠프 1이 보인다. A파티도 무사히 올라섰다. 오영복군을 가운데 두고 두 일본대원이 앞뒤를 섰다. 우리들의 안전을 위해 마음씀이 대단하다. 「어택」길에 올라서서부터 우린 서로가 십년지우가 된 것이다. 언어의 장벽도 없어지고 경험의 차나 조건의 상이도 사라졌다. 전원 5명이 안전하게 오르고 안전하게 내려오는 것뿐만이 염원이 되어 한테 뭉쳐졌다. 앞에 있는 「피크」하나가 또 우리를 기다린다는 듯이 떡 버티고 있지않은가. 하나를 간신히 치우면 또하나가 앞을 가로막고, 이러기를 몇번이나 되풀이했던가. 능선의 루트는 무척 날카로워 1m가 멀까말까하여 흡사 여자들의 긴 손톱모양 매서웁기 짝이 없고, 그 아래로 뻗은 천길만길의 계곡은 순간마다 우리들의 신경을 아찔아찔하게 했다. 오늘은 쾌청. 험산일수록 날씨의 조건이 90%는 차지한다는 실감이 들기도 했다. 그러면 모두가 운이라는 말인가. 한번 걸을적마다 「아이젠」 자국이 푹푹 박혀 들어간다. 어느새 우리들의 걸음걸이는 지크작크로 변해 있었고 고도에 숨은 차고 일시에 피로가 엄습하여 몸을 가눌 수 없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소위 고산병이라는게 이 증세의 심한 것이 아닐까 싶다. 한발자국 한발자국 눈을 파헤쳐, 발의 위치를 확보하면서 다음 피크를 향해 나서려는 판인데 바로 내 파티의 치프 리더인 니시노(西野)씨가 『아!』하는 외마디 소리를 남기고 나의 옆으로 한번 크게 슬리프를 하는 순간, 인간이 사경에 이르렀을때의 본능적인 반사행위에서 인가, 또는 평소의 훈련에의 한 완숙한 아이스 테크니크에서인가, 나의 몸에 연결된 자일은 순식간에 풀어지면서 그의 픽켈이 눈 깊숙히 제동을 가하고 사력을 다하여 자기 확보하던 것이 정말로 큰힘이 되던 찰라 그 위기일발의 다급한속에서의 최후의 픽켈에 의한 컷팅과 나의 엥카가 미약하나마 힘이 돼 서로의 타임이 일치되는 순간, 우리는 참으로 천행으로 사선을 넘게되었다. 그 순간 나의 등골에선 식은 땀같은 것이 죽 흘러내리는 것 같았고 「오싹」하는 전율같은 것을 느끼면서, 이제 나도 여기서 가는구나 싶은 생각이 머리를 번개같이 스쳐갔다. 정신을 차려 자세히 헤아려보면 불과 15m 정도 밖에 안되는 거리의 슬리프지만 니시노씨의 컷팅이 일초의 몇분의 일만이라도 늦었던 들 나의 능선 위의엥카가 무슨 소용이랴 어김없이 우리 둘이는 저 천여m의 나락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라는 생각에 미친 것은 한참뒤의 일이었다. 재빨리 A파티에서 자일을 아래로 던져주자 빙벽에 픽켈 하나에 전신을 유지하고 있던 니시노씨는 이를 붙잡고 「트래파스」하면서 간신히 내가 서 있는 안전지대로 올라설 수 있었다. 슬리프와 순간의 위대한 컷팅과 자일의 투척과 「트래파스」와의 시간은 그야말로 순간에 이루어진 일들이었다. 사신의 초대를 경각에 물리친 니시노씨가 내 곁으로 올라선 연후에야 앗질한 생각도 들었고 이젠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모두가 정신을 가다듬어 발자국을 고정시킨 연후에 앞을 가로막은 또하나의 피크를 올라서니 갑자기 시야가 확대되면서, 이 능선의 줄기가 여기서 끝이나는성 싶게 느껴졌다. 이젠 또 다른 피크를 오를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우리는 지금 곧 2908.6m의 니시호다까다께(西穗高岳)의 부지에 올라 섰기 때문이다. 실은 여기가 정상인 줄도 모르고 있다가 니시노씨들의 정상이라는 소리를 듣자 나는 그만 그 자리에 나도 모르게 덜퍽 주저앉고 말았다. 감격과 피로가 그리고 조금전의 그 어마어마한 공포감이 한거번에 뒤범벅이 되어 나를 엄습해 온 탓이리다. 뒤이어 우리 오영복군이 올라 섰다. 둘이는 순간 부둥켜 안았다. 나의 곡글(설안경) 속은 눈물방울 등 뽀얀 김이 서리고 있었다.

이날 이순간을 위해 간직했던 태극기와 산악부기가 픽켈에 걸려 높이 치솟아 올랐다. 깃발은 바람에 세차게 펄렁인다. 우리의 조국이 엄동기 일본 북알프스의 한 정점위에서 춤을 추고 있는 것이다. 나의 기쁨과 감격은 이 무딘 붓끝으로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를 모르겠다. 다만 울고 싶은 순간이 있을 뿐이다. 우리가 여기에 들어와서 나갈때까지의 2월 1일로부터 7일까지의 사이엔, 우리 외엔 다른 파티라곤 하나도 없었으니 산을 사랑하는 일본인들도 이시기를 회피하고 있는 것임이 틀림없다. 우리의 이번의 정상에의 고집은 하나의 모험에 속한 것일지도 모르나 하늘과 날씨가 도운 것이다. 시간은 오전 11시 10분 일본 알프스의 전산맥이 한눈 아래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고 멀리 富士山이 장엄한 설령을 들어내고 있다. 나에게 이 자연미와 산악미의 극치에 대하여 표현할 능력이 없음을 슬퍼할 뿐이다. 정상에서의 30분을 후탁보내고, 하산을 서둘렀다. 더 머물고 싶은 생각 간절했으나 이 기적적인 태양빛 아래 한시라도 빨리 캠프1의 보금자리로 돌아가야 했다. 머리가 띵한 것이 아무래도 가벼운 고산병이 아닌가 싶어진다. 이때 우리나라의 까마귀보다 약간 커보이는 새 한 마리가 우리들 앞에서 빙빙 돌고 있다. 우리의 성공을 축하라도 하려는 셈인가 싶어 유심히 바라보았다. 오후 3시 30분, 캠프 1에서 우리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尹형의 뜨거운 마중을 받으며, 따끈한 홍차에 빵조각으로 피로를 풀며 어택 보고에 꽃을 피웠다. 이날의 정상텐트 속의 마지막 밤은 포근한 잠자리에 무척 흐뭇했고 또 단잠이었다. 2월 6일 아침 9시에 캠프 1을 철수할 때 마음은 더욱 가벼웠다. 하산이 시작된 것이다. 간밤에 내린눈으로지난번 오를때에 럿셀을 해놓은 것이 소용없이 되어버렸다. 비록 말은 다르나 이젠 완전히 정을 통하게 된 일본 대원들간의 조크 속의 하산길은 경쾌 그것이었다. BC의 鄭선생님은 우리를 흡사 개선장군처럼 맞아 주셨고, 망원경으로 확인하신 어택시간이 11시 10분이 분명하다고 다짐하셨다.

<물리과>

1968년 10월 3일(목요일)

뷘 立敎大와의 합동등반기 - 설악산에 오르다.

뷘 일본 산악계의 정상 立敎大와 자매결연 - 임돈

<학적과장>

지난 8월 6일부터 일본 立敎대학 산악부와의 합동등반 인솔자로서 생각치 않았던 설악산 등산을하게 되었다.

일본 立敎대 산악부는 「관광비자」로 내한하였다. 그간 본교와 立敎大사이에 공적 서신왕래도 없었고 본교에서 초청한것도 아니었다. 교내외 및 사람들의 단순목적인 의사로써 한라산등반을 본교 산악부와 함께 마치고 상경한 후, 곧이어 있을 설악산등반의 인솔자가 마땅치 않아 내게 의뢰했던 것이다.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안갈 수 없게 되었고 그래서 출발 전날인 8월 5일 오후에야 준비를 서둘렀다. 立敎大팀의 멤버는 재학생 10명이었다.(한라산 등반때는 OB 2명이 참가)

본교에서는 재학생 4명과 OB 2명(본교 초대산악부장 최영식, 작년 졸업생 김우식)과 나. 이렇게전대원 17명이었다. 처음 그리 탐탁치 않았음에 비하여 등반을 마치고보니 이번 산행이야말로 재미있고 유익한 것이었다. 특히 8월 14일 북한산 백운산장에서 양대 산악부가 정식으로 자매결연을 맺게 되기까지의 계기로 발전하게 되었음은 의의있는 일이었다. 「코스」는 백담사에서 쌍폭을 경유,대청봉 정상에 이르렀다가 천불동계곡으로 내려와 신흥사에 이르는, 대학산악부로서는 무난한 것이었다. 첫날인 8월 6일 오전 5시 20분발 버스로 서울을 떠나 외가평에 다다른 것이 오후 1시 반경. 내리던 비는 한층 심하게 쏟아졌으나 오후 2시경에는 비가 개었기 때문에 그곳을 출발, 4시 반에는 백담사에 도착하여 막영을 했다.

8월 7일. 백담사를 오전 8시에 출발했다. 계곡을 따라 무수한 대소의 담과 폭포를 끼고 때로는 건너며 올랐다. 그때 심심치 않게 비가 내렸기 때문에 더위를 잊을 수 있었고, 비에 젖은 바위가 몹시 미끄러워 개울을 건너기엔 힘이 들었다. 봉정암에 도착한 것이 오후 7시 반. 봉정암산장에 여장을 풀었다. 비가 사뭇 쏟아져 다음날인 8일 오전 9시경에는 폭우였다. 정오까지 비가 멎으면 오후에 출발하려 했으나 한시가 넘어서야 멎었다. 입교大팀은 시간도 늦고 식량도 충분하니 하루 더 머무르자고 했다. 피로를 충분히 풀자는 심산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원래 계획도 있고하여 OB 2명과 나는 선발대로 먼저 떠나 계획대로 양폭산장에서 묵고 다음날 신흥사에서 합류하기로 했다. 하루를 더 쉬고 예정을 하루 늦추거나 그렇지 않으면 하루 일정으로서는 과히 길지않은 신흥사까지 내려와 만나기로 하고 오후 1시 반, 짙은 안개로 뒤덮힌 정상을 향해 출발, 청봉에 올랐다. 비탈진 능선 길을 거쳐 좁은 천불동계곡을 내렸다. 천당폭을 지나 양폭산장에 도착한 것이 오후 4시경. 이때 봉정암 산장에서부터 성동공고생 5, 6명이 우리를 따라 와 양폭산장에서 맞은 밤은 보름달과 요란스런 물소리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9일. 양폭산장을 8시에 출발. 요 몇해 동안 손질을 많이 하였으나 그래도 대단히 험한 계곡과 개울을 몇 차례 건너며 내려오다 오련폭을 지나 제법 넓어진 개울을 또 건너는데, 저 아래서 권총을 찬 군복차림의 청년의 요란한 부름에 놀라 다가가니 조난당한 성동고생의 시체를 찾은 경찰관, 하산시키는데 도와 달라는 것이었다. 「판초」에 덮힌 시체가 개울가에 있었다. 사고발생은 만 1일전 그러니까, 24시간동안 시체가 물속에 잠겨 있었다는 것이다. 무겁기 짝이 없었다. 하산길도 험할 뿐더러 우리 몇 사람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겁에 질려있는 성동고생들을 타일러 그들과 조를 짜서 일을 치렀다. 경찰관과 구조대원들이 가지고 온 도시락을 먹고 있는데, 우리 대원 4명이 내려오고 있었다. 몹시 반가웠다. 그들은 우리와 만나기 위하여 오전 4시부터 서둘렀다는것이다. 휴식을 충분히 한대다 식량 땔감들이 많이 줄어 행동이 예상 외로 빨랐던 것이다. 그곳부터는 길도 좋았고 구조대원이 운구하므로 우리 대원들을 먼저 보냈기 때문에 우리 셋(나 OB 2)은 시체뒤를 따라 천천히 내려와 신흥사 앞 여관에 여장을 풀었다. 그때가 오후 4시 반. 저녁때부터 다시 폭우가 시작되었다. 다음날 조반 후 立敎大팀이 날씨가 나빠 일본에서도 이야기를 들었던 울산암등반을 못하겠으니 그냥 가자는 것이었다. 오전 10시경 출발 속초에 숙소를 정하고 우리 대원인 池군과 둘이서 학교의 하기 수련장인 낙산 해수욕장을 잠시 돌아보고 다시 돌아와 속초에서 1박-.

8월 11일 오전 5시 20분 그곳을 떠나 귀성했다. 立敎大산악부는 1922년 창립됐다. 해방전에 이미 「히마라야」등반대를 보낸 일이 있는 일본 유수의 대학산악부로써 산악운동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 자기들이라고 자부하고 있다. 그들의 륙색을 살펴보면 다음 몇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 그들의 정신적자세이다. 그들의 목표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히마라야」정복이다. 따라서 그들은 암벽 혹은 빙벽등반은 극히 기초적인 것 외에는 별로 하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산 이외의 것에는 도무지 한눈을 팔지 않는다. 이번 산행에 있어서도 그들과 종교가 다른지 몰라도 백담사, 신흥사, 계조암 등 사찰에는 갈 마음조차 안 먹는 것이었다. 둘째 규율이 엄하다는 사실이다. 이번 일행 10명 중 4학년이 2명(1명은 「리더」, 1명은 「마네저」), 3학년이 1명「서브리더」, 나머지 7명은 1, 2학년생이다. 이 7명은 책임자이며, 상급생인 3명에게 절대복종이다. 평소 훈련때의 상급생, 특히 지도자로써의 기술, 경험, 그리고 지도력 등이 작용한 정신적인 것이 아닌가한다. 이 엄한 규율로 말미암아 그들의 단체행동은 혹시 부족한 점이 있는 체력, 기술 등을 능히 「카바」하고도 남음이 있는것이다. 셋째 식사다. 아침은 간단히 먹고 반드시 도시락을 싼다. 영양식이다. 그 도시락을 오전 11시경에 절반을, 오후 2시 반이나 3시경에 나머지를 먹는다. 배가 부를때 행동하므로써 숨이 가쁜일이 없게하며 점심과 저녁사이의 긴 시간을 배고프지 않게 지키는데 좋을것 같다. 우리들과는 체질이 다르고 식생활이 다르니 참고할 만하다고 느꼈다.

1968년 11월 7일(목요일)

뷘 본교 산악부 구조대가 본 설악산 조난사건 - 진상과 문제점 - 황현주

뷘 기상돌변이 주요원인 - 방수 포장 안돼 장비 적셔, 어려울 땔수록 침착성을

최초에 조난소식이 알려진 것은 26일 오후 4시경 생존자 洪貞順(간호학과 3년)양이 12탕골 입구의 火田民 定着部落에 도착함으로서였다. 이때 우리 동대산악부원 黃鉉珠(통계과 4년)군 등 2명은 탑교리앞 개울물(폭70m)의 상황을 정찰하기 위해서 나갔었다. 그러나 개울물의 요란한 소리로 불확실한 정보를 가지고 도강을 시도하여 보려고「자일」을 가지러 가던중 마침 도로 피해상황 시찰차 나왔던 인제군수와 경찰서장을 만나 우리가 얻은 정보를 보고하고 곧 군부대(공병대)로 돌려서 도강의 협조를 요청하였으나 자기들로서도 어떤 특별한 방법도 없고 솔직히 자기들은 그곳 보다도 도로복구 작업에 모든 신경이 쏠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 만으로라도 물을 건너려고 「자일」을 갖고 나왔으나 불가능했다. 27일 아침, 지난밤에 의논한 대로 우리대원 11명으로 조난구조대를 편성, 행동에 옮기는 한편 山岳部長 김항진(물리과 3年) 군으로 하여금 1학년 隊員 등 7명을 인솔하여 서울로 돌아가 소식을 傳하게 하였다. 27일 오전11시 渡江을 끝낸 구조대는 定着民家에서 생활한 洪양과 金享玉(의예과 2년) 군에게 경과를 들었다. 이들에 의하면 일행은 모두 9명으로 22일 서울을 출발, 23일 오후 入山하여 그날밤 도중에서 一 泊한후 24일 눈비를 맞으며 등산을 강행, 저녁때 막탕위의 동굴을 발견하여 밤을 새웠으나 불이 곧 꺼져 덜덜 떨다가 이튿날인 25일 아침 下山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도중「리더」인 김신철(의예과 2년) 군이 먼저 실신하여 눕자 구조대를 부르기 위하여 먼저 閔丙周(의예과 2년) 군과 趙奈令 (간호학과3년)양이 내려가고 기다려도 안오니까 또내려가고 이런 식으로 일행이 분산되어 下山을 계속했다. 도중 洪양이 혼자 一 泊하고 閔군이 죽은 것을 이튿날 내려오다 발견, 그날밤 주민들과함께 金군을 구출해 내려오며 趙양의 시체를 발견해서 그때까지 판명된 것은 생존자 2명, 사망자 2명, 실종자가 5명이었다. 김중배, 이구용을 조난구조대 리더로한 대원11명은 11시30분 부락을 출발하여 조난된 5명의 생사에 구조 희망을 품고 수색을 하며 오르기 시작했다. 12탕 계곡의 특수한 협곡을 안돌이 바위를 지나 부락서 2km지점에서 첫 시체 1구(趙奈令)를 발견했다. 우리 대원은 생존자를 찾아 전진을 계속 1.5km를 지나 실종된 박민호를 발견, 朴서부터 3km 떨어진 개울 건너에서 역시 죽어있는 姜炯泰군을 발견했다. 여기에서 다시 前進 2kn를 더 올라가 함지박골 入口를 약간 지난 곳에서 약 8m 높이의 계곡 왼쪽 절벽위에 놓여진 韓明淑양의 시체를 또 발견해냈다. 그곳에서 약 2백m를 더 올라간 곳이 뱀탕(俗稱 복숭아탕)이다. 이곳이 조난 原地인 것으로 추측되므로 탕아래 平地에 救助本部로 할「캠프」를 설치했다. 이튿날 새벽 7시경 수색나갔던 李仁貞(商2), 지영소(商2) 隊員이 「캠프」에서 약 50m 올라간 복숭아탕 부근에서 김신철군과 김한종군을 발견하였고 나머지 閔군의 시체는 이날 오전 동네주민이 계곡 아랫쪽에서 발견해 냄으로써 7人의 조난 시체를 모두 찾아냈던 것이다. 이번 조난의 원인으로 들 수 있는 것 가운데 가장 큰 것은 氣象의 돌변이다. 24일 밤 남교리에서 기온이 영하 1도였으나 그들이 피신했던 동굴의 高度가 1천m지점인 것으로 보아 영하 6, 7도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다음은 멤버 구성의 결점이다. 김신철, 김한종, 민병주군 외엔 경험이 적은 隊員들과 여학생이 세명씩이나 있다는 것도 「팀웍」의 「언밸런스」를 초래한 것이다. 셋째로, 장비와 식량면에 있어서 기본적인 요건은 어느정도 갖춰졌으나 防水 포장이 안되어 있어 침구와 옷을 비에 모두 적신 것이 치명적이었다. 때문에 동굴에서 새운날 밤 체온을 떨어뜨려 下山을 재촉하게 되었다. 이 경우 장비의 관리와 활용이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그들이 갖고 있었던 장비만으로도 기후의 돌변만 없었다면 무난히 이번 등반을 마쳤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와 같은 상황하에서는 우선 막영구부터가 부족하였던 것은 사실이다.

넷째로 下山 行動時 非常食을 안가지고 내려온 것 또한 잘못이며 나중에 살펴본즉 非常食의 준비가 부족했다. 다만 빵 몇개가 조난자들의 몸에서 발견되었을 뿐이다. 非常食이란 먹어서 배를 채울 수 있는 것만은 아닌 것이다. 즉 열량을 높일 수 있는 것이라야 한다.

다섯째 리더가 먼저 넘어지자 다음 리더를 맏게된 閔군이 먼저 구조를 청하러 내려간 것도 잘한 일이 아니라고 본다.

리더는 활동할 수 있는 隊員보다는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隊員을 보살피면서 침착하게 상황을 판단해서 나머지 隊員의 안전에 더 노력해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위급한 때일수록 정신력의 긴장과 상호간의 협조가 아쉬운 것이다. 사공없는 배가 어디로 갈것인가? 여섯째 구조활동의 사전 대책문제. 外國의 경우엔 주요 산악코스에 산악 警察 혹은 산악조난 구조대가 常設되어 있어 미리 사고에 대비하고 있다. 有事時 신속하게 움직이는데 우리의 경우 대비는 커녕 사후 연락도 잘 되지 않았다. 이번 소식을 최초로 서울에 전한 것이 27일 저녁 8시 반경. 그 느린 지방뻐스편으로 東大 山岳部長 김항진군이 서울에 도착해서 알린 것이었으니 말이다. 끝으로 이번 조난현장의 참상을 목도하고 산을 즐기다 불의의 非命에 먼저간 岳友들 앞에 다시한번 머리숙이며 앞 으로 주요산악의 요소에 안내표지와 험한 코스에는 대피소, 山莊같은 시설을 확보해야 할 것을 긴급동의한다.

<統計科· 산악부원 黃鉉珠>

【사진 = 12탕골의 絶景인 뱀탕. 이번 「카도릭」醫大조난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사진 좌측 중앙부가 첫희생자 발생지점.】

1969년 2월 27일 (목요일)

뷘 山이 좋아 山으로 - 동대산악부 漢拏山 등반기 -이영균

뷘 不意의 伏兵, 눈사태도 만나 - 못잊을 白鹿潭의 雪景

여러 가지 기술과 스테미너를 要하는 금번 冬期 漢拏山등반에 대비하여 우리들은 제1차로 학교에서 10일간 축구 농구 등 구기 종목의 트레이닝으로 신체단련에 주력을 하였다 그 다음으로 12월 20일 부터 30일 까지 백운대에서 실시한 겨울 高山에서의 등반장비 사용법 등 다방면의 기초 트레이닝을 끝내고 지난 1월 4일 서울을 출발하여 1월 5일 10시 40분 제주항에 입항하여 대망의 동계등반은 시작되었다. 특히 이번 등반훈련의 意義는 본교 산악부에서 국내 최초로 「피켈」 「아이젠」과 「설피」 등을 직접 우리들 손으로 제작하여 산악인들의 많은 찬사를 받았으며 그 새로운 장비들의 성능을 테스트해 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고 하겠다. 알피니스트의 꿈이 항상 산으로 향하는 것은 당연하겠으나 자연으로부터 소외당하고 살아온 우리로서 특히 이번 등반을 통하여 눈덮인 고산, 그곳은 그 어느 다른 자연보다 우리를 조금은 미치게 하였다. 그래서 이번 등반을 하는 동안의 이야기를 그잘 그날의 메모형식으로 적어본다. 「인간이 자연을 완전 征服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극복이 있을 뿐이라」는 말을 생각하면서.

1월 6일 제주시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그곳 산악회에서 특별히 주선해 준 트럭으로 우리 부원들은 산천단 까지 쉽게 갈 수 있었다. 산천단에서 부터 大地는 거의 눈으로 덮여있었다. 그곳에서 관음사까지의 초원지대는 白雪이 무릎까지 빠지는 황홀한 설령이었다. 등산로 입구에서부터 숲사이의 러셀이 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 먼저 발을 들여 놓았다는 예감이 들었다. 밤의 등반이 무리이긴 했으나 全부원이 무사히 표고밭 지점에 도착한 것은 19시 40분이며 지척을 분간 못할 깜깜한 밤이었으며 서울法大 산악부원들이 먼저 와 있었다. 그곳 표고밭은 여름에는 표고버섯재배장으로 겨울에는 비어 있기에 등산가들의 숙소로 적합했으며 그곳의 적설량은 1m 였고 기온은 영하 4도였다.

1월 7일 밤새 눈이 내리기 시작하여 낮에도 계속 내렸다. 우리들은 표고밭 지점을 베이스로 정하고 A·B파트는 계속 등행하고 C파트는 식품 써포트를 했으며 울창한 눈숲을 계속 통과하여 탐라계곡에 도착한 것은 정오 무렵이었다. 여름엔 그렇게 푸르고 무성했을 나무들은 눈속에서 그자태만이 보이고 있을뿐이었다. 다행히 계곡을 끼고 행동한 우리들은 바람이 없어 무척 좋은 컨디션으로 등행을 유지할 수 있었다. 험하기로 악명 높은 탐라계곡으로 등행하는 도중에 만난 능선과 능선에서 계곡으로 쓸어내릴 듯 쌓여있는 雪景은 쉽게 알프스나 킬리만자로를 연상시켰다.

산을 아끼고 사랑하며 자연의 신비에 도전하는 우리 알피니스트만이 느낄수 있는 쾌감이며 보람이었다. 無人의 설원에 나만 새로운 발자국을 남기며 등행에 여념이 없는 우리들의 귀에 어디선가 겨울 까마귀의 심난한 울음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드디어 제1폭에 도착하여 그아래에 캠프 1을 설치하고 C파트는 다시 베이스캠프로 돌아갔다. 예상외로 일기가 좋아 막영을 설치한 후 지형 정찰과 기상을 조사하다 보니 서울대학교 문리대 산악부원들이 제1폭 지점에서 급경사와 너무 많이 쌓인 눈으로 통과를 저지받고 있었다.

1월 12일 기온은 영하 12도 밤새 폭설이 계속 쏟아졌으며 짙은 안개로 시계거리는 불과 20m이내였다. 세게 불어닥치는 乾雪風이 얼굴을 때렸다. A파트는 장군봉으로 훈련을 계속했고 C파트는 삼각봉 크래바스 도중 눈사태를 만났으나 스노우 스위밍으로 모두 무사했다. 눈사태는 항상 不意의 伏兵처럼 나타나서 위험하곤 한다. B파트는 윔파텐트를 치고 스노우하우스를 만들었으나 눈이 粉雪이어서 미완성에 그쳤다. 13일에는 서귀포로 갈 예정으로 밤에는 서울문리大 산악부원들과 환송파티를 열었다.

1월 13일 안개는 여전하였다. 4박 5일의 용진각에서의 훈련을 무사히 끝내고 아쉬움을 안은채 백록담으로 향했다. 우리들 뒤로 거리를 둔채 약 60명의 적설기 등반대회 참가자들이 따르고 있었다. 백록담에 오르니 마침 안개가 걷히기 시작하여 분화구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었다. 전부원들이 글리세딩으로 눈 깜짝할 사이에 분화구 가운데로 빠져 들어갈때의 통쾌감은 오히려 전율에 가까웠다. 한라산에서 마지막 막영을 설치했다. 밤에는 구름이 걷힌 하늘에 총총한 별무리를 볼 수 있었다.

1월 14일 수림지대를 약 2시간 등행하여 남성대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햇볕이 내려 쪼이는 雪山이 눈에 부시었다. 계획대로 서귀포에 도착하였을 때 항구에는 서서히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곧 제주시에 도착하여 많은 사람들을 보게되니 산의 생리와는 전연 다른 우리들 일상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이 피부로부터 느껴지자 그동안의 등반 여정이 더욱 아쉬웠다.

1월 15일 제주시에서의 하룻밤을 끝으로 오전 10시 우리 全부원들은 건강한 얼굴로 귀로에 올랐다. 철선 안성호의 약간씩 심해지는 롤링에 몸을 맡긴 채 항구를 벗어나면서 시야에 점점 멀어지는 흰눈에 덮인 한라산이 보였다. 12일 동안의 등반훈련이 자꾸만 아쉬웠다. <水資源工學科>

1969년 11월 20일 (목요일)

뷘 世界의 頂上을 딛다 - 吳仁煥「알프스」, 「히말라야」정찰기<上>

뷘 「몽블랑」 頂上에 東國山岳會旗 꽂아 - 화폭처럼 펼쳐지는 峻嶺

… 우리나라 산악인들의 오랜 숙원인 「히말라야」정복을 눈앞에 두고 그 정찰대원으로 지난 7월 6일 장도에 올랐던 오인환(행정학과 4년 한국산악회 회원)군이 10월 30일 무사히 귀국했다. 오군은 약 50일 동안 꿈의 「히말라야」정찰에 성공하고 알프스의 준령을 정복, 등반훈련을 마쳤다. 「알프스」에서 「히말라야」까지 9천 2백 30km의 「눈덮인 준령의 이야기」를 오인환군의 글로 싣는다. ◇사진.「몽블랑」정상 …

7월 조기방학으로 학기말 시험도 못본 채 선생님과 선후배들의 환송을 받으며 한국을 떠나 일본을 거쳐 프랑스 「샤모니」에 도착한 것이 지난 8월 3일. 그곳은 세계각국의 수많은 등산가들이 시즌을 맞아 「알프스」를 오르기 위해 모여 들었으며 등산가들의 영원한 꿈인 「알프스」와 「히말라야」의 등반의 장도에 오른 나는 환희에 들떠 있었다. 나는 4일 「알프스」의 主峰인 「몽블랑」(4808m)을 오르기 위해 「샤모니 켐프타운」에서 케이블카에 몸을 싣고 많은 유럽 하이커들이 여름 휴가를 이용해 산으로 몰려들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화폭처럼 펼쳐지는 계곡을 지날때마다 영화에서나 사진으로만 보던 알프스를 만끽할 수 있었다. 급경사를 조금도 힘들이지 않고 오를수 있는 케이블카에 동승한 많은 유럽인들은 나를 유심히 보았다. 그곳에서는 좀처럼 보기어려운 유색인이기에 그들의 호기심은 대단한 것 같았다. 「빌레브」에 도착하여 「몽블랑 턴널」을 이용, 케이블카로 오르니 고도는 2천 6백m에다 기온이 섭씨 20도였으며, 빙하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곳까진 가족을 동반한 하이커들이 제법 눈에 띄었다. 나는 거기서부터는 자신의 체력과 힘을 견줘보기위해 땀을 흘리며 걸어오르는 도중 일본동산학교 夏期「알프스」원정대원 15명을 만났다. 그들의 완벽에 가까운 장비는 놀랄만한 것이었다. 다행히 나는 일본말을 할 수 있어 그들과합류하여 낮 5시 50분 3천 2백m의 「비오나시」에 도착해 그곳에 「텐트」를 쳤다. 주위의 일본 학생들과 각국 알피니스트들의 「텐트」들은 저녁 노을에 반사한 눈빛으로 황홀하기만 했다. 멀고도 험한 「히말라야」에의 도전. 어둠이 내려깔린 산봉우리에서 하룻밤을 보내면서 나의 「추렌히말」에의 꿈은 더욱 부풀었다. 8월 5일 아침 7시 이제부터 본격적인「알피니스트」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빙하를 가로질러 80여 도의 아슬아슬한 계곡을 가로질러 갈때는 수박만한 크기의 낙석이 바로옆에서 3~4분 간격으로 떨어졌다. 가슴을 쪼그리며 계속 올라갔다. 해발 3천 8백m의 「에구·듀·구데」산장에 도착하니 머리가 멍해지기 시작했다. 나에겐 67년도 일본「북알프스」 원정이 고작이며 이런 高山에 順化되질 않아 컨디션 조절이 무척 어려웠다. 그러나 계속 올라 세계에서 제일 높다는 「돔·듀·구데」로 향했다. 크레파스의 날카로운 萬年雪을 밟고 오르면서 숨이 차 20보를 걷곤 다시 쉬곤했다. 그리고「히말라야」의 정찰훈련이 이 정도라면 약자라고 자위하면서 빵과 비스켓으로 요기를하며 등행했다. 오후 5시 「돔·듀·구데」에 도착하니 나는 그 산장의 마지막 손님이었다. 단층 「스라브」의 석조 무인산장인 그곳엔 벌써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프랑스의 「알피니스트」로 가득 차있었다. 50명은 충분히 묵을 수 있는 이 산장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으며 시설은 우리나라의 호텔못지 않았다. 눈을 녹여「버너」에 식수를 끓여야 하기에 가스 스토브의 요란한 소리며 갑자기 소란한 기분이 들더니 몸이 떨리고 귀까지 멍멍해왔다. 밤새 잠을 제대로 이루질 못했다. 옆에 자던 독일인의 극진한 간호는 너무나 고마와 나는 입술을 간신히 열어 「당케 쉔!」만 연발했다. 8월 6일 이제 정상까지 5백여m. 섭씨 영하 18도에 바람이 세차게 분다. 천천히 스텝을 가누며 『이 정도의 고소병을 극복할 수 없는 체력이라면 아예 산을 포기할 수 밖에 없다』 「몽블랑」에 오르지 못한다면「추렌·히말」의 정찰은 물론 등산을 완전히 포기하기로 작정, 비장한 각오로 등산에 나섰다. 약 10분마다 쉬며 호흡을 조절 하면서 정상을 향했다. 날씨는 역시 쾌청. 구름이 「몽블랑」위를 빠르게 스쳐간다. 바람이 점점 세다. 「몽블랑」에 접근할수록 수천길 아래 빙하의 계곡으로 나를 날려 버릴 듯 바람은 기승을 부린다. 걸음마저 걷기 어려워졌다. 「유럽」인들에겐 일반「루르」로 알려진 「몽블랑」. 8월 6일 아침 10시, 나는 드디어 유럽의 지붕「알프스」, 그중에서도 최고봉인 「몽블랑」을 디디고 환성을 터뜨렸다. 남쪽의 이태리측「몽블랑」, 그리고 스위스, 알프스의 군소 침봉들은 장관이었다.

한국에선 처음으로 이「몽블랑」정상에 올랐습니다고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연발했다. 나는 피켈에 우리 동국대학교 산악회기를 치켜들고 자동 샤터에 포즈를 취했다. <계속>

1969년 12월 4일 (목요일)

뷘 세계의 정상을 딛다. - 오인환 「알프스」, 「히말라야」정찰기<中>

뷘 惡天候로 「마터호른」정복은 취소. 空路로 「뉴델리」에.

뷘 대망의 「히말라야」등반 - 스위스「등산가 墓地」참배

8월 9일 맣마터호른」(4477m) 을 등반하기 위해 스위스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다음날 아침 국경을 넘어 스위스 「쨀마트」에 도착하니「마터호른」과 「몬테로자」(4638m)가 설연을 날리며 그위용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역에서 내리니 이지방 특유의 마차들이 줄을 지어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거리에는 방울을 울리며 마차들이 지나가고 첫인상이 아담하였다. 나는 그곳에서 우선 「몽블랑」을 최초로 등반한 알피니스트「미첼크로스」등이 묻혀있는 유명한 등산가 묘지를 참배했다. 묘지 앞에는 그들이 生時 사용하였던 등산기구 「피켈」「자일」 등을 전시하고 있었으며 주위를 완전히 공원을 만들어 많은 사람들이 산책길에 들리곤 하였다. 이곳에서 나의 「마티호른」 등반 준비는 완전히 끝났으며 「몽블랑」에서 만났던 일본 등반대원들과 합류하여 목표「마터호른」의 최난 코스인 북벽코스를 등반하기로 결정했다.「마터호른」은 수많은 알피니스트를 삼킨 곳으로 몇 일전 뉴스로도 5명의 유럽등반가들이 조난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으며 날씨가 항상 변덕이 심한 것으로도 惡名높다. 우리 일행 15명은 「헤른리」(3천 2백m)산장에 도착, 1박 1달러의 유료산장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하고 다음날 등반의 세밀한 계획을 짰다. 그런데 난데없이 9시경에 휘황하던 가스 등불이 모두 꺼졌다. 그러더니 산장 관리인은 방마다 다니며 취침시간이라고 소리를 질렀다. 우리는 하는 수 없이 모두 잠자리에 들 수 밖에 없었다. 다음날 새벽 3시에 기상하여 「마터호른」을 향했다. 그러나 도중에 진눈개비로 30분도 안돼 후퇴하여 날이 개이기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악천후는 그 다음날에도 풀리지 않았다. 15일 새벽 4시 드디어 복벽 빙하의 1「피치」설벽에 일본등반대의 기무라(木村)를 선두로 우리 전원이 달라붙기 시작했다. 제3「피치」(3천6백m)의 암벽 돌출지대를 2시간만에 올라섰다. 건너편 계곡에선 눈보라와 함께 돌이 뒤범벅이 되어 쏟아지고 여기저기「크레파스」들이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그때 또 갑자기 먹구름이 가득 모여들고 심상치 않았다. 「리더」요꼬오(橫尾)씨는 下山을 명령「로프」를 연결시켜 「엥커」에 몸을 의지하고 전원 무사히 하산했다. 무척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나는 다음「추렌히말」정찰 준비 관계로 그곳(스위스)에 더 이상 머무를 수 없어 일본 등반대원들과 석별의 정을 나누고 로마「나데타라」를 거쳐「뉴델리」행 여객기에 몸을 실었다.

8월 24일 아침 6시 「뉴델리」에 도착했다. 「히말라야」의 길목인 「네팔」에 들어서려면 이곳을 거치지 않을 수 없다.

「뉴델리」에서 13km 떨어진「네팔」의 수도「카트만두」에 도착하니 이곳은 인구 2천만 정도의 고산지대로 사람들은 거의 맨발로 거리를 누비고 있었고 午公들은 거리에서 으레 자동차의 왕래를 멈추게 하였다. 거리에서 이채로운 것은 각국에서 모여든 「알피니스트」들과 이곳에서는 별로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 「히피」들 뿐이었다. 나는 얼마동안 머무르면서 「네팔」의 풍습, 언어 등을 조금익힐수 있었다.

9월 11일 마침내 일본메이지(明治)대학생과「셀파」한사람을 고용하여 우선 「센트랄 히말라야」인 「고사인군브」(5천 2백m)로 향했다. 저녁 무렵에 「트리스리바잘」이란 곳에 다달아 조그마한 호텔에서 여정을 풀었다. 감자종류로 된 이지방 특유의 식사를 하였다. 「셀파」인「텔파」씨는 우리일행의 일거일동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보살펴 주었다. 다음날 새벽부터「히말라야」등반은 시작되었다.「케러번」을 강행하니 땀이 비오듯 하였다. 「몬순기」(雨期)라 고도가 높아질수록 하늘은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수백m의 계곡사이에 아슬아슬하게 지은 움막에서 짐을 풀고 있으니 멀리「기룡히말」에서 떨어지는 폭포의 굉음은 계곡을 진동시켰다. <계속>

【사진 = 「센트랄 히말라야」의 고사인군트에서 日「메이지」大 生과 셀파(네팔인·中)와 함께 여장을 풀고 포즈를 취한 오인환군.】

1969년 12월 4일 (목요일)

뷘 世界의 頂上을 딛다 - 오인환 「알프스」 「히말라야」정찰기<下>

뷘 偵察 무사히 끝내 - 히말라야서 펄럭인 태극기

잔뜩 찌푸린 하늘에서는 마침내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고사인군트」로 향하여 2천 5백m 이상 올라갔을 때 우리들에게는 또하나의 애물이 생겼다. 그것은 「크레파스」도 아니고 落石도 아닌 거머리 떼였다. 보기만 해도 징그러운 거머리 떼들은 쉴사이 없이 습격을 해와 우리들은 진땀을 빼지 않을 수 없었다. 간신히 그곳을 벗어나 라마敎의 템플「신곰바」에 도착하여 약간의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는 네팔인들이 특주(特酒)로 손꼽는 「창」酒(우리나라 막걸리와 비슷함)로 피로를 풀었다.

8월 8일 우리는 「고사인군트」의 피크를 끼고 4천 6백m의 고도를 호흡조절에 잔뜩 신경을 쓰면서 등반했다. 이곳의 경치는 또 형용할 수 없을 것 같다. 특히 희귀한 자연호수가 여기저기 눈에 띄어 한결 시원했다. 산더미 같은 자갈밭을 지나「다리바르」 능선을 타고 쪼그마한 움막에 들렀다. 30대 정도로 보이는 女人 혼자서 젖소, 양, 닭 등을 기르며 살고 있었다. 이날의 식사는 그 네팔 여인이 짜주는 「두」(우유)와 버터, 치즈 등으로 떼웠다.

네팔의 가을은 땡볕으로 몹시 뜨거웠다. 「고사인군트」를 등반하고 나는 한국산악회에서 정찰계획으로 온 김정섭씨와 등반수속을 마쳤다. 비행기로 네팔의 두 번째 도시인 「포카라」까지 가는중 비행기에서 본 흰눈과 얼음으로 덮혀 「히말라야」연봉들은 장관이었다. 도착후 「셀파」(안내인)와 「포터」(짐꾼) 세사람을 구해 「츄렌히말」로 향했다. 바나나 망고 나무 등의 열대식물이 카라반 길의 雪山을 뒤로 잔뜩보여 그 대조적인 자연의 섭리가 인상적이었다. 따가운 날씨에 갈증을 해소시킬 수 있는 과일들을 다행이 쉽게 먹을 수 있었다. 오렌지는 1루피(30원)에 20개였다. 저녁식사는 네팔식으로, 조반은 빵으로, 점심은 김밥과 육포, 어포로 요기를 하며 「베이스캠프」까지 10일간의 긴 여정에 올랐다. 카라반 도중 민박 때는 네팔 관습대로 양, 닭, 개 등과 함께 맨 흙바닥의 움막집에서 잘 땐 냄새와 빈대, 벼룩들의 공습을 간신히 이겨낼 수 있었다. 카라반 도중에 이곳 사람들은 「쟈파니스(일본인)!」하며 우리들이 귀찮을 정도로 극성스럽게 아는척 했다. 나는 그럴 적마다 『「호이나(아니다) 코리안」』하고 대답했으나 나중엔 지쳐서 아예 모자에 큼직하게「코리아」라고 써붙이고 다녔다. 나는 가져간 약간의 약품으로 이곳 원주민들이 대부분 앓고있는 풍토병을 치료하여 주었으며, 그때는 나자신이 꼭 의사라도 된 기분이었다. 「캬라반」은 지루한「쿨라」를 끼고 계속 9일째 4400m의 산을 넘으면서 쉴 사이 없이 불어닥치는 강한 폭풍설로 날아갈 듯했다. 맨발의「포타」들이 능선의 눈을 밟으며 위태롭게 움직일때마다 신경이 곤두서곤 했다. 「베이스·캠프」에 도착하니 설산의 사슴때가 맞은편 능선에서 움직이는 것이 육안으로 보였다.

10월 10일 아침해가 「히말라야」의 연봉을 붉게 물들이며 장엄하게 솟아 올랐다. 추렌히말 7364m의 웅장한 모습이 선명히 나타났다. 옆 캠프엔 日本「구르자히말」7200m 원정대가 우리보다 먼저와 텐트를 치고 있었다. 적설량은 1m 이상, 온도는 영하 5도 캠프 앞 좌우엔 거대한 빙하가 잔뜩 이마살 찌푸리고 있었다. 표고는 5200m 밤엔 기온이 영하 10도로 급강하 하면서 강풍에「텐트」가 날아갈 것만 같았다. 「전천후 고산용」텐트속에서 「프랑스」제우모복(高山用)을 입고 있는데도 몸은 싸늘해 왔으며 떨리기만 했다. 14일 아침 7시, 이날은 우리의 「추렌히말」정찰을 축복이라도 해주듯 날씨는 쾌청했다. 일본産 「알파미」를 끓여 조반은 간단히 떼웠다. 목표는 오르기가 좀 쉬운듯한 「구르자히말」북봉 아래의 능선에 올라 「추렌히말」을 정찰「카메라」에 담는 일이다. 「아이젠」 「피켈」 「고산복」등 방한과 만반의 준비를 했으며 만약을 위해 「짜일」등 비상용구까지 모두 갖추고 암벽「크라이밍」을 시도했다. 양쪽벼랑으론 큼직한 돌이 굴러 떨어져 하얀 눈더미 속에는 선명하게 사태자국을 남겨놓곤 한다. 우리는 오르는데 1시간 이상이 걸려 70도 경사의 설면에 간신히 붙어 정찰을 마쳤다. 맞은편엔 「추렌히말」의 선명한 모습과 루트가 완연히 나타났다. 「피켈」로「글리세딩」하며 하산하는데 큼직한 바위덩이가 바로 옆을 스쳐 딩굴어 가다가 계곡 아래로 굉음을 내며 부서지고 있었다. 낮 12시 우리는 마침내 표고 6천m 지점에 도착하였다. 강풍에 펼럭이는 태극기의 깃발을 향해 우리는 조용히 머리를 숙였다. 그 감격의 표현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우리들 김정섭씨와 나는 그냥 감격에 차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만세를 불렀다. 우리산악계의 꿈인 히말라야의 정복은 쉬 이루어질 것만 같아 앞으로 얼마든지 정복할 수 있다는 확신으로 우리들의 정찰임무는 조금도 빈틈없이 수행 되었던 것이다. <行政學科>

【사진=히말라야「츄렌히말」(7364m) 10월 15일 오인환 촬영】

1970년 4월 16일 (목요일)

뷘 동국인 등반대회 - 登行을 위한 가이던스 - 이재창(佛大교수)

뷘 등산로의 사적 - 肅宗代에 築城된 北漢山城 - 宋時烈 등 外侵 대비로 축조 주장

뷘 普愚大師가 住錫한 太古寺 - 重興寺에서 僧軍 총지휘

오는 4월 19일 본교 개교이래 처음으로 개최되는 「東國人 등반대회」의 코오스는 貞陵을 출발 지점으로 하여 北韓山城의 大成門을 거쳐 登雲閣을 도착지점으로 하고 있는 바, 이 일대는 역사적으로 매우 유서가 깊은 곳이다. 여기 그날 거쳐갈 몇 史蹟에 대한 소개를 함으로써 참가자들의 참고에 보태자고 한다.

<북한산성> 임진왜란, 이괄 亂, 병자호란 등을 겪고난 李朝는 한 번 병란이 일나면 서울의 都城은 소호하기 어려운 것으로 알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江華島나 南漢山城도 敵軍이 침입해 왔을때 의지할 곳이 못된다는 것이 증명된 바가 있었다. 그리하여 만일의 경우에 고수할 수 있는 최후의 근거지를 선택하여 그곳에 견고한 성벽을 築造할 필요를 통감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대한 논의는 이미 宣組 때부터 일기 시작하였고 이덕형 같은 이는 북한산 重興洞에 高麗時代의 山城있었던 만큼 그 곳에 城 을 쌓는 것이 상책이라 주장하고 단신으로 이곳을 답사하여 맹렬히 역설한바가 있었고 孝宗時의 宋時烈도 같은 주장을 한바가 있었으나 여러가지 사정으로 착수치 못하다가 肅宗 37년(1711) 4월 3일 드디어 北韓山 築城의 착수를 보게되었다. 이 築城은 訓練都監, 禁衛營 ,御營청 등의 三軍門에서 분단하였는데 특히 求禮 華嚴寺의 聖能이 부하 僧軍을 거느리고와서 築城을 도와 큰공을 세운바가 있다. 숙종 37년 9월에 준공 본 이 산성은 萬景台, 白雪台, 元曉峰, 龍穴峰, 普賢峰 등 北韓山의 여러 산봉우리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쌓은 石築城壁으로 그 높이는 평균 18척이고 둘레의 전장은 20리에 달하고 있다. 또 20리 길이의 성둘레에는 요소에 성문이 열넷이나 있었고 東將臺, 南將臺, 北將臺의 삼장대가 있었다. 서문중 현존하는 것으로는 이산성의 정문인 大西門을 위시하여 大南門, 大成門, 大東門, 中成門, 補國門, 龍巖門 등이다. 당시 이 北漢山城안에는 訓營, 禁營, 御營 등의 兵營을 두어 守備兵 1천명과 僧兵 4백명을 配置하였는데, 僧兵大將은 이를 겸직케 하였었다. 또 이 山城內 에는 北韓山 離宮이라는 行宮이 있었고, 이밖에도 北韓誌에 보면 성곽이 143, 연못이 26, 우물이 99, 교량이 7, 누각이 3個所가 있었다고 하니 이 山城內의 규모를 짐작할 만하다고 하겠다. 북한산성이 이룩되었을 당시에는 이 성 안팎에 香林, 積石, 僧伽, 三千, 津寬, 道城, 文殊, 峯?, 重興, 龍?, 輔國, 普光, 圓覺, 國寧, 祥雲, 太古, 鎭國, 元曉 등 많은 寺院이 있었는데, 그중 이번 등산시에 지나는 곳으로는 重興寺址와 太古寺가 있는데 이 두절은 모두 역사적으로 유서가 깊은 절이다.

<重興寺址> 露積峰 남쪽 기슭에 지금은 그 터전에 주춧돌만이 씁쓸히 남아있지만, 당시에는 성내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또 가장 으뜸가는 절이었다. 136間의 규모를 가진 이 절에는 나라안에서 가장 학식이 높은 스님으로 하여금 八道 도총섭을 삼아 상주케 하였는데 그는 이 절에서 城內의 僧軍을 지휘함은 물론, 전국의 승군도 총지휘하였다. 또 이 절은 왕실에서 쓰는 약재를 造煉하는 등 寺格이 매우 높았는데 甲午以後 승군이 해산되고 부터 落莫하다가 1915 여름의 大豪雨時 露積峰의 山崩으로 崩消되고 말았다.

<太古寺> 중흥사지 동남쪽 태고대 위에 있는 태고사는 6·25 동란때 폭격으로 폐허가 되었는데 근년에 일부 재건되었다. 본시 이 절은 중흥사에 부속되었던 소암자지만 고려말의 고승 보우대사가 스스로 태고라 號지어 부르고 住錫하던 곳이라 일찍부터 널리 알려진 절이다. 이절 옆 남쪽지점에는 圓證國師의 塔碑가 현존하고 있다. 圓證國師란 곧 普愚大師인바 비각은 6·25때 타서 없어졌다. 碑는 麗末의 석학인 李積의 글에 權鑄가 썼고 우王 11년 (1385)에 세워진 것이다. (높이7尺 5寸 폭 3尺 5寸 5分 두께 6寸 9分) 碑 표면에는 高麗末 諸王의 이름이 있는데 그중「判三司事李成桂」의 7字도 있어서 이太組가 고려의 신하로 있을 때 이 碑의 건립사업에 참여하였던 것을알 수 있게 하여준다. 또 이 비가 있는 근처에는 부도와 石塔도 남아 있어 역사와 불교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이밖에도 숱한 사적이 길목마다 자리하고 있으니 등반 당일의 순례를 더욱 감회 짙게 하고자 여기에선 더 자상한 해설을 궂이 피하려한다.

【사진- 동국인 등반대회, - 코스개념도, 필자】

1970년 4월 16일 (목요일)

< 광 고 >

1970년 4월 23일 <목요일>

뷘 부푼가슴 山谷누벼... - 「동국인 등산대회」 스케치

뷘 協同·격려·浪漫의 하루 - 不老팀 상치쌈 들며 감회젖고

뷘 고전하던 홍교수...下山길엔 호통(?)

「동국인 등산대회」는 예상밖의 대성황. 참가는 48개 팀의 2백 40명 여기에 任員 70명과 응원단(?)을 합하면 3백 50명의 동국인이 유서 깊은 북한산을 누비게 된다. 70대의 노장으로부터 20대의 신입생까지 모두가 협동, 봉사, 자주적인 자기를 다짐하며 健脚을 겨루었다. 대회는 정릉에서 10시 50분.

◈ … 번인 不老팀(리더, 金東益 총장)의 스타트로 시작. 1분간격으로 동국산악회기가 들릴 때마다 多彩로운 차림의 선수들이 가파른 大成門으로의 길을 떠났다. 이때부터 군창지(점심장소)까지 고정심판원 12명은 6개처에 은신「산행채점」을 했다. 최종 출발팀은 學生課팀(리더 김병렬)과 「첨성대」팀.

◈ … 종합점수는 1백 50점 만점에 감점제. 「山行」(45점)은 ①팀 先頭와 후미의 간격이 10m 초과 ②보행시 흡연 및 음주 ③음료수의 물결 ④오물처리 ⑤불미한 일 등 ⑥구보했을 때 ⑦일열종대 ⑧앞지를 때의 에티켓 ⑨落石했을 때 등이 규정에 따라 감점대상이 되었다. 가장 많이 체크당한 곳이 ①과 ③, ④항, 선수간의 간격이 좁거나 너무 벌어졌고 계곡의 물을 더럽히거나 오물과 휴지의 처리가 좋지 않았다고. 오물과 휴지는 땅에 묻거나 태워버리라는 「주의」를 저버린 팀이 많았다.

◈ … 「등산복장」(20점)과 「장비」(35점) 는 대체적으로 양호. 수통과 스푼이 없어 他팀에게 딱한 호소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타임」(35점)은 2시간이면 넉근한 절 코스에 4시간 30분이나 배정했기 때문에 대부분이 정시꼴인. 그러나 대성문을 55~65분에 통과하도록 되어 있어 조금은 무리였던 듯. 12개 팀이 1분에서 30분까지나 연착. 그중에도 최저기록은 學處長팀의 30분 오버를 비롯하여 학생과팀 18분 행정대팀 15분 철학과팀 6분 불전·대학원·印哲科팀이 5분씩 이른바 지각생 팀으로 감점. 70대의 노익장을 과시한 김총장팀은 7분 초과로 타 팀의 열띤 박수를 받았다. 대성문까지의 타임배정은 5分 休息정도의 틈 밖에 안된 꼴이어서 뒷말이 있기도.

◈ … 「산상테스트」(15점)는 대체로 저조한 실적. 만점을 얻은 곳은 써클팀으로 나와 이달의 최우수상을 차지한 ROTC팀 뿐이었다. 「교양이 문제」된다고 채점자는 말하지만 문제가 암기위주가 많은데 결함은 있었던 듯.

◈ … 學處長팀(리더 김창식학장)의 洪鍾赫 행정대학원장은 往年의 축구선수 관록에 비해 苦戰. 그야말로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준 덕」으로 대성문돌파. 그러나 하산길엔 원기백배「젊은 사람들이 왜 이렇게 느리냐」고 도리어 호통(?). 한편 30년 만에 이 코스를 다시 걷게 되었다는 김동화박사는 깊은 감회에 잠겨 무난히 定時着. 不老팀이 마련한 상치쌈으로 김총장과 같이 점심을 유쾌히 들기도.

◈ … 佛傳팀(리더 목철우)은 「혼자뛰면 일등이요 둘이뛰면 2등」이라드니 결국 외저 노력상인 참가상. 그래도 좋아서 저물도록 山情에 취하고. 교무과팀(리더 박수근)은 李昌億주임을「정신적리더」로 한 참가신청 제 1호팀. 김교무처장 등의 열띤 응원속에 전코스를 무난히 돌파. 예행연습까지한 성의를 감안(?)하여 참가상. 등운각에 제1등으로 골인하여 쭉 늘어놓은 우승컵을 잠깐 실례하고 사진한장 찰칵. 사진으로 영광을 기록했다. 釋林會팀은 승복차림에 바랑까지 지고 스님다운 인자한 저력으로 모범을 보이드니 결국 모범상을 차지.

【사진=不老팀의 「리더」로 앞장선 김총장】

1971년 4월 12일 (월요일)

뷘 제2회 동국인 등산대회 - 18일 山岳祭典개최

뷘 젊은 行進 健脚겨뤄 - 附屬校팀 등 全東國人 참여 기대

◈ 松秋 → 통신대 → 雙龍寺코스 전동국인이 대자연속에서 호연지기를 키우고 진정한 대화로 발전과 중흥의 이해 제기를 모색하는 한편 산악활동의 선봉에 서서 애림사상의 고취로 동국인 상호간의친목과 증진을 도모하는 다채로운 목적으로 동국산악회와 동국교우회가 공동 주최하는 제2회 동국인 등산대회가 오는 18일(일)로 결정되었다. 작년에 이어 두 번째로 개최되는 이번 등산대회는 ①각과 대표팀 ②대학생팀(각써클, 학우회, 일반학생) ③일반팀(교직원, 대학원생, 동문, 부속학교 교사) ④고교팀(부속 고교생)으로 구분, 송추 → 통신대 → 원효사 → 쌍용사앞 광장에 이르는 코스에서 건각을 겨루게 된다.…

이번 등산대회는 당일 오전 9시까지 참가팀 전원이 서울역 서부역 광장(교외선 승차장)에 집합, 전세열차 편으로 송추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간단한 개회식을 가진 뒤 송추에서 쌍용사까지의 총연장 12km에 달하는 코스에서 벌어진다. 출발에 앞서 30분 전까지 각 선수들은 번호판을 부착하고 각조(리더 1명, 선수 3명) 번호순으로 1분 간격으로 출발한다. 채점은 집합과 동시에 시작되는데 점심시간의 취사장소는 통신대 근방이 될 것이며 최종심사는 쌍용사 앞에서 확정 시상하게 된다. 채점 요령은 복장, 장비, 산행, 시간, 산상 테스트 등으로 구별 채점하여 중요 감점사항으로 ①예정코스이탈 ②번호판 부착여부 ③임의의 편성조원 교체 ④불미스런 행동 등으로 되어있다.

이날 시상식은 하산지점인 쌍용사앞 광장에서 종합심사 후 총장, 이사장, 동장회장, 학처장 등이 직접 시상하게 되는데, ①각 부문별 팀 우승, 준우승상 ②전체 최우수상, 운행상, 장려상, 장비상, 모범상, 감투상, 인기상 ③참가상 등으로 9개 종목에 20여개 팀이 수상하게 된다. 한편 본교 산악부는 지난 10일 현지 등반코스를 답사, 소요시간 측정, 취사장조사, 심판원 배치선정 등을 이미 끝냈다. 아울러 참가신청을 접수중인 주최측은 참가선수들에 대한 주의사항을 시달하고 있는데 ①산행에 필요할 배낭, 취사도구, 비품구비 ②필기도구 지참 ③신분증 휴대 ④경기중 심판원과의 필요이상의 대화엄금 ⑤도끼등 애림에 위배되는 도구지참 금지 등이다.

참가신청 15일 마감-동국산악회

18일의 동국인 등산대회를 앞두고 주최측은 9일부터 15일까지 참가신청을 동국산악회실에서 접수하고 있다. 이에 따라 교직원 및 각 학과에서는 팀 구성을 위하여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으며 각 부속학교에서도 많은 참가가 기대되고 있다. 한편 각 팀의 「리더」회의는 신청마감을 끝낸 오는 16일 오후 2시 교수식당에서 열린다.

1971년 4월 19일 (월요일)

뷘 제2회 東國人 山行大會 - 힘찬 동국의 젊은 등행

뷘 65개팀 4백여 명 참가 건각 겨뤄 - 가슴마다 산의 精氣 듬뿍 - 식공과 등 20개팀 수상

… 건전하고 올바른 산악활동을 통하여 全동국인의 인화단결과 애림사상을 고취시키는 제2회 동국인 등산대회가 지난 18일 (日)송추 - 쌍용사간의 산행에서 대성황을 이룬 가운데 무사히 치뤄졌다.

이날대회는 총 65개팀(4인 1조) 4백여 명의 동국인이 송추를 출발하여 쌍룡사앞 광장까지 전장 12km 코스에서 총장盃 등 20여 개의 상을 두고 건각을 겨뤘는데, 영예의 최우수상은 식공과 A팀(리더 윤주억교수)이 차지했다. 또한 종립학원 중고교부는 대동상고 C팀(리더 김운수)이 우승을 차지, 영광의 이사장기를 받았다. 이번 등산대회는 작년과 달리 각 종립학교의 교직원 학생들도 참가하게 되었으며, 동국산악회와 동국교우회가 공동주최, 본사 후원으로 열렸다. …

이날 개회식은 송추카바레 앞 광장에 집합 국민의례로 시작되었는데, 南都泳학생처장의 대회사가있은 다음 명예대회장인 김동익총장은 『교직원 학생 동문등 전동국이이 일치단결, 산을 즐기는 가운데 동국의 발전계기를 찾자』고 다짐했다. 간단한 개회식이 끝나고 이번 대회의 주최측인 동국교우회 康鐵元회장(營4)은 등산반을 보호해 줄 ○○부대장 柳海文대위에게 위문품을 전달, 노고를 위로했다. 이어 심판위원장 민완식교수의 등산대회 주의사항이 있은다음 송추계곡에 교가가 우렁차게 울려퍼지는 가운데 오후 12시 50분 1번 불로팀(리터 김동익총장)을 선두로 2번 재단사무국팀(리더 河?俊)등 번호순 30초 간격으로 각팀이 출발, 통신대 계곡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점심시간에 장비채점과 산상 테스트를 마치고, 최종점인 상룡사를 향해 다시 각팀을 정비, 통신대를 출발했다. 전 참가팀은 14번 대동상고 교사팀을 선두로 종점인 쌍룡사앞 광장에 도착한후 종합채점을 하는 동안 각팀들은 피로를 푸는 즐거운 장기대회를 가졌다. 이어 오석규교수(심판위원)는심사평에서 『대체적으로 양호하였으나 일부팀에서 장비, 비상식량의 불비, 산상테스트 성적의 저조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심판위원장 민완식교수의 채점발표와 함께 20개 입상팀을 발표, 푸짐한 시상식이 있은후 오후 7시경 전 선수들은 무사히 하산했다. 이날 채점은 2백점 만점에 테스트 30점 타임 30점 장비 42점 복장 21점 식량 12점 의료 12점 산행 53점 등으로 감점제를 취했고 동점인 경우 심판위원 전원결정으로 판정을 내려, 입상팀을 결정했다. 다음은 이날 입상팀 명단(괄호안은 득점)이다.

■ 종합최우수상

= 식공과A팀(1백84점)

■ 각과대표팀

우 승=전자공학과팀(1백 79점)

준우승=전기공학과팀(1백 72점)

■ 일반학생팀

우 승=돌모임팀(1백 74점)

준우승=동대교육 방송국팀(1백 70점)

■ 교직원팀

우 승=킴·코브라팀(1백 74점)

준우승=동대부고 교사팀(1백 72점)

■ 宗立學校팀

우 승=대동상고 C팀(1백 73점)

준우승=동대부고팀(1백 62점)

1971년 4월 19일 (월요일)

뷘 俗塵씻고, 山과 함께-大學街 엥글

산은 베풀고 있다. 智慧와 德을 가르쳐준다. 『天下山水의 아름다움을 아는 사람은 上人이 아니고 그 누구이겠는가. 상인은 가위 인걸이라 할 수 있다.』고 일찍이 西山大師는 말한 적이 있다. 山의 계곡마다 우리 민족의 전통이 서려 있다. 저 우람한 山峰과 바위와 심지어 돌맹이 하나, 한그루 나무에서도 우리는 배우는 것이다. 하루 산에 모여, 모두 모두 모여 찌든 속진을 씻고 의연할 기상을 가다듬는다. 오늘도 산을 찾아 나섰듯이 우리는 내일도 영원한 품의 산을 찾으리. 저마다의 가슴속에 드높은 산하나씩을 두고, 오를 것이다.

【사진=18일. 제2회 동국인 등산대회에서. 사진·李春滿 기자】

1976년 9월 28일 (화요일)

뷘 挑戰하는 젊은이들<完> - 山岳·探險部 夏季活動記 - 山岳部 - 김형태

뷘 동계 등반위한 토왕성 정찰 - 치밀한 계획아래 극지법훈련

극지법에 따른 팀웍과 하중훈련, 동계등반을 위한 토왕성폭포 정찰, 달마봉(Rock Climbing) 훈련을 하기 위하여 7월 23일 부터 8월 6일까지 하계훈련 등반을 설악산에서 가졌다. 7월 23일 4시 45분 마장동을 출발하여 10시 40분 설악동에 도착, 장비를 다시 점검하고, 중식을 하였다. 이번 극지법(일정한 산록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하고 Attack 반이 점차적으로 전진등반을 하면 Support반은 이에 필요한 식량, 장비를 지원 수송해 주면서 산의 높이에 따라 전진캠프를 설치하고 미리 예정한 Attack 반을 안전하고 용이하게 정상에 등반하게 하는 방법) 훈련에 있어 베이스캠프가 될 권금성 산장이 눈앞에 빤히 보였으나 산행 첫 날이라 그런지 등반속도가 느렸다.

7월 24일 원래는 오늘 A,B,C 3조가 희운각까지 가고, D, E 조는 어제 설악동에 떨어뜨린 장비와 식량을 베이스캠프까지 운반해 오기로 하였으나, 극지법 훈련에 아무 차질이 없게하기 위하여 예비일 하루를 앞당겨 쓰기로하고, 일부 대원은 장비와 식량 등 극지법에 따른 제반사항을 재점검 하였으며, 일부 대원은 나머지 장비와 식량을 베이스캠프까지 올렸다.

7월 25일 <A組>attack반 답게 희운각까지 다른 부원들의 박수를 받으며, 다른 組보다 먼저 출발하였다. 화채봉 후부터는 햇볕은 따가와지고 바람 한점 안 불어주어 대청까지 올라가는데 힘이 들었다. <B, C>조 A조보다 30분 늦게 출발하게 되었다. 운행속도가 의외로 느려져 희운각에 도착하니 A組는 저녁을 먹고 내일의 운행을 위해 취침 준비를 하고있었다. 설악산을 등반하는데 희운각은 통상적인 일박지라 매우 시끄러워 자정이 넘어서야 잠을 잘수 있었다. <D,E組>여유있는 시간을 보냈다. 설악동에 내려가 편지도 부치고, 산장안의 짐들을 정리하였다.

7월 26일 <A, B조> 오늘의 예정지는 영시암이다. 운행하기가 어제같지 않아 바람이 불어주어 수월하였다. 공룡능선상에 오르니 어제 그렇게 힘들게 오른 화채능선이 한눈에 보인다.

<C조> 장비와 식량을 희운각에 떨어뜨려 놓고 다시 베이스캠프로 돌아가는 길이라 기스링이 새끼 손가락으로 들릴 정도다. <D, E조> 화채봉 밑에서 내려오고 있는 C조를 만났다. 하루 만이지만 매우 반가웠다. 중식을 같이하고, 너무 늦은 것 같아 희운각까지 운행을 재촉하였다.

7월 28일 <A파티> 일부 대원은 작은 귀떼기골 입구까지 표식기를 붙이며 정글칼로 길을 뚫고, 일부 대원은 B, D조로 지원 나갔다. <B, D조> A조가 붙여놓은 표식기가 간간이 보인다. 어제 A조가 길을 뚫어 놓은 관목지대에서는 하루사이에 자란 것은 아닐텐데 왜 그리 기스링에 나무가지들이 걸리는지. <C조> 새벽녘부터 비가 내려 오늘은 고생 좀 하겠구나 했는데, 다행히 출발후 30분 쯤 후에는 개었다. 대원들의 컨디션이 좋아 여유를 갖고 걸을 수 있었다. <E조> 계속 휴식겸 텐트를 지키다.

7월 30일 <A조> 기상, 공격점인 안산을 공격하는 날이다. 갔다오는 길이라 조그만 배낭에 비상식과 중식만 지참, 대승령에 오르니 바람이 몹시 불고, 안산에 오르니 가스가 끼어 몇미터 앞이 안보인다. 애국가, 교가를 부르고 담배를 한 대씩 핀 다음 하산. <C조> 계속하여 베이스 캠프까지 내려감. 「D조」희운각까지 철수. 「B, E조」원칙은 전진한 역순으로 텐트를 걷으며 철수하기로 하였으나 극지법훈련의 중요과제인 장비와 식량운송이 원만히 끝나, 날짜 단축을 위해 모든 조가 지름길을 통하여 내일 희운각으로 집결하기로 결정. 각 캠프로 연락.

7월 31일 모든 조가 희운각에 아무사고 없이 모두 도착. 개중에는 일주일만에 서로 만나는 대원들도 있어 즐겁고, 힘들었던 그간의 일들을 얘기하기에 바빴다.

8월 1일 하산길은 지루하다. 하산길이라 일부 대원들의 긴장이 풀린 것 같다.

8월 2일 산장을 내려와 설악동 소토왕골 입구의 캠프촌에 야영.

8월 3일 어제 밤부터 내린 비로 침낭과 옷들이 젖어 휴식겸 젖은 물건을 말리기도 했다. 오후에는 노루목에가 「10동지 묘소」에서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8월 4일 대원들의 사전에 치밀한 운행계획과, 극지법훈련 중 계곡등반시에 폭우를 만나지 않아 극지법훈련을 무사히 끝냈으나 그후 Rock-climbing을 별로 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다음엔 좀더 알찬 산행을 계획하면서 서울에 도착했다.

<김형태(산악부장·수학과)>

1977년 4월 19일 (화요일)

뷘 서클순례(6) - 산악부-

뷘 創設 20周年 記念行事 등 계획 - 東國人의 활달한 意志를 대변

산악부원들의 눈은 항상 눈덮인「히말라야」를 향한 굳은 집념에 불탄다. 『우리의 최종목표는 히말라야입니다.「에베레스트」를 발밑에 두고야 말겠다는 일념뿐이지요. 거대한 히말라야의 손짓이 우리를 부르는 듯한 환영에 빠지곤 합니다.』 안호근(건축3) 산악부장의 말이다. 그러나 이들은 자연을 정복하기 위한 「산사람」은 결코 아니란다. 대자연의 품속에서 겸허한 마음자세를 배우고 사회를 밝혀줄 생활의 지혜 호연지기를 닦는 산의 아들임을 명백히 밝힌다. 본교 산악부가 정식 발족한 것은 1957년. 금년으로서 만 20년의 연륜이 말하듯 눈부신 것. 64년 국내대학 최초로 일본의 북알프스를 원정한 것을 비롯, 국내 최대의 암산인 희양산(산악계에선 이를 東大山이라부른다.)에 登路개척, 지난해 1월 토왕성 빙폭 등정은 이들의 힘과 의기를 꽃피운 것으로 이로 인해 국내 Ice-Climbing에 불을 붙여 히말라야 단일팀 원정의 권유도 받고 있다. 지금까지 히말라야 원정의 실패 원인은 팀웍의 결여 때문이라는 것, 그러나 본교 산악부는 강력한 팀웍과 가장 많은 히말라야 등반대원을 배출한 실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현재 이들은 매주 서울근교 인수봉, 선인봉, 주봉에서 Rock-Climbing 위주의 훈련을 실시하고 있다. 또한 비가와도 야영을 하는 전천후 산악부를 이끌고 있다. 이렇게 매주 쌓은 재량은 春夏秋冬 四季등반에서 재검토하고 미비점 등을 보강한다. 춘계와 추계는 10일정도, 하계와 동계는 20~30일 동안 설악산, 지리산, 한라산 등지에서 산악훈련을 갖는다. 이때의 산행은 체력을 중요시하는, 히말라야 스타일, 45kg이상의 짐 무게에서 오는 정신적, 육체적 고통과 극한상황에 대처하는 강한 의지를 배운다. 이외에도 해마다 열리는 「동국인 등산대회」를 주관, 진행해 가는데 남모르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올해의 주된 계획으로는 창설 20주년을 기념해서 축전기간 중 대대적인 장비 및 사진전시회, 그리고 일본 북알프스 등정을 구상하고 있으며, 결산하는 보고서를 작성할 예정이다. 『저희는 산악부원만의 산악부가 아닙니다. 전동국인의 산악부이며 단지 동국인의 의지를 대변하고 있을 뿐입니다.』국내 산악계의 선구자의길을 걸어온 산악부-이들은 또한 동국인의 긍지를 심어주는 기수로서 노력을 다짐하다.

<元> 【사진=토왕성 빙폭을 오르는 산악부원】

1977년 4월19일 (화요일)

뷘 惡天候속에 意志의 健脚겨뤄 - 4·19義擧 기념, 東國人 登山大會

뷘 도선사 → 삼지천間 8.8km 누벼 - 2백 47개 팀 참가, 工經科 優勝

4·19의거 17주년을 기념하는 제8회 동국인 등산대회가 지난 18일 북한산 일대에서 개최, 때아닌진눈개비의 심술에도 아랑곳 없이 힘찬 의지와 단합을 과시하는 가운데 무사히 막을 내렸다. 본교 학도호국단 (師團長=魯演浩·林學4)이 주최하고 동국산악회(회장=김진복·국회의원)에서 주관한 이날 등산대회는 총 2백 47개팀 1천여 명이 참가, 출발지인 도선사에서 집결지인 삼지천 예비군 훈련장에 이르는 총8.8km를 한 팀의 낙오도 없이 누벼 勇猛精進하는 동국인의 기상을 다시 한번 내외에 과시했다.

이날 악천후속에서도 강행된 등산대회에서 영예의 종합 최우수상인 총장상을 차지한 팀은 학도 호국단부, 공업경제학과 2년팀으로, 4백점 만점에 3백 19점을 얻어 우승기와 트로피를 차지했다.

또한 학도호국단부 준우승에는 국교과 2년팀과 전기과 3년팀 그리고 佛敎科 1년 A팀이 각각 차지 했다. 이날 각팀은 9시부터 10시까지 도선사 출발지점에 도착하는 대로 간단한 출발절차를 마치고 질서정연하게 산행에 들어갔다. 동국산악인들은 용암문을 지나 11시를 전후해서 군창지에 도착 각팀별로 중식을 준비하고, 중식준비가 진행되는 동안 산상테스트와 장비점검을 실시했다. 이어서 선수들은 기상관계로 모두 1시부터 출발하기 시작, 원각문을 거쳐 3시경 마지막 집결지인 상지천 예비군 훈련장에 건강한 모습으로 도착했다. 이날 선수들은 심사위원회(위원장=이재창교수)의 심사가 진행되는 동안 장기자랑을 개최, 여흥을 즐기기도 했다. 이날 대회는 예상외로 비와 눈보라가 치는 등 기후변동이 심했으나 대회는 질서정연하게 진행되었다. 이날 각 부문별 수상팀은 다음과 같다.

■ 종합 최우수상(총장상)

공경과 2년팀

■ 종합 준우수상

전기과 3년팀(교무처장상)

국교과 2년팀(학생처장상)

불교과 1년 A팀(총무처장상)

■ 학도호국단부

불교대학 대대(불대 학장상)=철학과 3년

문리과대학 대대(문리대 학장상)=수학과 3년

법정대학 대대(법정대 학장상)=행정과 4년

경상대학 대대(경상대 학장상)=무역4

농림대학 대대(농림대 학장상)=임학과 C팀

공과대학 대대(공과대 학장상)=식공과 A팀

사범대학 대대(사범대 학장상)=체교3

교양학부(교양학부장상)=법학과 A팀

ROTC 대대=? ?(행정대학원장상)=1년차 B팀

여학생 대대(경영대학원장상)

=호국단 운영위위회 B팀

특별상 (도선사 주지상)= 家敎科 A팀

■ 교직원부

우 승(산악회장상)=운전기사팀

준우승(기획실장상=학생지도연구소팀

■ 동문부

우승(동창회장상)=행정대학원 B팀

■ 써클부

우승(호국단장상)=D·U·B·S(교욱방송국)

B팀 준우승(호국단부단장상)=스키부

■ 모범상

(이사장상)=미술과 교수팀

■ 장기상

1등(대학원장상)=합창단 B팀

2등(호국단 사단장상)=釋林會팀

【사진=용맹정진의 건각을 겨루는 제8회 동국인 등산대회가 지난 18일 북한산에서 열렸다.】

1977년 10월 18일 (화요일)

뷘 카라반루트에 散在한 佛敎遺蹟 - 都昌鎬同門의 에베레스트 登頂談

뷘 大카라반…遊牧民移動 방불, 壯觀 - 두통 등 身體이상, 意志로 高度順應

<有能하고 忠直한 셀퍼> 이번 에베레스트 등정에 가장 성공적인 요인은 대카라반 길잡이인 유능하고 충직한 셀퍼 고용이었다. 에베레스트 전문셀퍼들은 마침 같은 기간에 뉴질랜드 등반대가 셀퍼없이 공격을 하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일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한국원정대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아무튼 쉬고있는 셀퍼를 에베레스트에 도전한 외국대 등정보고서에 나타난걸 토대로 일일이 체크하여 가장 믿음직한 셀퍼를 고용했다. 우리는 3명의 사다(수석 셀퍼), 23명의 아이스·폴 셀퍼 등을 고용하였다. 그중 8천m 이상의 高所에서 활약한 바 있는 셀퍼가 10여 명이나 끼어 있었다.

<피라밋형 정상공격> 통상 2명이 정상을 공격하면 10명 내외의 지원조가 따른다. 또한 지원조를 지원하는 또다른 지원조가 있다. 이렇게 두사람의 공격조를 지원하는 인원은 무려 70-80명에 이른다. 그 상황은 산과 같다. 산을 등정하려면 산모양처럼 피라밋형 지원이뒤따른다. 우리도 한국의 거대한 지원을 받고, 국민의 성원을 등에 지고 등정했다. 밑에서 넓게 얍축해서 조이고, 그 압축된 힘으로 정상에 도달했다고 본다.

<大카라반의 명물 야크> 셀퍼들의 체력은 부러울 정도였다. 고도순응이 잘된 그들은 20kg의 짐을 지고 달리듯 산을 오른다. 우리는 그들을 빈몸으로 쫓아 가기에도 힘들었다. 대카라반 중엔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야크라는 高所의 들소이다. 히말라야 등정엔 없어서는 안될 충실한 짐꾼이다.

다른 포터(짐꾼)들 처럼 담배를 주지 않아도 제가 가야할 길을 쉬지않고 간다. 다른 포터들이 운반하는 갑절의 짐을 싣고 사람이 갈 수 있는 길이라면 깎아지른 벼랑이라도 곧잘 건너간다. 이곳에선 야크가 많은 사람은 큰 재산을 가진 것이나 다름없다. 야크가 곧 재산이다. 아무리 고소의 동물이라지만 야크도 失足을 하는 경우가 있다. 이럴 경우 야크는 장엄한 대카라반 원정에서 빠져 인간의 먹이가 된다. 그렇다고 셀퍼나 포터들은 카라반 도중에서 야크를 잡지 않는다. 투철한 신앙심을 지닌 그들은 야크를 끌고 마을로 내려가 잡아서 다시 끌고와서 먹는다. 물론 죽은 야크를 끌고 내려갈 때나 올라올 때도 야크를 이용한다. 따지고 보면 천연의 신비를 지니고 얼굴을 내보이지 않던 지난날의 히말라야 설원의 주인으로 마음껏 뛰어놀던 야크가 이제 인간의 정복욕에 의해 대자연 정복의 도구로 이용되고 있다는 사실이 꽤 아이러닉했다. 더욱이 자신의 동료의주검을 먹이로 싣고 올때는 묘한 기분까지 자아내게 했다.

<카라반 루트의 불교유적> 셀퍼,야크, 포터들이 줄을 잇는 카라반은 흡사 유목민의 이동처럼 길게 늘어져 장관을 이룬다. 특기할만한 사실은 에베레스트 카라반 루트에 많은 불교유적이 있는 사실이다. 삶이 쉴만한 곳에 탑과 불경을 돌에 새겨 쌓아놓은 마니벽과 가다(불경을 목판으로 찍은旗)들이 많았다. 웬만한 산정도의 암벽에 불경을 새겨놓은 곳도 있었다. 한 셀퍼는 고산마을 「남체」, 「당보제」, 「디보제」, 「팡보제」, 「페리제」등 끝자의「체」나 「제」니 하는 지명은 부처가 지나간 발자취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釋迦가 카라반 루트를 지나 갔는지는 몰라도 내겐 사실처럼 여겨졌고, 비록 梵字로 쓰인 불경이지만 낯설지 않았다. 나는 다음과 같이 일기를 썼다.

『전혀 딴 나라에 온 것 같지가 않다. 산의 얼굴도 그러하려니와 순박하고 천진스런 셀퍼들의 성품에 친밀감을 갖게 된다. 무엇이든 도와주고 싶은 인간들이다. 맨발로 비탈길을 오르는 포터들. 부부도 있고, 형제, 자매도있다. 주어진 삶에 충실하며 고통을 잊고 살아가는 그들이 부럽기도 하다. 釋尊은 이길을 지나면서 무엇을 생각했을까. 2천 5백년전의 대자연속에서 제행무상을 설파한 그 뜻을 깨달을 수 있을 것 같다.』

<地球에 이런곳이… 魔의 아이스·폴> 우리 일행은 해발 5천 1백m 지점부터는 지구의 마지막 생물인, 이끼마저도 보이지 않았다. 빙탑, 자갈밭이 불도저가 지나간 흔적처럼 한참 계속되었다. 우리는 아이스폴 공략에 나섰다. 히말라야에 도전한 수많은 인명을 앗아 갔던 魔의 아이스·폴-그에 못지 않은 매력도 지니고 에베레스트의 철문처럼 버텨 선 아이스·폴 과연 아이스·폴은 어떤 모습인가? 흥분과 함께 두려움도 있었다. 표고차 7백 80m의 아이스·폴은 마치 호도알 같은 형상으로 굴곡이 심했다. 아이스·폴 밑으로는 상상조차 못할 정도의 쿰부 빙하가 흐르고, 아이스크림처럼 녹아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았다. 셀퍼들이 깃대를 꼽아 놓았다. 깃대 하나를 지나기가 무척 힘들었다. 그렇지만 아이스폴을 통과한다는데 들뜨고 꿈은 벌써 정상이었다. 우리는 6천 1백m에 C1을 설치했다. C1에서 바라본 에베레스트의 몸은 너무 아름다왔다. 지구에 이런 곳이… 밤에 잠을 자다 얼음 갈라지는 소리에 자주 깨었다. 꽝꽝. 포쏘는 소리처럼 육중했다. 꼭 우리의 전진캠프가 그 속에 빨려 들어가는 착각을 일으켰다. 얼음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새로운 크레파스(氷裂)가 생기는 것이다. 때로는 魔의 아이스·폴을 넘고 정상을 향해 내딛는 우리에게 축포처럼 들렸다.

<정상을 향한 苦鬪… 前進 캠프의 밤> 나는 C4 설치를 위해 선발대로 뽑혔다. 7천m 이상의 고도에서는 원래 산소마스크를 써야하지만 나는 지원조로서 산소공급을 받지않고 전진했다. 7천m 이상의 고지에서는 내가 호흡하는걸 의식할 수 있을 정도로 호흡에 곤란을 받았다. 한발을 움직이는데 꽤오랜 시간이 걸렸고 1백m를 전진하는데 한시간이나 소비했다. 가슴이 답답하고 연탄가스를 마신 것처럼 모든 행동이 불편했다. 낮엔 영상 40도 밤엔 영하 30도를 기록, 두꺼운 옷을 늘입고 추위와 더위를 막아야 했다. 안경은 꼭 써야하고 안경을 벗으면 강한 햇살과 백색의 눈빛으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나는 7천 8백m 지점에 C4를 설치하고 C3으로 내려왔다. 원래 나는 C3에서 잠을 자지 않고 하산하려 했으나 동료대원이 심한 두통으로 하산할 수 없어 내가 C3을 지키게 되었다. C3에서 잠을 자다 골이 빠개질 듯한 두통으로 새벽 1시쯤 잠이 깨었다. 고도순응이 제대로 되지않은 내게 두통은 사정없이 엄습했다. 누가 머리를 망치로 두들기듯 정신없이 아프다가 갑자기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번져 왔다. 긴 밤을 두통과 사우면서도 자신감을 잃지 않았다.

아침이 된다 통증이 멎었고 모든 대원들이 정상 공격을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내겐 정상공격의 차례가 오지 않았다. 나는 전진캠프 설치를 끝마치고 돌아와 한국의 슬기를, 意志를 그리고 훈련도중 영원히 산으로 돌아간 동료들의 넋과 기백을 에베레스트 정상에 심는 순간-그 순간을 가슴 조이며 기다렸다.

- 本登頂談은 座談會에서 발췌한 것임.

1977년 10월 18일 (화요일)

히말라야 登頂과 東國山岳의 來日-座談會 - 參席者:정종<佛大敎授·山岳人>, 김장호<사대교수·대한산악연맹이사>, 도창호<동문·에베레스트 등반대원>, 안호근<건축3·산악부장>, 안병준<공경4·산악부원>

□司會 : 宋 赫 主幹

□일시=10월 15일 오전 10시

□장소=본사 회의실 - 荷重訓練 등 히말라야 登頂목표 - 創設 20년만에 히말라야 첫 데뷔 “海外遠征 경험살려 挑戰해 볼만”- 山岳部

♠ 사회=감사합니다. 지구의 최고봉 에베레스트의 등정은 30년이란 짧은 한국 등반사에 획기적인일이라 여겨집니다. 더욱이 도창호동문의 개선은 동국산악회의 경사로써 축하를 보냅니다. 韓國隊의 선발대로서 시종 어려운 일을 잘 처리하며 유능한 「써포터」로 탁월한 활약을 보인 도창호 동문의 개선을 계기로 대학 산악부의 전반적인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 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특히 이 자리엔 이번 에베레스트 원정대 국내 훈련대장이셨던 김장호교수님, 줄곧 이들을 격려하면서 지켜보신 정종교수님, 도창호동문, 現 東大 산악부원들과 함께 이야기를 풀어 나가기로 하겠습니다.

♠ 정종=이번 에베레스트 등정은 국력보다 10년은 앞서서 이룩한 쾌거였습니다. 훌륭했어요.

♠ 도창호=국민의 성원에 힘입어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제경우엔 모교 동국산악회원과 총장님의 격려가 큰 힘이 되었습니다.

♠ 정종=우리의 국력과 국민적인 성원을 입어 등정에 성공한 것이라고 봅니다.

♠ 사회=이번에 에베레스트 등정에서 인상에 남는 것부터 말씀해 주시지요.

♠ 도창호=에베레스트 카라반 루트에 사람 쉴만한 곳은 거의가 불교 유적이었는데 놀랐습니다. 그만한 고지에서 유적을, 그것도 친근감 있는 불교 유적을 만나게 되리라는 생각지 못했거든요. 석탑이 도처에 있는가하면 불경을 돌에 새겨 산처럼 쌓아 놨더군요. 그곳 사람들 말로는 石尊의 수행 자취라고 하는데 저도 그럴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어요.

♠ 김장호=에베레스트 카라반 루트가 석존의 고행로인지, 아니면 셀퍼들이 그들의 산행에 무사고를 빌기 위해 만들었는지 현지 탐사를 해볼만 합니다.

♠ 사회=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본교에서 학술탐사반을 파견한다면 좋은 결과가 나올 것도 같군요.

♠ 도창호=유적은 지구의 마지막 생물인 이끼마저 보이지 않는 5천 1백m 까지 계속해서 나타났습니다. 특이한 것은 돌에 새긴 불경의 글자 규격이 같지 않았다는 거지요. 아마 불경을 새기다 칸이 모자라면 글씨를 작게쓴 모양인데 퍽 인상적이었어요.

♠ 사회=역시 종립대학 산악부 출신다운 관찰이며 보고입니다. 도군의 이번 원정이 동대산악부 20년 역사에 퍽 뜻깊은 일로 생각됩니다.

♠ 김장호=도군은 이번 등정에서 7천 8백m까지는 맨처음 오른 한국인입니다. 선발대로 전진캠프 구축때 먼저 7천 8백m 까지 올랐거든요.

♠ 안병준=또 도선배는 이번원정대 중 대학산악부 출신으론 유일한 분입니다.

♠ 정종=동대산악 20년사에 우리는 도군을 히말라야에 정식으로 데뷔시킨 셈이죠.

♠ 도창호=제가 재학중일 때도 동대산악부는 히말라야 등정을 꿈꾸었는데 지금도 그렇죠?

♠ 안병준=그렇습니다. 저희 산악부는 아무래도 알피니즘보다 히말라야리즘이 더 어울리는 것 같아요. 그 이유는 하중(짐지기) 훈련을 철저하게 하고 있거든요. 또 철저한 하중훈련 뒤엔 기본적인 테크닉도 따라 붙게 되거든요. 확실히 히말라야는 고도의 테크닉보다는 하중훈련을 통한 지구력이 더 중요할 것 같아요.

♠ 김장호=맞습니다. 持久力 배양을 위한 하중훈련을 중요시하는 본교 산악부는 히말라야 스타일이죠.

♠ 사회=알피니즘과 히말라야리즘의 차이를 설명해 주시죠.

♠ 김장호=20세기 초에 유럽의 알피니스트들은 눈길을 들려 히말라야에 도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매번 실패를 거듭했지요. 실패의 원인은 히말라야를 단순히 높이가 알프스의 2배라는 점만을 염두에 두고 무작정 덤벼들었기 때문입니다. 8천m급 이상의 히말라야 저산소 상태와 고도순응에서 실패를 한겁니다. 히말라야 등정은 스케일이 커야합니다. 짐져 올리는 훈련과 극지법 훈련이 필요합니다. 이번 등반대의 성공요인도 어쩌면 수차의 설악산 일원에서 갖은 기초적이 빙설훈련, 하중훈련, 팀웍 훈련 등이 주효했다고봅니다. 알피니스트들이 히말라야에 가면 히말라야리즘이 뚜렷하게 떠오릅니다. 남북극을 탐험할 때 사용하는 「포위전술」에다 「돌격전술」을 가미할 때 비로소 히말라야리즘의 개념이 뚜렷해 집니다.

남북극은 기상돌변이 없고, 자외선도 희박하고 酸素도 충분하거든요. 그러나 히말랴야에선 8천m 이상의 고지에서 빨리 정상공격을 헤치우지 않으면 인체 전체를 망가뜨리고 맙니다. 즉 저소의 「포위전술」과 고소의「돌격전술」을 병행해야 합니다.

♠ 사회=이번 등정을 계기로 앞으로 히말랴야에 대학산악부의 단일팀 도전도 생각해 볼 수 있을텐테요.

♠ 김장호=물론이죠. 마나슬루는 이미 일본 대학팀도 수차례 등정한 바 있습니다. 제 생각으론 국내의 대학팀이 원정을 간다면 경비나 효과면에서 무산소로도 해치울 수 있는 6~7천m급의 니루기루峰(6천 8백 39m) 담피스봉 등의 미답봉을 등정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 안호근=저희들은 선배와 완벽한 팀웍을 구성, 마나슬루를 등정하고 싶습니다.

♠ 안병준=저희 산악부도 산악인구를 2백여 명이나 배출하고 창설 20돌을 맞았으니 히말라야에 도전할 나이도 된 것 같아요.

♠ 정종=단일팀 구성은 팀웍면에서는 월등하게 유리하겠지만 자칫 타 팀을 의식, 무리한 공격을 감행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산사람은 객기가 없어야 합니다.

♠ 도창호=맞습니다. 산악인이 영광이나 후광을 위해 덤비면 실패는 당연합니다. 어느 산악단체는 그들의 특성을 살려 탁월한 팀웍으로 자연스럽게 접근해야 할 것입니다.

♠ 계획을 이야기해 볼까요?

♠ 안호근=이번 동계훈련에선 서귀포, 북벽에서 극지법훈련을 할 계획입니다.

♠ 안병준=지난 동계훈련에는 한계령에서 오대산에 이르는 코스를 25박 26일동안 도보로 하중훈련을 실시하였습니다.

48키로 정도의 짐을 지고 가슴까지 덮힌 눈을 헤치며 훈련을 강행했지요.

♠ 안호근=한마디로 저희 대학산악부의 훈련계획은 전통적으로 히말라야 등정에 맞도록 짜여져 왔었던 것 같습니다.

♠ 김장호=본교 산악부가 대학산악부의 첨단을 걸어온 건 사실입니다. 전동국인이 참가하는 동국인 등산대회를 개최하고, 또 수차에 걸친 해외원정, 토왕성 빙폭등정 등 수차의 初登 경력 등을 볼 때 단일팀 구성으로 히말라야 원정도 가능하리라 봅니다.

♠ 정종=거듭 말하지만 이번 에베레스트 등정은 국가적 차원에서 볼 때 어느것보다 경사스런 일입니다. 그런데 들리는 말로는 대원들에게 연금조치가 되지 않았다는데, 그게 사실이라면 유감스런 일입니다. 올림픽대회의 금메달과는 차원이 다른 훌륭한 국위선양입니다. 관계 당국의 再考가 요청됩니다. 산악인의 사기 앙양에도 꼭 필요합니다.

♠ 사회=여러가지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사진=정종, 안병준, 안호근, 송혁, 김장호-오른쪽 위 사진부터 시계방향으로】

1978년 4월 18일 (화요일)

뷘 東國山岳人의 「協同과 友情」넘쳐 - 4·19義擧기념 第9回 東國人 登山大會

뷘 1百 68個팀 健脚겨뤄 - 國敎科등 23개팀 入賞

… 4·19의거 18주년을 기념하는 제9회 「동국인 등산대회」가 18일 4월의 화창한 北韓山 일원에서 열려 젊음의 기개를 펼치고 무사히 막을 내렸다. 학도호국단(師團長=金一亨·印哲 4)주최, 동국산악회(회장=김진복,국회의원) 주관으로 동국인이 의지의 건각을 겨룬 이날 등산대회에는 총1백 68개팀, 1천여 명 참가, 출발지인 정릉 청수장서 輔國門, 도선사에 이르는 전코스를 한팀의 낙오도 없이 누볐는데 영예의 종합우승은 국교과 2학년 A팀에게로 돌아갔다. …

이날 상오 9시 李瑄根총장을 비롯한 학처장과 교수 및 학생이 참가한 가운데 청수장에서 가진 개회식에서 이총장은 대회사를 통해『매년4월에 갖는 동국인 등산대회는 전 동국의 합창이다.』고 말하고 『한팀도 낙오없이 오늘의 행사가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게 노력해 달라』고 당부했다.

개회식이 끝난후 9시 10분부터 무역과 3년팀을 선두로 청수장을 출발, 질서정연하게 산행에 들어갔다. 동국 산악인들은 12시를 전후하여 군창지에 도착하여 오후 3시까지 점심을 마쳤는데, 점심시간 중에는 복장,장비,산상테스트 등의 점검이 있었다. 이어 각팀은 오후 3시부터 태고사지를 출발하여 용암문을 거쳐 이날 등산대회의 마지막 집결지인 도선사에 한팀의 낙오도 없이 도착, 용맹정진하는 동국인의 기상을 다시 한번 과시했다. 이날 선수들은 심사위원회 (위원장=이재창교수)의 심사가 진행되는 동안 장기자랑이 펼쳐져 산행의 피로를 풀기도 하였다. 오후 6시에는 1백 68개 팀이 모두 목적지에 도착, 예정대로 시상식을 거행했는데 이 자리에서 정윤식학생처장은 치사를 통해 이 행사는 전통적인 동국인의 행사라고 전제하고 이 등산대회를 통해 『선배들의 높은 뜻을 기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강평에서 이재창(불교대)교수는 『예년에 비해 규모는 커진반면 질적인 면에 있어서는 다소 떨어진 감이 있으나 참가팀 모두가 성실히 산행을 하여 주었다.』고 말했다. 수상한 23개팀은 다음과 같다.

■ 各部別 優秀賞

총장상=사대 국교과 2년 A팀

학도호국단장상=ROTC팀

동국산악회장상(교직원부)=대학원 교무과

동창회장상(동문부)=행정대학원 A팀.

■ 대대별우수상

인철과 1, 경영과 3 , 물리과 1, 정외과 1,

조경과 3, 전자공학과 2, 토목공학과 4-A,

체교과 1, 미술과 1

■ 장기상

교무처장상=국교 1

총무처장상=행정대학원

학생처장상=경행 3

기획실장상=KUSA

■ 모범상

사단장상=백상원 A팀

■ 자연보호상

대학원장상=2부 전산과1

경영대학원장상=교육방송국팀

행정대학원장상=동우회팀

■ 운행상

부사단장상=경영대학원 A팀, 교무과 여직원팀

1979년 4월 19일 (목요일)

뷘 북한산 누빈「協同· 團結 」의 健脚 - 4·19紀念 第10回 「東國人 登山大會」

뷘 2백餘 팀 友情의 山行 - 總長賞에 R·O·T·C팀

… 4·19의거 19주년을 기념하는 제10회 동국인 등산대회가 지난 18일 신록이 움트는 북한산 일대에서 열려 동국인의 힘찬 의지의 건각과 단합을 과시하는 가운데 무사히 막을 내렸다. 본교 학도호국단(단장=鄭在覺)에서 주최하고 동국산악회에서 후원한 이날 등산대회에는 총 2백 10개팀 1천여 명이 참가, 출발지인 정릉 청수장에서 보국문 태고사지, 용암문, 도선사에 이르는 전코스를 누볐는데 영예의 최우수상인 총장상은 R·O·T·C 화랑팀에게 돌아갔다. 한편 금년 제10회 대회부터는 주무 부처가 동국산악회에서 학도호국단으로 移管되었다.…

4월의 포근한 대자연속에서 거행된 이날 등산대회의 각팀은 오전 9시 30분부터 10시 30분까지 청수장 출발지점에 도착하는 순서대로 간단한 출발절차를 마친후 교육방송국팀을 선두로 질서정연하게 산행에 들어갔다. 동국산악인들은 보국문을 지나 12시를 전후하여 군창지에 도착하였는데 2시 20분까지 점심식사와 간단한 레크레이션이 진행되는 동안 복장, 장비 및 산상테스트 등의 점검이 있었다. 이어 각팀을 오후 2시 30분부터 태고사지를 출발하기 시작, 용암 문을 거쳐 마지막 집결지인 도선사에 무사히 도착했다. 4시 30분부터 심사위원의 심사가 진행되는 동안 장기자랑이 펼쳐져 마지막 여흥을 즐기기도 했다. 예정된 시상식에서 鄭在覺총장은 『東國人 등산대회는 4·19의거의 깨끗하고 정직하고 순수한 동기와 실천을 기리기 위해 마련됐다』고 전제하고 오늘에 되살려 동국발전에 초석으로 삼아 달라고 당부했다. 이어 이혜성스님(도선사주지)의 동국인을 환영하는 축사와 도창호(에베레스트 및 북국탐험 대원) 동문의 격려의 말이 있었다. 한편 심사위원장인 정종(불교대) 교수는 강평을 통해 『오늘 등산대회는 누가 이기고 지는 것 보다는 참가하고 협동하는데 의의가 있다』며 『이 점을 깊이 인식 어느 대회보다도 끝까지 질서정연하게 산행, 동국산악인의 단결과 협동 정신을 과시한데 대해 감사한다』고 했다. 또한 너무 많은 인원이 지원 서울대회 참가가 곤란해진 경주대학에서는 같은날 10시부터 5시까지 독자적인 등산대회를 경주 금오산에서 거행, 성황을 이뤘다. 이날 각부문 24개 수상팀과 장기상은 다음과 같다.

■ 최우수상(총장상)

ROTC 화랑팀

■ 각부별 우수상

교직원부=전산원팀

호국단부=전자공학과 1년 A팀

써클부=프로제트 동우회A팀

동문부=행정대학원 C팀

중립학원부=동대부고 A팀

■ 각부별 준우승

교직원부=2부대 교학과팀

써클부=교육방송국팀

동문부=경영대학원A팀,

불교과 1년팀, 국문과 2년팀,

행과 3년 A팀, 경제과 2년팀,

임학과 2년 A팀, 토목과 3년 B팀,

식공과 4년 B팀, 가정교육과 3년팀

ROTC 문무팀, 2부대 무역과팀

■ 각부별 자연보호상

교직원부=학생과팀

호국단부=식공과 1년팀

써 클 부=새마음회팀

동 문 부=경영대학원 B팀

■ 특별상(도선사 주지상)

법정대 교수팀

【사진=동국산악인의 「협동과 단결」을 과시한 4·19기념 제10회「동국인 등산대회」가 북한산 일대에서 펼쳐졌다.】

1980년 1월 1일 (화요일)

뷘 太古가 숨쉬는 “마나슬루” - 최성침

뷘 「쉘파」고용에 성공여부 달려 - 한국은 3차례의 실패·일본서 성공

히말라야! 이는 뭇 알피니스트들의 가슴을 설레게하는 말임에 틀림없다. 풀 한포기 생존하지 않는 황량한 세계, 수만톤의 눈사태가 끊임없이 떨어지는 영겁의 세계 히말라야, 그 8천m의 독특한 공기와 사파이어같이 빛나는 빙벽,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이상의 더 큰 매력은 없을 것이다. 세계의 지붕, 제3의 극지라고 불리우는 히말라야는 지구상의 7천m 이상의 모든 봉우리가 운집해 있는 만년설의 거대한 산맥으로 산사나이들의 궁극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다. 마나슬루는 히말라야의 8천m급 봉우리 14좌 가운데 8천 1백 56m로 여덟번째를 차지하는 거봉으로서 1953년, 1954년, 1956년 세차례에 걸친 일본대의 끈질긴 도전 끝에 1956년 5월 9일 인류 최초로 그 신비의 정상을 허용하고 말았다. 그후 많은 나라의 원정대에 의해 등정되었으며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의 철인 라인홀트 메스너도 그 남벽을 등반한 바 있다. 특히 마나슬루는 우리나라에서 세차례(1차 : 1971년, 2차 : 1972년, 3차 : 1973년)의 도전을 한 바 있으나 큰 희생을 치른 채 등정을 거부당한 산이기도 하다. 1차에는 김기섭대원이 조난 당했고, 2차에는 거대한 눈사태에 휩쓸려 우리나라대원 4명 일본인 1명, 현지인 셀파 10명 총 15명이 조난 당하는 히말라야 등반사상 1973년 독일의 낭가파르 원정대의 16명 조난에 다음가는 큰 조난이었다. 히말라야를 등반하기 위해서는 봄과 가을을 이용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겨울에는 극심한 추위와 폭설로 등반이 불가능하고 여름에는 인도양에서 불어오는 몬순 즉 계절풍의 영향으로 날씨가 악화되기 때문이다. 각각 프레몬순 포스트몬순이라고 하는 봄과 가을의 비교적 따뜻하고 맑은 날씨가 계속되는 기간중에만 등반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봄과 가을이라고 해서 우리나라의 봄과 가을을 생각해선 안되다. 히말라야에는 언제나 혹독한 추위와 폭설등 악천후와 눈사태의 위험을 안고 있다. 다만 여름과 겨울에 비해 볼 때 날씨가 좋다는 것이다. 히말라야의 거봉을 등반하는 원정대의 장비, 식량 등의 총 하중은 대개 4톤 이상이 된다. 빙하의 말단부이자 생물의 한계선인 만년설이 시작되는 베이스캠프까지 운반하기 위해서는 네팔의 현지인들을 포터로 고용하는데 대개 1백 50명 안팎이 된다. 마나슬루의 경우 카트만두에서 베이스캠프까지는 15~20일이 걸린다. 베이스캠프 까지의 긴 행렬을 마치 사막의대상들 같다하여 카라반이라 하는데 이 카라반 기간 중 등반대는 울창한 원시림을 지나기도하며 천길의 아슬아슬한 계곡을 건너기도 하며 티벳인들의 마을을 지나며 가끔 가다가는 등반대들이 죽치고 앉아 쉬는 포터들과 신경전을 해야하는 우리나라 시골의 성황당과도 같은 큰보리수 그늘의 「쪼다라」라는 휴게소(?)도 있다. 그리고는 빙하의 퇴석지대인 끝없는 모레인 위를 걸어야만 한다. 그 때 쯤이면 마나슬루의 웅자는 서서히 나타날 것이고 그 웅대하고 신비한 모습은 대원들을 넋을 잃게 할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베이스 캠프로 갈 때의 이 메마른 빙하의 대지는 등반을 마치고 돌아올 때면 이름 모를 꽃들이 피어나고 초록이 움트는 알프스의 초원으로 탈바꿈할 것이다. 우리가 카트만두에서 해야할 또 한가지 일은 실제적으로 등반을 도와줄 셀파를 고용하는 일이다. 그들은 대개의 대원들보다 고산경험이 많은 현지인으로서 말하자면 직업등산가라고 할 수있는데 이들을 어떻게 운용하는가는 성공의 중요한 요소중의 하나이다. 3,850m의 베이스캠프에서 8156m의 정상까지는 5~6개의 캠프를 설치하게 되는데 이를 극지법 또는-정공법이라 하여 캠프를 점진적으로 전진시키며 식량과 장비를 운반하여 최종캠프에서 정상을 공격하는 방법이다. 2월 하순에 카라반이 시작될 것이고 3월 중순부터는 본격적인 등반이 시작되며 순조로우면 4월 중순에 정상에 서게될 것이다. 히말라야 등반대의 가장 큰 적은 고산병과 눈사태이다. 고소로 올라감에 따라 기압이 낮아지며 그와 동시에 공기중의 산소도 적어져서 8,000m 지점에서 산소의 양은 평지의 약 3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 체내의 산소 공급량이 적어짐에 따라 호흡곤란, 두통, 식욕부진, 구토, 피로 등이 나타나며 심하면 목숨까지 잃게된다. 그래서 등반대원들은 충분한 고소순응을 하여야한다. 눈사태는 히말라야에서 가장 위험한 것으로 대부분의 조난이 눈사태에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등반의 기동성을 살리고 완전한 지형의 파악으로서 그 피해를 줄일 수 있다.

히말라야의 등반은 이러한 기술적인 요소 외에도 치밀한 계획 철저한 준비, 완벽한 팀웍 등이 필요하다. 아스라히 설원에 휩싸인 정상, 그 앞에 바늘같이 솟아오를 피나클, 그리고 오른쪽으로 길게 뻗어내린 능선, 그 파란 빙벽, 그리고는 뚝 떨어뜨려 노스 골을 이루고 다시 급준하게 솟구친 노스피크, 그 톱날같은 능선에서 뻗어내린 수림지대를 연상하는 세락(빙탑)의 숲. 파도치는 아이스폴(빙하의 설원)과 거대한 크레바스(빙하의 균열)는 커다란 입을 벌리고 잇다. 그러나 베이스캠프! 여기는 또 다른 알프스의 초원이 펼쳐져 있다.

【최성침. 문리대 국문과, 산악부장】

1980년 4월 1일 (화요일)

뷘 마나슬루에서 온 편지 - 임부회장님께

… 한국에서는 최초의 단일팀으로 魔의 정상 마나슬루를 정복하려는 본교 동국산악회는 지난 1월 22일 결단식을 가진데 이어 25일 선발대가 떠났고 2월15일 본대가 출발했다. 등반대 현지소식에 따르면 3월 7일부터 카라반을 시작한다고 하는데 본지에서는 현지에서 임신철 동국산악회 부회장에게 보내온 동정보고서신과 3월 6일자로 현지 신문「The Rising NEPAL」에 실린 「한국팀 마나슬루 등정시도」란 題下의 기사 全文을 싣는다.…

… 대원들 모두 건강하며 모든 준비에 차질없고 짐은 캘커타에서 카트만두에 잘 도착하여 모든팩킹은 완료했으며 교포들의 따뜻한 협조로 한국음식을 먹고 있습니다. 날씨만 좋으면 성공률 백%입니다.

그간 자세한 소식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대원들 모두 건강하며 모든 준비 차질없고 내일아침 카라반 시작할 예정입니다. 그간 준비사항을 아래와 같이 간단히 보고합니다. ①산소준비 완료 ②짐은 캘커타에서 카트만두(네팔)에 잘 도착하여 모든 팩킹 완료 ③셀파(현지보조 등반인) 및 로칼포타(베이스캠프 이후 짐꾼)의 보험가입 ④교포들의 따뜻한 협조로 한국음식을 먹고있음 ⑤계획대로 카라반 예정이며 포타(베이스캠프 까지의 짐꾼)은 약 1백 50명 짐은 약 4톤 반입 ⑥ 7일 카라반 시작, 11일후 베이스캠프에 도착예정 ⑦모자라는 장비는 이곳에서 약 1백 20% 완료 ⑧사다(쉘파대장) 및 셀파, 로칼포타는 12명, 쿡 1명, 키친보이 2명, 우편런너 2명이 있으며 베이스캠프 주변의 사마마을에서 등산포타를 약 5명 사용예정 ⑨그간 AP통신, UPI통신, 로이터 통신, 네팔통신과 인터뷰 했음 ⑩숙식은 주택을 전세내어 사용하고 있음. 다음 소식은 베이스캠프에서 보내드리겠음. 날씨만 좋으면 성공률 1백% 모두가 최선을 다하고 있음. 1980. 3. 6. 밤 이인정드림

… 지난 72년 눈사태로 큰 희생을 보았던 8156m의 마나슬루봉 정상에 도달하려고 시도하는 한국의 동국대학교 산악회는 3월 7일 트리폴리로 떠나 정상공격을 두차례에 걸쳐 시도할 것이다.…

카트만두에서 3월 5일 RSS통신 보도. 8156m의 마나슬루봉 정상에 도달하려고 시도하는 한국의 동국대학교 산악회는 지난 72년 눈사태로 2번째로 큰 희생을 보았던 제3 캠프에서 주의를 해야할 것 같다. 지난 10년동안 한국은 3차례나 마나슬루 등정을 시도하였으나 실패로 끝났다. 그것은 71년. 72년, 76년의 일이었다. 이번 등반대는 35세의 이인정대장 등 7명으로서 RSS통신에게 4월 20일까지 마나스루봉을 정복하겠다고 밝혔다. 등반대는 3월 7일 트리폴리로 떠날 예정이며, 정상공격을 2차례에 걸쳐 시도할 것이고 공격대원에 네팔인도 포함된다고 했다. 한편 등반대는 72년 15명의 한국 등반대원이 이 魔의 산에서 생명을 잃은 것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본 등반대는 동국대학교 상부토건과 고려개발주식회사에서 공동으로 후원한다고 알려졌으며 모든 대원은25세부터 35세까지의 동국대학교 졸업생(재학생 1명 포함)들이다.

1980년 4월 1일 (화요일)

뷘 산악회 마나슬루 등반-기후에 성공여부 달려

동국산악회(회장=김용호 국회의원 54史學)의 마나슬루 등반대(대장=이인정 74무역)가 지난달 6일, 12일자로 동국산악회에 보내온 편지 소식에 따르면 등반대는 지난달 7일부터 카라반(베이스캠프까지의 행군)을 시작하였으며 19일 에 베이스캠프에 도착할 것이며 27일에 제2캠프까지 전진할 것이라고 알려왔다. 이러한 소식은 지난달 26일 동국산악회 임신철부회장에게 띄운 등정보고와 鄭在覺 총장에게 띄운 우편엽서를 통해 알려졌으며 우송물에는 「The Rising Ivepal」현지 신문에 3월 6일자로 게재된 「한국팀 마나슬루 등정시도」란 제하의 기사도 동봉하였다. 이와함께 다음 소식은 베이스캠프에서 보낼 예정이고 모두 최선을 다하며 날씨만 좋으면 성공이라고 알려왔다. 한편 동국산악회 김회장은 본교 및 각 기업체에서 보조해준 1천 2백만원을 지참하고 지난달 18일 네팔로 출발하였으며 헬기편으로 베이스켐프에 도착하면 야크(현지소)를 잡아 회식을 베풀것으로 알려졌다.

1980년 4월 8일 (화요일)

뷘 마나슬루 등반대 마침내 정상공략 시작

세계 7위의 히말라야산맥 마나슬루에 도전하고있는 동국산악회(회장=김용호,54사학)의 마나슬루등반대(대장=이인정 74무역)는 지난 2일(목) 5650m지점에 제 2텐트를 설치하는 등 지난7일(월) 전진캠프 설치를 모두 끝내고 마침내 정상공략을 시작했다. 이어 2개조로 구성된 공격조가 북벽을 통해 마나슬루 정상등반을 시도한다.

【카트만두=로이터 합동】

1980년 5월 6일 (화요일)

뷘 東國, 마나슬루 頂上에 서다! - 東國산악회 韓國 최초로 登頂, 세계 5번째

뷘 피맺힌 魔의 雪峰에 태극기 - 3차례 挑戰실패…16명희생 - 徐東煥군 征服 悲願 이뤄

… 恨맺힌 「마나슬루」를 동국산악회(회장=김용호 54사학)가 정복했다. 「히말라야」산맥의「마나슬루」(해발 8,156m)에 도전 지난달 28일 세계에서 5번째로 「마나슬루」정상 정복에 성공했다고 「네팔」관광성이 4일(일) 발표했다. 7명의 본교 졸업생, 재학생으로 구성된 『80한국「마나슬루」등반대』는 지난달 18일 1차 공격에 실패한 뒤 동북을 통해 재도전 10시간의 고투 끝에 28일 하오 정상에 도달했다고 「네팔」관광성이 전했다.…

한국 등반사상 4번째로「히말라야」산맥의 「마나슬루」봉에 도전 3차에 걸친 통한을 본교의 「80한국 마나슬루 등반대」가 후련히 씻어주었다. 지난달 18일, 해발 7천 8백m 지점에 마지막 전진 캠프(CV)를 설치한 뒤 서동환(공경2)대원의 1차 정상공격이 있었으나 급격한 기상조건의 악화로 인해 실패했다. 그후 20일 재차 정상공략을 할 계획이었으나 계속되는 악천후로 캠프에서 머물러야 했다. 이어 팀의 재정비가 있은후 8일 늦어진 지난 달 28, 서동환대원은 네팔인 셀파 2명과 2차시도, 지난 71년, 72년, 76년 한국의「마나슬루」등반대가 도전, 모두 실패한 동복면코스를 택해 10시간동안의 악전고투 끝에 28일 하오 정상에 도달 태극기와 동국산악회기를 꽂고 20분동안 촬영 및 정상의 기쁨을 만끽한 뒤 하산했다. 한편, 이 소식을 전해들은 鄭在覺총장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동국산악회가「마나슬루」봉을 정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만 기쁠뿐』이라며 『오늘의 영광은 10여년에 걸친 동국인 등산대회의 결과라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대원이 도착하는 날 성대한 환영식을 가질것도 밝혔다. 본교 산악회의 마나슬루 등정에 대하여 한국산악회 회장이며 시인인 이은상선생은 『한국이 3번이나 실패한 「마나슬루」에 다시 한국인이 도전하여 기어코 정복한 집념을 무엇보다 높이 사야 할 일』이라 말하고 『이번 동국산악회에서는 악천후 때문에 일차 실패한 뒤 사기가 떨어졌을텐데도 불구하고 다시 사기를 높여 재도전하여 등정한 것은 동국산악인은 물론 한국 산악인 전체의 불구의 기개를 실현한 자랑스러운 일이다』라고 극찬하였고 『과거 에베레스트 등정보다도 더 의의가 큰 이번의 정복은 한국 산악인들의 총아 노릇을 하고 있는 동국산악회의 장거로서, 한국산악회 전체의 이름으로 축하할일』이라고 말했다.

… 마나슬루 … 해발 8천 156m의 거봉으로 「히말라야」山群중 7번째로 높은 산이며, 다른 어느산보다 눈사태가 심한 산으로 그 동정이 어려운 것으로 꼽히고 있다. 「셀파」족들은 이산을「성스러운 영혼의산」으로 부르며 풍작을 기원하는 산이기도 하다. 「마나슬루」는 네팔」 「히말라야」의 중간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에베레스트」의 서쪽에서 인근의 「안나푸르나」 「다루라기리」 「히말출리」 「마차부차레」봉 등과 함께 거대한 산군을 이루고 있다. 이번 등정으로 한국은 일본 서독 스페인 이란에 이어 5번째 마나슬루를 정복한 국가가 되었다.

【사진=세계에서 5번째로 동국산악회가 정복한 “영혼의 어깨” 마나슬루.】

1980년 5월 6일 (화요일)

뷘 마나슬루 登頂의 意義 - 김장호

뷘 단일 산악회로는 初有의 快擧 - 韓國 알피니즘 成長의 척도 돼

동국산악회는 4월 28일 오후 1시 30분 고도 8156m의 마나슬루 정상에 태극기를 꽂았다. 이것은 세계에 14개 밖에 없는 8천급 이상의 고도에 태극기가 휘날린 2번째의 일이다. 첫번째는 1977년의 에베레스트요 이번이 그 두번째가 되지만, 그나마 단위 산악회로서는 초유의 일이다. 한국대의 해외원정 기록으로 말하면, 에베레스트 이외에도 안나푸르나 Ⅳ봉(7천 5백 25m)과 북미주의 매킨리(6천 178m)를 등정한 것이 있으나, 이 둘 모두 8천에 못미치고, 또 에베레스트와 안나푸르나 Ⅳ봉의 대원구성이 각기 대한산악연맹과 한국산악회의 복합체였음에 비하여, 고령산악회와 고려대의 매킨리와 이번의 마나슬루만이 단일 팀이었으니, 결국 그들 매킨리의 두단일 팀에 비하며, 거의 2천 고도를 이번 마나슬루대가 더 밀어올린 셈이다. 그러나 그런 기록면보다 이 마나슬루대가 더욱 우리들 가슴을 후련하게 해준 것은 무어니 하더라도, 71, 72, 76년의 세차례에 걸친 실패를 깨끗이 설욕한 데 있다. 1차대에 김기섭대원이 7천 2백 지점에서 전락사하고, 2차대에서는 6천 5백 지점에서 세계 등반사상 두번째로 큰 조난사고로 손꼽히는 15명 희생(눈사태 매몰)을 바쳤으며,또 3차대는 그나마 대원간의 갈등으로 팀이 무너짐으로써 한 번도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을, 동국산악회가 단번에 히말라야에서의 한국의 명예를 회복한 것이다. 단일 팀의 강점은 앞에 말한 매킨리의 사례 이외에도 유럽 알프스의 아이거 북벽을 해낸 악우회의 경우에서도 볼수 있거니와 그것은 특히 공고한 팀웍에 의한 전력의 집중에 있고 또, 자금과 준비과정에 부담을 덜어주는 점에 있다. 그것은 같은 마나슬루의 경우 72년의 오스트리아대에서도 볼 수 있거니와 그들은 모든 경비를 자체에서 부담하고 팀도 아주 압축하여 이른바 컴팩트 시스템으로 짜서, 소수 정예주의를 표방함으로써 히말라야 도처에 눈부신 기록들을 수립하고 있다. 이런 세계적 추세로 미루어 말할 수 있는 이번 마나슬루대의 성공은 한마디로 한국 알피니즘도 그만큼은 자랐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단위대로서도 능히 8천을 해낼 수 있었다는 점이다. 에베레스트 이후 자신감을 회복하고 있는 한국 알피니즘에 기여한 바는 이점이다. 마나슬루는 산스크리트로 Manasa 즉 영혼에, Inng 즉 땅을 줄인 말이니 바로 영혼의 땅이다. 인도 측량국에서는 피크 30, 티베트어로는 Kritang-즉 청정한 처소요. 또 산기슭 사마 주민들은 Kang Bungen 즉 눈의 어깨라는 뜻으로도 부른다.

49년 네팔 정부가 네팔 히말라야 일대의 고봉들을 전후 처음 개방(중공과의 국경분쟁으로 입산을 금지했었다.)함으로써, 50년의 영국 쉽튼대의 대원 헤롤드 틸번이 마르산디 계곡을 거슬려 그 산 아래를 정찰한 뒤 처음에는 네팔 사람들도 그 산 이름마저 모르는 판에, 산록 주민들의 방해로 산기슭까지도 못 들어가며 애태운 끝에 일본대가 56년에 초등한 마나슬루도 이제야 한국대에 그 품을 열어젖힌 것이다. 일본대도 애초에는 켜또대학 학사산악회가 계획했다가 나중에 일본산악회에서 이 일을 떼어맡아 4년만에 성공했던 것으로 미루어 생각하면 단일 팀으로써 8천 고도를 오른다는 것이 그리쉬운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국내 대학 산악부 중에서도 가장 연륜이 오래이고 또 그만큼 실력이 반반했던 동국산악회가 8천 미터 고봉 중에서도 유독 영혼의 어깨를 골라 올라선 것을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김장호 사범대교수·현대문학】

1980년 9월 16일 (화요일)

뷘 「영혼의 어깨」에 심은 東國의 얼 - 마나슬루 등반 지상 사진전

… 동국산악인의 끈질긴 집념과 의지가 마침내 「영혼의 어깨」마나슬루에 태극기를 휘날리게 하였다. 71년 이후 한국 등반대에 3번씩이나 좌절을 맛보게한 마나슬루가 동국인에 의해 신비의 베일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동국 74년사에 길이 빛날 동국정신의 結晶이며 한국등반사에 영원히 기록된 壯擧를 기리고자 지상 사진전을 꾸며 본다. …

♠ 정상! : 이제 더 올라갈 곳이없다. 자랑스레 휘날리는 태극기가 승리를 축하하는 듯하다.

♠ 개선! : 지난 5월 18일 항공편으로 김포공항에 도착, 김포-본교 교정간을 카퍼레이드로 개선하는 등반대원들

♠ 정상을 향하여 : 마나슬루 정복이 눈앞에 다가왔다. 정상을 향한 「산사나이」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 대설원을 헤치며 : 무릎이 빠지는 대설원의 언덕. 아직 갈 길이 멀다. 휘몰아치는 눈보라와 산사태보다 더욱 「산사나이」들을 엄습하는 것은 적막, 그것이었다.

♠ 베이스 캠프 주변의 사마 마을에 도착하는 대원과 셀파들.

♠ 마나슬루 주위의 7천m급 고봉들의 모습.

♠ C2 주변의 설벽들. 산사태 위험이 따르는 등반! 우뚝 솟은 설벽이 아름답기까지 하다.

【사진=오른쪽 위 정상 등정 사진부터 시계방향으로】

1980년 11월 11일 (화요일)

뷘 써클순례 <11> - 동국산악회

뷘 국내최초로 북알프스 등반시도 - 제1회 동국인 등산대회 주최해

더 높은 곳을 향하는 집념의 숭고한 이념속에 순수한 알피니즘의 추구를 이상으로 1957년 4월 발족, 성장한 동국산악회는 올해로 26期를 맞이하게 되는 전통있는 써클이다. 산을 연구하여 대학생활의 보람을 찾기 위해 오직 한가닥 로프에 의지해 험준한 암벽을 오르는 이들에겐 산을 정복하겠다는 의지와 젊음의 용기뿐이다. 이들은 매주 서울근교에서 실시하는 산행은 물론 월례산행을 비롯, 연 4회 춘하추동 계절별로 30~40일간의 일정으로 실시되는 정기 장기훈련등반을 통해 암벽등반 및 설산 등반기술을 익히고 있으며, 1년간 1백일 이상 실시되는 산행에서는 특히 선후배간의 정을 통한 팀웍 배양에 힘쓰고 있다. 대학산악부로서 초창기에 설립된 본교 산악회는 활동면에서도 선두대열이다. 1964년에는 국내에서 최초로 일본 북알프스 원정을 등반을 시도했으며 1970년에는 4·19기념 제1회 동국인 등산대회를 주최하여 올해로 11회를 맞이하고 있다. 특히 지난 4월 28일 OB팀과 합동 등정한 <한국「마나슬루」등반대>의 마나슬루봉(해발 8156m)에 도전 정상 정복에 성공했던 것은 과시할만 하다. 선후배의 유대관계에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는 만큼 졸업생들로 구성된 산악회가 1968년 발족되어 재학생과의 긴밀한 관계를 지속하고 있는데 이 OB팀의 주체로 매년 동국산악제를 개최하기도 한다. 앞으로 남은 동계 등반훈련을 1월초에 30일간의 일정으로 설악산에서 가질 예정아래 엄격한 훈련에 매진하고 있는 同會는 산에서 산을 추구하려는 모든 동국인들에게 개방되어 의지와 용기를 십분 발휘할 수 있게 하고 있다. (회장=정광진·국문3) <星>

【사진=同會員들은 산을 연구하며 대자연속에서 진실한 자아를 발견하고자 노력한다.】

1981년 4월 21일 (화요일)

뷘 제12회 「동국인 등산대회」盛了 - 산행통해 공동체 의식 공감

뷘 3백 51팀 2천여 명 參加 - 이사장賞 電氣工 3년팀 차지 - 도선사서 장기자랑 순서도 가져

제12회 동국인 등산대회가 지난 17일 학도호국단(총학생장=노주혁 農生4)주최. 동국산악회 후원으로 총 3백 51팀, 2천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오전 9시 10분 「이학계열 1년팀」을 선두로 시작된 이번 대회의 행군 코스는 「정릉 청수장 → 보국문 → 태고사지 → 용암문 → 도선사」이었으며, 많은 참가팀들이 치열한 경합을 벌인 결과 최고 영예인 학원이사장상과 총장상은 「전기공학과 3년팀」과 「R·O·T·C B팀」에게 각각 톨아갔다.

한편, 참가팀 모두가 등행을 마친 뒤에는 도선사 주차장에서 심사위원들의 채점이 있는 동안 각팀들의 장기자랑 순서가 있었는데 이 순서에서는 줄곧 참가팀들과 함께 행군을 감행한 鄭在覺총장이 「학도가」를 불러 많은 박수갈채를 받기도 했다. 삼귀의례로 시작된 폐회식에서는 전년도우승팀인 「동우회」가 우승기를 반납하였으며, 이어 대회장인 정총장은 치사에서 『많은 인원이 참가하여 무사히 대회를 마칠수 있도록 힘쓴 학도호국단과 동국산악회를 비롯한 진행위원들의 노고에 감사한다』고 말하고, 『전 동국인들의 협동정신과 동국가족이라는 운명공동체를 공감할 수 있다는 의의를 가지고 있는 이 대회는 부처님의 뜻과 통하며, 본교의 建學理念과도 일치한다』고 하였으며 『내년에는 보다 질서정연한 대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곧바로 이어진 순서로는 장기자랑에 대한 시상이 있었으며, 대회 심관위원장인 김장호(기초과정부장)교수의 심사강평과성적발표 및 시상식을 끝으로 이날의 모든 일정을 마쳤다. 한편 이번 대회의 주요 입상팀들은 다음과 같다.

■ 최우수상

동국학원 이사장상=전기공학과 3년팀

총장상=ROTC B팀

■ 특별상

전자공학과 A팀

■ 우수상

사회개발3-A팀(재학생부), 교육대학원팀(동문부)

유스호스텔(서울부), 도서관팀(직원부)

전산원 4번팀(종립학원부)

【사진=제12회 「동국인 등산대회」가 2천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북한산 일원에서 있었다.】

1982년 1월 1일 (금요일)

뷘 타올라 빛나거라, 동국의 魂 - 眞理를 수호하는 젊음들이 모여…

【사진=수많은 韓國 山사나이들을 유혹했던 巨峰 마나슬루가 마침내 동국인에 의해 그 太古의 裸像을 드러낸지 이제 1년이 되었다. 용맹과 정진으로 기어이 마나슬루를 무릎 꿇리고만 동국의 산사나이가 오직 자랑스럽기만 할 따름이다. 仁者는 樂山이요, 知者는 樂水라 하더니 이재웅동문의 태평양횡단과 동국산악회의 마나슬루 정복으로 仁者요, 知者임을 드러낸 동국이 아닌가… 안으로는 實을 다지고 밖으로는 正氣를 발산할진대 저기 동국인의 발아래 놓여진 마나슬루도 숨소리 마저 죽인 듯 하다.】

1982년 3월 30일 (화요일)

뷘 大學閑話-마나슬루 뒷 얘기 - 오국근

재작년 4월 어느날 나는 뉴델리에서 학교로부터 전보를 받았다. 원래 전보(특히 국제전보)가 다 그렇듯이 무슨 암호 비슷한 글을 몇번이고 뜯어 읽어 본 끝에 「우리학교 산악부가 마나슬루 등반에 떠났으니 그들이 등반에 성공하여 하산하면 카트만두에 가서 마중하라」는 내용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모든 준비를 갖추고 다음소식을 기다리고 있는데 어언 한달의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 5월 2일인가 인도신문에 AP통신으로 「동대 산악부가 마나슬루 등정에 성공」이라는 짤막한 기사가 났다. 그 한에 맺힌 마나슬루에 드디어 등반했구나. 세계에서도 가장 어렵다는 산(높이야 에베레스트보다 좀 못하지만)을 한 대학팀이 오르고 말았으니 세계적인 기사꺼리가 아닐 수 없다. 다시 한 열흘 지나자 학교에서 카트만두로 출발하라는 두 번째 전보가 왔다. 까다롭기 짝이없는 인도의 출국 및 재입국 수속을 얼른 마치고 바로 네팔항공으로 카트만두로 날았다. 손에 잡힐 듯이 줄을 이어있는 히말라야의 連峰들. 그중 하나인 마나슬루에 동국의 깃발이 나부꼈다니 생각만해도 가슴이 벅차 올랐다. 카트만두에 내려 우리 대사관에 들렀더니 온통 축제기분이었고 그곳에 와있는 삼부토건, 고려개발의 여러분들, 기타 교포들이 모두 모여 여러차례 잔치를 베풀어주었다. 마나슬루등반은 우리 동대만의 영광이 아닌 겨레의 기쁨이요 자랑이었다. 머리와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라 그야말고 「산놈」들인 등반대원들, 서울에서 달려오신 S스님, 동창회 C회장님, 산악회선배 J사장 등 모두가 반가운 분들이었다. 네팔 최고의 쏠티호텔에서 베풀어진 교포들의 축하 연회장 입구에 붙여진「마나슬루가 높다 하되 東大 발아래 뫼이로다」의 플래카드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을때의 감격을 잊을 수 없다. 일곱명의 「산놈」들과 손바닥만한 카트만두 거리를 누비고 다니기도 하고 숙소인 안나푸르나 호텔의 풀에서 모두 수영을 하면서 「야, 해발 1,400m의 고도에서 헤엄을 치니까 신이 나는구나」하면서 물장구를 치기도 하였다. 꿈같은, 그리고 한없이 바빴던 이틀이 곧 지나고 등반대원들이 서울로 떠나는 아침이 되었다. 대사를 비롯한 대사관 전직원, 많은 교포들이 비행장까지 전송을 나왔고 대원들과 고락을 같이했던 셀파들은 가족까지 다 나와서 이별을 아쉬워 하는 것이었다. 만리 타국에서 오랜만에 많은 가족(동국인)을 한꺼번에 만나서 큰 기쁨과 반가움을 나누었다가 금방 다시 모두와 헤어져야하는 허전함과 서운함을 달랠 길이 없었다. 멀리 사라지는 비행기에다 오랫동안 손을 흔들다가 이백여리 떨어진 삼부토건의 발전소 건설공사 현장에 가서 묵으면서 대원들의 무사귀국을 빌었다. 대원들의 서울 도착이 5월 16일, 5월 17일의 서울 뉴스를 나는 네팔의 이름없는 골짜기에서 단파 라디오로 들었다.

<오국근 문리대교수·미국소설>

1982년 4월 6일 (화요일)

뷘 東國人 등산대회 - 오는 16일 北韓山 일원서 실시

제13회 동국인 등산대회가 오는 16일 오전 9시 북한산성 일원에서 실시될 예정이다. 세검정 파크호텔에서 출발 일선사, 대성문, 군창지, 북한산성, 구파발까지 등반할 예정인 이번 등산대회에 참가코자 하는 학생은 오는 15일까지 팀(1팀 4명, 리더 1명 대원 3명)을 구성, 참가신청서를 학생회관 앞 캠프에 제출하면 된다. 한편 이번대회에 참가할 팀의 리더회의가 오는 15일 오후 3시 교수 세미나실에서 실시 등산대회 세부사항을 토론할 예정이다.

1982년 4월 13일 (화요일)

뷘 登山大會 일정 발표 - 本校 16日, 慶州大 각각 擧行

4·19기념 제13회 동국인 등산대회 일정 및 코스가 확정 발표되었다. 黃壽永총장을 비롯한 학처장 및 재학생이 참가할 이번 등산대회는 오는 16일 북한산 일원에서 실시되며 코스는 세검정 북악파크 호텔 건너편에서 출발 대성문 군창지 도선사까지며 출발은 당일 오전 9시 30분부터 도착 순서대로 출발, 오후 5시에 도선사에 도착할 예정이며 오전 10시 30분까지 출발지에 도착치 못한 팀은 기권으로 간주한다. 한편 이번 등산대회에서는 본교와 자매교인 E·W대가 주는 특별상부문을 비롯, 여학생부 고교동문부를 신설했으며 산불방지를 위해 10명으로 구성된 방화반이 등정기간 중 활약할 예정이며 오후 5시에 폐회식 및 장기자랑이 있게 된다. 또한 경주대학 학도호국단에서 주최하는 「제3회 경주 동국인 등산대회」가 오는 23일 경주 남산일원에서 실시될 예정이다. 2백 50여팀 1천여 명의 학생들이 참가할 것으로 보이는 이번 등산대회의 자세한 일정은 23일 오전 9시 남산 소재 용장3리를 출발하여 백운암, 용장계곡, 상선암을 각각 거쳐 삼능에 도착하게 되며 중식은 용장계곡에서, 도착지점인 삼능에서는 장기자랑과 폐회식이 개회될 계획이다.

한편 이번 대회의 참가 범위는 교직원, 동문부, 재학생부, 서클부, 기숙사부 등 4개 부문으로 정해졌으며 각 부문별 참가신청은 14일부터 22일까지 인문사회학관 중정에 설치될 특설 캠프에서 접수하게 된다. 또한 22일 오후 3시에는 리더회의를, 14일과 21에는 2, 3차 관계자회의를 각각 가질 것으로 알려졌으며, 시상내역은 최우수상 1팀, 특별상 1팀 등 8개 부문에 17개 팀에 대해 있을 예정이다.

1982년 4월 27일(화요일)

뷘 동국 의지 다진 산행 - 지난 16일 북한산 일원서 실시

뷘 4백 70여 팀 2천여 명 참가 - 총장상은「통계과 3년 B팀」차지 - 도선사서 장기자랑 순서도 가져

… 제13회 동국인 등산대회가 지난 16일 학도호국단 주최 동국산악회 후원으로 총 472팀, 약 2천명이 참가한 가운데 북한산 일원에서 성황리에 실시되었다. 오전 9시 30분부터 시작한 이번 대회의 등정코스는 「북악파크 호텔 → 대동문 → 군창지 → 도선사」 이었으며 많은 참가팀이 치열한 경합을 벌인 결과 최고상인 총장상과 종립학원부 이사장상은 「통계과 3학년 B팀」과 「동대부고 B팀」에 각각 돌아갔다. …

한편 참가팀 모두가 등산을 마친 후에는 도선사 주차장에서 심사위원들의 채점이 있는 동안 각팀들의 장기자랑을 실시하는 등 등산에서 오는 피로를 풀기도 했는데 장기자랑 1등 상에는 연영과이윤덕양 외 1명이 차지했다. 삼규의례로 시작된 이날 폐회식에서 대회장인 황수영총장은『많은 인원이 참가하여 무사히 대회를 마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 진행위원 및 기타 관계자에게 감사한다』고 말하며『전동국인이 협동정신과 동국가족이라는 운명공동체를 공감할 수 있는 이 대회는 부처님의 뜻과도 통하며 본교의 건학이념에도 일치한다』며 『내년에는 보다 나은 대회가 되도록 서로 노력하자』고 말했다. 곧이어 학생생활과 황영수과장의 성적발표 및 시상식을 끝으로 등산대회의 모든 일정을 마쳤는데 이번 대회에서도 예년과 같이 산행중 일부 학생들이 음주하는 예 등이 있어 등산대회 진행상의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이번 대회의 주요 입상팀은 다음과 같다.

■ 최우수상

통계과 3년 B팀(재학생부, 총장상)

동대부고 B팀(종립학원부, 이사장상)

■ 특별상

ROTC A팀(EWU총장상)

수중탐험 A팀

■ 우수상

공업경영과 3년 A팀(재학생부)

동국서도회(서클부)

중앙고 동문회(고교 동문부)

가교과 3년 B팀(여학생부)

관제과 A팀(교직원부)

행정대 총학생회(동문부)

전산원 C팀(종립학원부)

한편 「제3회 경주 동국인 등산대회」가 지난 23일 하룻동안 신종순학장을 비롯한 학생, 교직원, 동문 등 1백 8개팀 4백 5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경주 남산일원에서 실시되었다. 중간고사에 임박한 시기적 사정으로 인해 예년에 비해 학생들의 참가율이 매우 저조했던 이번 등반대회에서 대회장인 신학장은 대회사를 통해 『목적지에 이르기까지의 의지와 협동으로 어려움을 극복하고 절망하지 않는 강인한 정신력을 배워야할 것』이라고 말했는데, 자세한 대회진행 일정을 보면 집결지인 월성군 내남면 소재 용장 3리에서 오전 9시에 출발하여 11시 20분 용장계곡 입구에 마련된 중식지에서 점심시간을 가진 후 다시 용장사지와 상선암을 거쳐 오후 4시에 삼릉에 도착함으로서 약 7시간에 걸친 산행일정을 모두 마쳤으며, 도착지점인 삼릉에서는 약 1시간동안 장기자랑과 시상식이 거행되기도 했다. 장기자랑에 이어 거행된 시상식에서는 여학생들로 구성된 미나(수학교육 2)팀이 총장상인 최우수상을, 사루비아(중문 3)팀, RCY C팀,시설과 A팀, 금장학사 H팀이 각부문별 우수상을 차지했으며, 대회 마지막에 거행된 장기자랑에서는 김휘경(경영 2)군과 전제완(국사2)군이 대상과 금상을 각각 수상했다.

1983년 4월 5일 (화요일)

뷘 동국인 등산대회 - 4·19 기념, 18일 북한산서

제14회 「동국인 등산대회」가 학생처 주최로 오는 18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북한산 일원에서 실시된다. 이번 등산대회는 4·19를 기념 전동국인의 체위향상과 교직원 학생간의 대화를 통한 면학증진과 건전한 의식 및 협동정신을 함양하기 위해 열리게 되는데 세검정을 출발 문수사, 대남문, 군창지, 진관사 북한산국민학교까지 등반할 예정이다. 등산대회 참가범위는 재학생 서클회원, 동문, 대학원생, 종립학원 관계자, 교직원 등이며 15일 12시까지 팀 4명(리더 1명, 대원 3명)을 구성, 참가신청서를 학생회관 앞 산악부 캠프에 제출하면 된다. 한편 이번 대회에 참가할 팀의 리더회의가 15일 교수 세미나실에서 실시, 등산대회 세부사항을 토론할 예정이다.

1983년 4월 12일 (화요일)

뷘 동국인 등산대회 코스 확정 - 4명 한조 18일 9시 구기터널 출발

4·19 기념 제14회 동국인 등산대회 일정 및 코스가 확정 발표되었다. 전동국인의 체위향상과 교직원간의 대화를 통해 협동정신을 앙양하기 위해 북한산 일대에서 실시되는 이번 등산대회는 4명이 한팀을 구성하여 18일 오전 9시 10초 간격으로 구기터널(세검정)을 출발 문수사 대남문 군창지 비석 중성문 대서문을 거쳐 오후 5시 북한산 국민학교에 이르는 총 10여km를 등반하는 이번 코스는 1일 행로로서 필수적인 조건과 역사적으로 유서 깊은 곳이기에 코스로 정한 것이다. 먼저 9시~12시 10분까지는 문수사를 거쳐 군창지(중흥사지)에 도착하며 문수사는 고려 예종 4년에 탄연이 창건, 북한산성 남쪽 대남문밖에 위치하고 있다. 또한 북한산성안에서 136간의 가장 큰 규모를 갖고있는 군창지는 성내의 승병을 지휘함은 물론 전국의 승병을 총지휘하였으며 태고사에서5분 정도의 거리에 있으며 지금은 그 터에 주춧돌만이 남아있다. 또한 11시 30분부터 군창지에서 점심식사 태고사지, 중성문, 대서문을 거쳐 오후 5시 마지막 기착점인 북한산 국민학교에 이르게 되며 군창지 동남쪽 태고대 위에 있는 태고사는 고려말의 고승 보우대사가 스스로 大古라고 호를지어 불렀고 근년에 일부가 재건되었으며 20리 길이의 성 둘레에는 요소에 성문이 열넷이나 있었고 동장대, 남장대, 북한대의 3장대가 있었는데 성문 중 현존하는 것으로는 이 산성의 정문인 대서문을 비롯하여 대남문, 대성문, 대동문, 중성문, 보국문, 용암문 등이다. 특히 대남문사이에 있는 보현봉은 북한산에서 4번째인 것으로 웅장한 기상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오후 5시 10분에는 장기자랑 및 6시에는 폐회식과 더불어 해산한다.

1983년 4월 19일(화요일)

뷘 동국인 호연지기 다져 - 14회 동국인 등산대회 - 18일 북한산 일원서

뷘 총 4백 85개팀, 2천여 명 참가해 - 경주대는 15일 남산일원서 실시

… 4·19기념 「제14회 동국인 등산대회」가 지난 18일 오전 9시 20분부터 총 4백 85개팀, 약 2천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북한산성 일원에서 실시되었다. 이번 대회의 등정코스는 <세검정 → 대남문 → 군창지 → 북한산 국민학교> 이었으며, 많은 참가팀이 열띤 경합을 벌인 끝에 최고상인 총장상과 종립학원 이사장상은 <ROTC 2년차팀>과 <수학과 B팀>에게 각각 돌아갔다. …

삼귀의례, 우승기반납, 대학원장 대회사,동창회장 축사,심사강평,시상순으로 진행된 폐회식에서이동림 대학원장은 대회사를 통해 『산행은 거룩하며, 忍者가 산을 좋아한다.』면서 『교직원, 재학생을 비롯 동문까지 한마음이 되어 전동국인의 의지를 보여준 것이 기쁘다』고 말했다. 한편 참가팀 모두가 등산을 마친 후에는 북한산 국민학교 운동장에서 심사위원들의 채점이 있는 동안 장기자랑을 실시, 등산에서 오는 피로를 풀기도 했는데 장기자랑 1등은 조충미(교육학과 3)외 2명이 차지했다. 곧이어 시상식을 끝으로 등산대회의 모든 일정을 마쳤는데, 예년과 같이 산행 중 일부 학생들이 음주하는 예 등이 있어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이번 대회의 주요 입상팀은 다음과 같다.

■ 최우수상

ROTC 2년차팀(재학생부, 총장상)

수학과 B팀(재학생부, 이사장상)

■ 우수상

통계 A팀(재학생부), 행정대학원 C팀(동문부)

ROTC 1년차팀(써클부)유스호스텔

여학생팀(여학부), 동대부고 A팀(종립학원부)

도서관팀(교직원부)

■ 자연보호상

국민윤리학과 I팀(재학생부),

법정대 교수팀(교직원부)

전산원 C팀(종립학원부)

안양학우 A팀(동문부)

■ 동국산악회장상

불교학생회 E팀(써클부)

…경주대…

4·19기념「제4회 경주 동국인 등산대회」가 지난 15일 김인제학장을 비롯한 교직원, 동문, 학생 등 1천 5백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경주 남산일원에서 실시되었다. 이번 등반대회는 총 2백 50여팀이 참가하여 경합을 벌렸는데 이날 일정을 살펴보면 출발지인 통일전(서출지)에서 집합해 넘버를 교부받아 오전 9시에 코스로 진입하여 칠불암을 거쳐서 연못(용장계곡)에 도착, 오후 1시 50분까지 중식을 가지고 그곳에서 산상테스트를 치루었다. 다시 상선암을 거쳐서 4시에 종결지인 삼능에 도착하였는데 심사위원들의 채점이 있을 동안 참가팀들의 장기자랑이 진행되었다. 한편 각 부문별 시상내역을 보면 다음과 같다.

최우수상=아카데미팀(불미과1)

운 행 상= 법학과 1년 노재준 외(재학생부).

시림편집실(서클부).

기숙사 H 권오광 외(기숙사부).

학군단(교직, 동문부)

장비상=수학과 3(재학생부).

RCY 채승환 외(서클부).

기숙사 O 박병배 외(기숙사부)

감 투 상=환조과 정민조 외(재학생부).

요트 B 정광식 외(서클부).

기숙사 G 김철관 외(기숙사부).

도서관(교직,동문부)

자연보호상=로타잭트

【사진=전동국인의 단합을 위한 등산대회가 총 485개팀이 참가한 가운데 북한산성 일원에서 실시 되었다.】

1983년 4월 19일 (화요일)

뷘 회전무대 - 4·19정신 표명 안됐던 등산대회 - 동국 기백 북한산에 떨쳤지만

동국인 등산대회가 본교는 18일, 경주대는 15일 각각 강행(?)돼 1만 동악의 학형들은 북한산과 남산을 땀흘려 올랐으나, 이날 춘계 대소풍(?)에 참가했던 뭇 학형들은 갸우뚱, 『등산대회 날짜가 4·19 전날이거나 임박한 것 등 전후사정을 보면 분명 4·19기념은 4·19기념인데…』라며 왜 막상 산행중에는 4·19의 4자도 언급이 없느냐며 학교측과 호국단에 불만. 4·19 당시 선배들은『정의를 위해 민족을 위해 싸우다 죽겠노라』고 민주의 제물로 산화했음에도 불구, 본교나 경주나 대회 안내 책자에서조차「4·19정신을 계승키 위해」라는 언급을 않고 학형들의 중의를 외면, 뭇 학형들은 본교측과 호국단의 지나친 기우에 항의, 하산때는 「정의가」, 「흔들리지않게」등을 부르며 동국인의 기백을 북악에 떨쳤다고. 내일의 주역이 될 우리 젊은 가슴들이 시대에 대한 사명감이나책임감을 갖는 걸 두려워하는 분이 계시는지는 모르지만 본 회전무대자 생각엔 기성세대가 되신 분들, 혹은 학생의 대표라 자부하시는 분들이 보인 그런 모습(?) 너무한거 아닐까요?

1984년 4월 10일 (화요일)

뷘 동국인 등산대회 - 오는 28일 북한산 일원에서 -접수 25일까지

「제15회 동국인 등산대회」가 오는 28일 오전 9시부터 북한산성 일원에서 개최된다. 매년 4·19를기념하고 동국인의 체력향상과 교직원·학생간의 대화로 상호협동하는 건전기풍을 함양하기 위해실시되는 이번 대회의 등반코스는 정릉 청수장을 출발, 보국문, 태고사지, 깔딱고개, 도선사까지이며 도선사에서 폐회식을 갖게된다. 이 대회의 참가범위는 재학생, 교직원, 종립학원관계자, 써클회원, 동문 등으로 한팀 4명(리더 1명, 대원 3명)을 구성, 오는 18일부터 25일까지 참가신청서를 다향관 앞 산악부 캠프에 제출하면 된다. 한편 이번 대회의 세부사항 및 준비물 내용을 전달하기 위한 「전체 리더회의」는 오는 25일 오후 3시 교수 세미나실에서 있을 예정이다.

1984년 5월 1일(화요일)

뷘 동국인 등산대회 성료 - 4·19기념 일환 - 3백 50개팀 참가

뷘 최우수상, ROTC B팀 - 농무현상 겹쳐 산행에 차질

4·19기념「제15회 동국인 등산대회」가 지난달 28일 오전 9시 30분부터 총 3백 50개팀, 1천 5백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북한산 일원에서 열려 ROTC B팀이 최우수상을 차지했다. 동국인의 체력향상과 교직원, 학생간의 친목을 도모하고 상호협동하는 건전한 기풍을 조성하기 위해 매년 실시되는이번 대회는 정릉 청수장을 출발, 보국문, 태고사지, 딸깍고개, 도선사에 이르는 약 12km의 코스에서 펼쳐졌다. 이날 대회는 봄비에 농무현상까지 겹쳐 산행에 큰 어려움을 겪었으며 특히 산행길에 표지판도 설치되지 않는 등 불성실을 드러냈다. 이날 등행을 마친 참가자들은 도선사 입구 광장에 모여 심사위원들이 종합채점을 하는 동안 장기자랑을 가졌는데 서도회팀 김판규군이 최우수상을 차지했다. 이어 시상식을 끝으로 등산대회의 모든 일정을 마쳤는데 등정코스가 험해 참가팀 대부분이 곤욕을 치렀다. 이번 대회의 수상팀은 다음과 같다.

■ 최우수상

ROTC B팀(재학생부)

■ 특별상

경영학과 A팀(재학생부)

■ 우수상

국교과 A팀(재학부)

경영대학원 23기 C팀(동문부)

동우회 A팀(서클부)

관재과(직원부)

전산원 1팀(종립학원부)

■ 자연보호상

전산원 3팀(종립학원부)

도서관팀(교직원부)

일문과 O팀(재학생부)

서도회1팀(서클부)

행정대학원 33기팀(동문부)

【사진=지난달 28일 북한산 일원서 열린 「동국인 등산대회」에서 산행하는 학생들】

1985년 4월 16일(화요일)

뷘 등산대회 2천여 명 참가 - 4·19 기념 - 최우수 ROTC팀 - 경주 캠퍼스도 건각 겨뤄

4·19기념 「제16회 동국인 등산대회」가 지난 13일 오전 10시부터 총 3백 40팀 1천 5백여 명이참가한 가운데 세검정에서 도선사에 이르는 북한산 일대에서 열려 ROTC팀이 최우수상을 차지했다. 동국인의 체력향상과 교직원, 학생간의 친목도모, 협동기풍 진작을 위해 매년 실시되어 온 이 등산대회는 이날 오전 10시 황수영총장을 비롯 각처, 실장의 격려를 받으며 4인 1조 각팀들이 출발, 문수사 - 대남문 - 군창지 - 용암문 - 도선사에 이르는 10km의 등정을 무사히 마쳤다. 이날 등정을 마친 참가자들은 도선사 앞 광장에서 장기자랑으로 피로를 풀었다. 이날 등산대회의 심판기준은 산행예절, 복장, 통솔력 및 협동심이었으나 대부분의 참가팀들이 질서의식 부족과 과다한 음주, 사전 준비의 미비 등의 문제점을 노출시키기도 했다. 이번 대회의 수상팀 명단은 다음과 같다.

■ 최우수상=ROTC팀

특별상=경대원 부부팀

장기자랑상=경대원 여학생팀

우수상=교수 혼성팀(교직원부),

가교과 C팀(재학생부),

동굴탐험팀(써어클부),

행대원 O.B팀(동문부),

동대부고팀(종립학원부)

자연보호상=학군단팀(교직원부),

농학과팀(재학생부),

경대원팀(써클부),

도서관팀(동문부),

가교과팀(여학생부)

4·19 25주년과 개교 79주년을 기념하는「제6회 경주 동국인 등산대회」가 지난 13일 경주 남산 일원에서 실시되어 전자계산학과(TRIX 2)팀이 최우수상을 차지했다. 4인 1조로 1백 50여팀 7백여명이 참가한 이날 등산대회는 통일전 - 칠불암 - 용장사지 - 상선암 - 삼능으로 이어지는 총 8km의 코스에서 벌어졌는데 등산이 끝난 후 삼능에서는 장기자랑이 베풀어졌다. 한편 이번 등산대회는 학생대표기구의 부재로 행사의 참뜻을 살리지 못한데다가 예년에 비해 참가팀 수도 적어 아쉬움을 남겼다. 이날 각 부문별 입상팀은 다음과 같다.

■ 최우수상 = 전자계산학과(TRIX 2)

■ 재학생부

연꽃상=법학과(김종호 외)

코끼리상=전산과(TRIX 1)

용맹정진상=법학과(혼성팀)

■ 써클부

연꽃상=KUSA

코끼리상=수석회

용맹정진상=불교학생회

■ 기숙사부

연꽃상=김미정 외

코끼리상=서경덕 외

용맹정진상=신범규 외

■ 교직원, 동문부=관재 A팀

■ 특별상(자연보호상)=ROTC팀

■ 장기자랑=유영재(법.3)

1986년 5월 6일 (화요일)

뷘 동국인 등산대회 마쳐 - 최우수상에 「프로젝트 동우회」

「제17회 동국인 등산대회」가 지난달 18일 3백 60여팀 1천 5백여 명의 동국인이 참가한 가운데북한산 일원에서 열렸다. 4·19 혁명정신의 계승 및 등산을 통한 동국 가족의 심신단련과 친목도모를 목적으로 펼쳐졌던 이날 등산대회는 오전 9시 30분 정릉 청수장을 출발하여 보현봉, 대남문, 태고사, 북한산성 등의 코스로 진행되었는데 최우수상은 Project 동우회팀이 차지했다. 이날 대회는 형식적이고 오락적인 경향으로 치우쳐 그 본래의 취지를 흐리게 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한편 「제7회 경주 동국인 등산대회」가 지난달 18일 남도영부총장을 비롯, 교직원. 학생 등 4백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경주 남산 일대에서 열렸다. 4인 1팀의 1백여 팀이 참가한 이날 등산대회에서 최우수상은 ROTC팀이 차지했는데, 등산코스는 용장 3리를 출발 와룡사, 용장사지, 상선암, 삼능에 이르는 8km였다.

1986년 9월 9일 (화요일)

뷘 동국 80년의 뒤안길 - <7> - 산악활동 - 최영식

1956년과 1957년은 한국산악회와 각 대학 산악부활동이 활발한 시기였다. 그 당시 대학으로는 서울 문리대와 공대, 의대, 고대, 한대 등에서 산악활동이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본교는 이때까지도 산악활동이 여의치 못한 상태였다. 그런데 어느날 한국산악회원인 나에게 홍종인회장이 『왜 동대에는 산악부가 없느냐』고 물어왔으나 달리 대답할 길이 없었다. 이에 책임을 느껴 당시 교무과에 근무하고 있던 임돈(재미)선생과 상의 끝에 마침내 58년 4월 본교 산악부를 탄생시키기에 이르렀다. 그때 고문에 임돈, 초대회장은 내가 맡았고 부원은 25명이었다. 그뒤 전규홍부총장을 정식 고문으로 추대하면서 본교 산악부는 활기를 띠었다. 본교 산악부는 여름방학때 첫나들이로 설악산을 등반했고, 대학산악부 최초로 「등산 사진 전시회」를 연것은 획기적이었다. 이 사진전을 보러온 고교산악부원들이 몇년 뒤 본교 산악부에 들어온 숫자도 적지 않았다. 출범 1년 뒤인 59년 1월에는 나를 비롯 김종섭, 유창서 등이 동계 천불동계곡 등반에 나섰으며, 또 조잡한 장비로 내설악까지 넘었으니 우리 산악부원들의 열의도 보통은 아니었다. 이러한 열의는 우선 설악산을 36회, 지리산 9회, 한라산 7회, 태백산 종주 3회와 가야산, 오대산, 화악산, 속리산, 백운산등 국내 산들을 두루 등반하는 실적을 올렸다. 특히 소백산맥 희양산 암벽에서는 17차에 걸친 암벽등반 기술훈련으로 많은 암장코스를 개척 동대 산악인의 전용 훈련장소로 불릴 정도이다. 그리고 76년 1월의 토왕성폭포 하부를 초등한 쾌거는 산지에 길이 남고 있다. 본교 산악부는 국내 등반뿐만 아니라 해외등반에서도 선구자적 역할을 한것이 또한 자랑스럽다. 1964년 5월 타대에서는 생각조차 못하고 있을 때 제1차 일본 북알프스등반대를 파견 함으로써 대학산악부들의 해외등반길을 열었다. 이때 단장에는 민완식교수, 대원에는 나를 비롯 이중웅, 임신철, 유지영, 이규복 등이었다. 2년뒤인 1967년에는 제2차 일본 북알프스등반을 해냈는데 정종교수를 비롯 반태중, 강성윤, 윤용규, 최인, 이성만, 오인환, 오영복 등이 참가했다. 이 일본 북알프스등반이 계기가 되어 65년 4월에는 본교 산악부서 일본 알파인클럽 산장회 팀을 초청 설악산에서 합동등반을 실시했으며, 그후 立敎大 산악부와는 자매결연을 맺어 일찍부터 국제 교류등반을 갖기도 했다. 그러나 본교 산악부의 가장 빛나는 업적은 뭐니뭐니해도 1980년 4월 28일의 마나슬루 등반이다. 이 등반은 자금조달에 무척 애를 먹기도 했으나 학교당국과 동문들의 고마운 손길이 있어 마침내 우리 동국산악인이 8,156m 정상에 태극끼를 휘날릴 수 있었다. 이 자랑스러운 등반대는 대장에 이인정, 부대장에 이영진, 대원에 김광진, 유태원, 서동환, 양명수, 이종량 등 7명이었다. 이밖에도 본교 산악부를 빛낸 이들은 에베레스트대의 도창호, 마카루대의 변유근, 양정 에베레스트대장의 오인환등 개인적인 활약도 돋보이고 있다. 한편 본교 산악활동은 부원만의 활동을 넘어 전동국인의 활동으로 확산되고 있다. 회원 자격에 별다른 제한없이 출발했던 탓으로 창설 10년째에는 교직원, 동문을 망라해 OB 산악회가 아닌 모든 동국인을 수용할 수 있는 동국산악회의 탄생을 본 것이 그것이다. 이 모임의 초대회장은 홍봉래, 2·3대 회장 최재구, 4대회장 이병주, 5대회장에 김진복, 6대 회장에 김용호 동문을 거쳐 7대 회장에 초대 산악부장이었던 내가 취임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8대 임신철, 9대 정진영(현)등 산악부출신들이 회장을 맡게된 것은 본교 산악부의 성장을 말해 주고 있지않나 생각된다. 그러나 본교 산악활동은 자체적인 활동에만 국한하지 않고 지난 70년 4월 시작된 동국인 등산대회(17회)와 매년 가을 전국 유명산을 찾는 동국산악제(18회) 등에 모든 동국인을 참가시키고 있어 타대학이 부러워하고 있는 부분이 되고 있다. 반면에 아쉬운 것은 그동안 5호까지 발간된 「동국산악」지가 중단된 것인데 빨리 속간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어쨌든 본교 산악활동의 희망은 더 큰 힘을 축적시켜 5∼6년뒤에 동국 에베레스트 원정을 실현시킴으로써 세계의 지붕 위에 교기와 동국산악회기를 꽂는 일이다. 모두 이날을 위해 정진하자.

【사진=『동대에는 왜 산악부가 없느냐』는 질문에 책임감을 느껴 58년 4월에 산악부를 창단케 되었다. 사진은 당시의 창단 멤버들로 왼쪽부터 김종섭, 최영식 한사람 건너 임돈, 권영시, 김영근, 정진영】

1987년 4월 21일(화요일)

뷘 동국인 등산대회 25일 열려 - 23일 접수마감 정릉 출발해 북한산 일원 산행

4·19 기념 제18회 동국인 등산대회 일정 및 코오스가 확정, 발표되었다. 지난 70년 4·19 10주년을 기해 4·19의 숭고한 이념을 계승하는 한편 전동국인의 체력향상과 교직원, 학생간의 꾸밈없는 대화를 통한 친목도모와 상호협동하는 건전한 기풍을 함양하기 위해 실시 되어온 이 대회는 금년 역시 북한산일원을 중심으로 오는 25일 오전 9시 30분부터 이지관총장을 비롯 재학생, 동문, 교직원 등이 참가한 가운데 열릴 예정이다. 코오스는 정릉 청수장을 출발, 보국문 태고사터(군창지)를 거쳐 도선사에 이르는 약 20km로서 태고사터에서 중식을 도선사 주차장에서 폐회식 및 장기자랑을 갖게된다. 이번 대회의 부편성은 참가범위에 따라 재학생부, 교직원, 써클부, 동문부, 종립학원부 등으로 나뉘어지며 한팀 4명(리더 1명, 대원 3명)을 중심으로 오는 23일까지 참가신청서를 다향관 앞 산악부 캠프에 제출하면 된다. 한편 이날 대회는 오전 8시 30분, 선발대 및 심판위원 등이 먼저 산행코스 곳곳에 배치되며 9시 30분부터 각팀이 출발하는데 오전 10시 30분까지 도착하지 않은 팀은 기권으로 간주하기로 했으며, 시상은 해산지점(도선사주차장)에서 갖게되는데 시상범위는 최우수상 및 특별상 각 1팀, 우수상과 자연보호상 5팀, 준우수상 15팀을 각각 심사 선정하며 참가자 전원에게 참가상이 주어질 예정이다.

【사진=제18회 동국인 등산대회가 오는 25일 북한산일원에서 열린다 <사진은 지난해 등산대회 광경>】

1988년 8월 23일(화요일)

뷘 동국의 기상 세계에 떨쳐 - 산악부

세계 최난 「아이거 북벽」등정 성공 - 허종행 대원 잃은 아픔 딛고 정상에 올해로 창립 30주년을 맞는 본교 산악부가 지난 6일 「죽음의 벽」이라고 불리는 유럽 알프스의아이거 북벽 등정에 성공, 동국인의 기상과 민족의 기개를 전세계에 떨쳤다. 지난 7월 16일 총10명의 대원으로 장도에 올라 27일 첫도전을 시도했으나 허종행(건축공학과 4) 대원의 불의의 추락사로 인하여 실패하였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8월 5일 김진성(전산과 3), 안진섭(체교과 2) 두 대원이 재도전, 8월 6일 18시 30분 정상에 올랐다. 이번 산악부의 등반성공은 지난 80년 4월 28일 세계 다섯번째로 마나슬루 등정에 성공한데 이은 또한번의 쾌거로 「최초의 1박 2일 재도전 성공」이라는 기록을 낳았다. 한편 이번 허종행 대원의 사고는 지난 7월 30일 김진성대원과 함께 아이거 북벽을 등반하던 중 기상상태 불량으로 하산하다 하켄이 빠져 추락사한 것으로 해발 3천 4백m 「하얀거미」 상단부분에서 발생하였다. 아이거 북벽 해발 3천 9백 70m의 수직암봉으로 북벽은 수직표고차 1천 8백m의 세계 최난 코스로써 세계 산악인의 등정목표이자 희생의 대상지 이기도 하다. 이번 사고로 인하여 본교 산악부는 30년 역사상 최초로 동지를 잃는 비애를 맛보았는데, 지난 8월 9일에는 故허종행 대원의 영결식이 정각원에서 오전10시부터 가족, 친지 및 학생 1백여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거행되었다. 영결식에서는 이태경 정각원장의 독경 및 총학생회장 최재성(불교 4)군의 『故허종행 대원의 죽음을 애도』하는 조사가 있었으며, 이어 이지관 총장 등의 헌화 및 분향이 있었다.

【사진=위로부터, ◇故 허종행군 ◇김진성군 ◇안진섭군】

1988년 8월 23일(화요일)

뷘 산, 그 영원한 침묵이여 - 아이거북벽 등정기 - 김진성

왜, 무엇을 찾고자, 알피니스트는 목숨을 걸고 산에 오르는가? 알피니스트란 애써 고난을 짊어지고 운명에 맞서는 무모한 모험가는 아닌가? 현실을 부정하며 극한의 피안에 안주하려는 현실도피자는 아닌가? 이것은 산악인들에게 끊임없이 제기되고 또 스스로 반문하는 결론없는 물음이며 나역시 그 의문을 풀기 위해 산에 오르고 있을 뿐이다. 재학생 5명, 졸업생 3명으로 구성된 동국대산악부의 알프스원정대는 7월 16일 서울을 떠나 알프스 샤모니 산군에서 현지적응 및 훈련등반을 마친 후 7월 24일 사기충천해서 첫 등반대상지인 아이거북벽(3,975m)에 도착, 클라이네샤이데크에 베이스 캠프를 쳤다. 수직표고 2천m 이상을 솟아있는 아이거 북벽이 주는 중압감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든 등반능력이나 체력, 그리고 양호한 현지적응 상태 등으로 하여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자연이 거부한다면 인간은 한낱 미물에 지나지 않듯이 하루에도 여러번 바뀌는 기후가 등반의 열쇠라 생각되었다.

7월 26일 종행이 형(81학번 건축공학 4) 영석이(83학번 체육교육 3) 형우(87학번 무역학과 2)와 나 이렇게 4명이서 디피컬트크랙까지 정찰등반을 다녀왔다. 생소한 석회암질의 바위로 깨져 나가고 날카로왔으나 자신감은 더해갔다.

7월 27일 새벽 4시 종행형과 나는 드디어 아이거 북벽의 도전에 나섰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바라보는 북벽이 마치 커다란 폭포와 같다. 첫번째로 북벽이 거부하는 것일까? 비는 세차게 더욱 내려부어 베이스와 교신후 랜턴불 밝히고 철도공사 노래를 발맞추어 힘차게 부르며 내려가나 내려가는 발길이 왠지 무겁다.

7월 28일 새벽 4시 기상하여 나와보니 하늘에는 별이 초롱초롱하다. 뜨거운 차와 김밥을 먹으니 힘이 솟는것 같고, 헤드랜턴 불빛을 밝히며 북벽 하단부로 향하는 컴컴한 철도터널에서도 종행형과 나는 말이 없다. 지금 우리는 아이거 북벽을 오르기 위해 걷고 있는것이다. 새벽 5시 30분 등반을 시작하여 내가 짐을 가볍게 지고 톱으로 오르고 형이 나머지 짐을 지고 뒤따른다. 디피컬트크랙 위까지는 와본 길이라 낯설지 않다. 제1설원과 제2설원을 연결하는 얼음관 통로에서는 바위에 얼음이 얼어있어 아이젠을 신고 혼합 클라이밍으로 올랐다. 올라야한다는 생각뿐 낙석, 낙빙도 안중에 없었다. 제2설원을 올라 플랫 아이롱을 직등하니 죽음의 비박 오른쪽 120m 지점이었다. 시간은 18시, 커다란 바위계곡이 나있는것 같은 람페까지 가기로하고 왼쪽으로 계속 횡단하다 양호한 비박지를 발견했다. 그곳은 람페 못미친 지점이었다. 오버행 밑의 눈을 다지고 장비를 벗어 달아놓으니 20시 30분 무엇에 쫓기기라도 하듯 미친 듯이 올라왔으나 역시 아이거는 큰 벽이었다. 총총한 밤하늘의 별과 클라이네샤이데크와 그린델발트의 불빛을 보며 끓여먹는 알파미와 차맛은 이런 곳에 매달려 먹어본 이만이 느낄 수 있는것 이리라. 베이스 캠프와 무전교신하니 내일 오전만 날씨가 좋다고 해서 새벽에 등반을 시작해 내일 정상에 서기로하고 고어텍스 침낭커버를 뒤집어쓰고 잠을 청하니 몸은 춥고 자리는 좁고 불편해서 잠이 오지 않아도 마음만은 따뜻하고 뭔가로 가득차 있는것 같다.

7월 29일 새벽 2시 기상하여 람페를 힘들게 등반하고 신들의 트래바스 끝내니 14시 30분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 하늘에서 우박과 눈보라가 몰아치고 가스가 끼여서 형이 안보일 정도이다. 더 이상 등반이 불가능하여 5m 위 오버행 밑의 상태불량한 비박지에 하켄 4개를 치고 비박하기로 하였다.

7월 30일 새벽 2시 기상하니 모든 장비가 얼어있고 몸도 역시 얼어 있었다. 장비를 입김으로 녹여 몸에 다는데 한시간 이상이 소비되었다. 정상 리스로 통하는 하얀거미로 접어들기 위해 신들의 트래버스로 하강해 기다리니 형이 하켄 몇개를 빼는지 뚝딱거리고 있었다. 뚝소리가 나서 고 개를 들어 쳐다보니 1초도 안되는 사이에 종행이 형이 내옆을 스쳐 북벽에서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서러움에 북받쳐 소리내어 우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가장 좋아하던 형이 떨어지는 것을 잡아주지도, 같이 떨어지지도 못한 채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한순간 마음을 굳게먹고 헤드랜턴으로 베이스에 구조신호를 보낸 후 북벽에 홀로 매달려 있은지 4시간 30분만에 구조 헬기가 북벽으로 날아왔다. 구조되어 클라이네샤이데크에 내려 영석이와 환기형을 보는 순간 꿈이길 바란 소망은 깨어지고 1,400m 이상을 떨어졌을 형의 흔적은 찾을 길이 없어저 음침하고 추운 아이거 북벽의 어느곳에 있을거라 생각하니 하염없이 눈물이 나올 뿐이었다. 그러나 울고만 있을수는 없다고 생각하며 북쪽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삼켰다. 두번째 거부의 몸짓이었다. 다음 세번째는 잡아먹느냐 잡혀먹히느냐이다. 1초도 안되는 사이에 일어난 일들이 모든이들에게 가슴아픈 상처를 안겨주며 가장 소중한 존재를 無化시킬 줄이야. 무진이란 아들과 예리란 딸을 낳아 같이 종행무진 예리하게 등반하러 다니겠다던 순진무구한 경상도사투리의 사나이를 이젠 두번 다시는 볼수 없다. 유난히도 사고를 많이치고 다닌 83학번 우리 동기들을 독사새끼로 만들어 주겠다며 산에서는 독사같았던 종행이 형. 2천m 벽위에서 본 형의 모습은 이제 보통사람들이 걸어다니는 이곳에서는 볼 수가 없다. 8월 5, 6일 이틀간에 걸쳐 진섭(87학번 체육교육 2)이와 같이 재도전하여1박 2일간의 사투끝에 아이거 북벽을 올랐다. 종행이형을 삼킨 아이거의 정수리위에 선것이다. 북돌며 우리를 돌봐 준 종행이 형과 베이스에서 마음졸이며 기도해 준 등반대원들을 떠올렸다. 그들이 있었기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칼날같이 뾰족한 정상설원에 종행이 형의 사진을 묻어두고 떠나야하는 우리의 운명과 우리를 떠나 보내야하는 형의 모습을 상상하는 순간 쟈일로 맺어진 산사나이들만이 느낄 수 있는 애끓는 정이 북받쳐올라 울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산은 우리에게 많은것을 주지만 그 반대급부적으로 너무나 많은것을 빼앗아 간다는 냉혹한 현실을 느끼게 해준다. 우리는 항상 대자연앞에 순수하고 경건한 마음을 가져야겠다는 생각과 종행이 형의 몫까지 충실한 삶을 살아야겠다는 상념이 허전한 마음에 비틀거리는 하산길에 맴돌았다.

종행이 형 편히 잠드소서!

- 김진성<공과대 전산학과>

1993년 4월 14일(수요일)

뷘 4·19 등산대회 오는 17일 개최

4·19 기념 제24회 동국인 등산대회가 재단법인 동국학원 산하 재학생 교직원 동문 등이 참가한가운데 오는 17일 북한산 일대에서 열린다. 이번 등반대회의 의의에 대해 학교당국은 『전동국인의 체력향상과 참가자 상호간의 협동을 통하여 친목을 도모하고 건전한 생활방식과 학풍을 함양하는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총학생회는 『이번 등반대회를 오는 5월 8일로 예정돼 있는 동국중흥 한마당의 사전 준비과정으로 보고 이를 위해 전동국 가족의 참여를 통해 동국중흥 한마당으로 갈 수 있는 공감대를 형성하는 장이 될것』이라고 등반대회를 전망했다. 한편 참가신청은 지난 12일부터 오는 15일까지 학생과에서 접수받으며 개조는 4명으로 구성된다. 또한 재학생부, 동아리부, 교직원부, 종립학원부, 동문부 등 5개부로 나누어 실시된다. 총학생회는 기간 4·19 기념 등반대회를 『4월 혁명 기념이라는 의미가 점점 퇴색되고 일회성 행사로서 의미가 높아지고 있고, 학생회는 4월의 많은 일정으로 등반대회 준비가 부담으로 자리잡았다.』라고 평가하고 『4·19 세대인 교수나 직원들과 점심시간을 이용한 간담회나 4·19 기념탑 참배를 통한 4·19 정신 계승과 행사라기보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참가할 수 있도록 해 학생회의 부담을 덜어줘야할 것』이라고 밝혔다. 당일 오전 9시에 출발지인 4·19 탑에서 사전 출정식을 가지며 폐회식과 시상은 종착지인 도선사 앞에서 있을 예정이다. 또한 폐회식에 앞서 참가자 뽐내기 마당도 준비돼 있다. 시상종목은 최우수상, 특별상, 자연보호상 등 10개이다. 한편 경주캠퍼스 「제 14회 4·19 기념 등반대회」는 오는 23일 경주 남산일대에서 열린다.

1993년 5월 26일(수요일)

뷘 대학팀 최초 에베레스트산 정상등정 - 하산도중 안진섭, 남원우 대원 실족사

단일 대학 산악부팀으로는 국내 최초로 지난 16일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산(8천8백48m) 등정에성공한 본교 에베레스트원정대가 하산 도중 안진섭(체교4)군과 남원우(경행88졸) 동문 등 2명이 추락사하는 참변을 당했다. 지난 3월 11일 이인정(상학 72졸, 대학산악연맹회장) 동문을 단장으로 총 8명으로 구성돼 네팔현지로 출발한 이번 「4326(단기) 사가르마타 남서벽 원정대」는 히말라야 산맥 최대 난코스인 에베레스트산 남서벽 등정을 시도해 지난 4월말 8천 3백m까지 접근했으나 10일간 이어지는 폭설 등 악화된 기상여건으로 일반루트인 남동릉루트로 선회, 정상공격을 노렸다. 이후 지난 16일 새벽 정상공격을 위해 제4 캠프(8천 4백m)를 떠난 정상공격 등반대 박영석(체교 90졸) 등반대장과 안진섭(체교4), 김태곤(전기4)군 등 3명은 같은날 오전 11시 40분경 정상등정에 성공했다. 정상등정 후 하산하던 이들 대원 중 안군이 오후 9시경 8천 1백m 지점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실족 추락사했다. 이같은 사고가 난 이튿날인 지난 17일 사고소식을 접한 남원우동문은 안군의 시신운반을 돕기 위해 제2 캠프(6천 5백m)에서 제3캠프로 이동하던 중 실종되었다.

산악부측이 추정하고 있는 바에 따르면 제2 캠프와 제3 캠프사이에 넓은 크레바스(빙하절벽) 지대가 자리하고 있는 점에 미루어 이지점에서 추락사한 것으로 보고 있으나 확실한 경위가 밝혀지지 않고 있으며 시신도 찾지 못한 상태이다. 현지 연락에 따르면 안군의 시신은 지난 21일 헬기편으로 카투만두로 옮겨졌으며 나머지 대원은 22일 철수를 시작해 25일 카투만두에 무사히 집결했다고 전해졌다. 또한 오는 6월 2일에는 안군의 시신과 대원들이 서울로 귀국할 예정이며 안군의 장례식은 총학생회에서 학생장으로 치를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17일 대학산악부 최초의 에베레스트산 등정소식에 기뻐하다 지난 18일 사고소식을 접한 산악부는 산악부실(도서관 지하)에 안군과 남동문의 분향소를 마련하고 이들을 추모했다. 한편 이번에 남동릉루트로 등정에 성공한 에베레스트산 원정대는 지난 91년에도 남서벽 등정을 시도했으나 실패했었다.

【사진=에베레스트산 등정에 성공한 뒤 하산도중 추락사한 안진섭군과 남원우동문의 분향소가 산악부실에 마련됐다.】

1993년 6월 2일(수요일)

뷘 고 안진섭군 장례식 치뤄 - 유해 북한산에 안치

에베레스트산(8천8백48m) 등정에 성공한 후 하산도중 추락사한 안진섭(체교4)군과 남원우(경행88졸) 동문의 장례식이 지난 1일 오전 10시에 정각원에서 치뤄졌다. 이 장례식에는 안군과 남동문의 유족, 산악부대원 등 3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치뤄졌다. 한편 산악부대원들은 화장된 안군의 시신을 지난달 31일 방콕에서 서울로 옮겨와 이날 장례식을 치룬 뒤 북한산 도선사를 거쳐 인수산장에 안치했다.

1997년 4월 14일(월요일)

뷘 4·19 기념 동국인 등산대회 개최

♠ 서울 : 18일 북한산에서 … 학과상 상금 1백만원

♠ 경주 : 18일 남산일대 … 최다인원 참가 단체엔 특별상 학생처(처장=오정수·산림자원학)는 「제28회 4·19 기념 동국인등산대회」를 오는 18일 북한산에서 개최한다. 오는 18일까지 학생과나 산악부에 △4인 1조팀(학부, 학과, 동아리, 동문회, 대학원, 교직원, 혼성조직 등 자유롭게 구성) △단체팀(50명 이상으로 교수 2인 이상 참가팀) △행정부서팀(부서별 구성원의 50% 이상이 참가한 부서)으로 접수하면 동국인 누구나 참가 가능하다.

대회 당일에는 오전 9시 참가자들이 집결해 4·19 기념행사를 가진 후 오전 10시 4·19 기념탑 광장에서 팀별로 출발한다. 등산로는 △4·19 기념탑 △대동문 △북한산장 △위문 △하루재 △도선사로 이어지는 코스이며 오후 4시까지 도선사 입구 휴게터에 도착해야 한다. 이후 도선사 입구 휴게터에서 시상식과 폐회식을 가질 예정이다. 시상으로 4인 1조상은 최우수상, 자연보호상, 장기 자랑상 등이 있고 학과상은 금상 1백만월, 은상 50만원, 동상 30만원이 주어지며 행정부서 특별상도 있다. 심사기준은 준비물(모자, 셔츠, 산행에 불편하지 않은 복장, 등산화, 면장갑, 손전등, 비상약 등) 30점, 팀웍(팀간의 협동심) 20점, 산행시간(시간엄수) 20점, 등산예절(자연보호, 고성방가 금지, 산행협조, 흡연이나 음주 적발시 - 10점) 30점등 총 1백점 만점으로 평가한다.

참가신청서를 제출하지 않은 팀과 전문적으로 산악훈련을 받은 팀은 심사대상에서 제외되며 교직원과 함께 구성된 팀과 남녀혼성 4인 1조팀은 총점에 5% 가산한다. 또 자연보호 및 산불예방에 현격한 공적이 있는 팀은 총점에 10%를 가산한다. 교통편은 6번, 6-1번, 28번 시내버스로 4·19 기념탐에서 하차하거나 127번 종점에서 내리면 되고 오전 8시부터 9시까지는 학교버스가 수유전철역(도봉구청 정문방면)에서 4·19 기념까지 운행한다. 한편 경주캠퍼스는 오는 18일 오전 8시 30분부터 오후 6시까지 경주남산에서 4·19 기념 등산대회를 갖는다. 교직원, 동문, 재학생, 동아리, 기숙사 등을 대상으로 4명이 한팀이 되어 참가하게 되는 이번 등산대회는 오는 16일 오후 4시까지 백상탑앞에 설치된 산악부 특설캠프에서 접수받는다. 이번 행사의 등산로는 통일전을 출발하여 △칠불암 △연못 △용장계곡 △정상 △상설암 △삼릉으로 이어지며, 이곳에서 시상식 및 장기자랑을 갖는다. 시상내역을 살펴보면 최우수상 1팀, 용맹정진상·코끼리상·연꽃상·자연보호상 각각 3팀이 선정되며 가장 많은 인원이 참가한 단체에게 특별상이 주어진다.

1997년 5월 19일(월요일)

뷘 히말라야 다올라기리 1봉 정복

뷘 본교 산악회 국내최초로 이룬 쾌거

본교 동국산악회(회장=김정훈·컴퓨터공4)는 지난 3월 22일부터 5월 8일까지 진행된 히말라야 다올라기리 1봉 등반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한국최초로 히말라야 다올라기리 1봉을 정복한 이번 원정은 산악회 창립 40주년 및 본교 개교 90주년 기념으로 진행된 이번 다올라기리 1봉 원정은 박영석(체교91졸) 대장을 비롯해 김대원(행정96졸), 김헌상(철4), 정광교(미생물4)대원 등이 참여했다. 그러나 김대원, 정광교 두대원은 고소적응이 안돼 정상정복에는 실패했다. 등반에 성공한 김헌상(철4)군은 『본교 개교 1백주년이 되는 2천 6년까지 히말라야 8천미터 이상의 봉우리들을 모두 정복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1997년 5월 19일(월요일)

뷘 <오솔길>동국산악회 김헌상(철4)군

뷘 『정상에 오르면 세상을 정복한 것 같아요』

등반이유를 묻는 이에게 한 산악인은 그랬다. 『그산이 거기에 있어서 올라간 것 뿐』이라고… 그렇다면 한국최초로 다올라기리 1봉을 정복하고 내려온 본교 철학과 4학년 김헌상군은 어떻게 대답할까. 『산이 좋아요. 산을 오르면 오를때의 고통만큼 보람이 생기잖아요. 또 정상에 오르면 세상을 정복한 것 같아요』라고 말하며 배시시 웃는 그는 검게 그을린 얼굴 빛 덕에 이만 하얗게 반짝인다. 동국산악회 창설 40주년 및 본교 개교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지난 3월 22일부터 5월 8일까지 진행된 이번 히말라야 다올라기리 1봉 등반에는 박영석(체교91졸) 대장을 비롯해 김대원(행정96졸), 김헌상(철4), 정광교(미생물4)군 등 모두 4명의 대원이 참여했다. 비록 김대원, 정광교 두대원이 고소증으로 인해 정상정복에 함께하지 못했지만 「한국최초」라는 자랑스런 타이틀을 목에 걸었다.

김헌상군이 활동하고 있는 동국산악회는 올해로 창설 40주년을 맞아 자타가 공인하는 국내 대학최고의 산악동아리이다. 현재 다올라기리 1봉, 에베레스트, 마나슬루, 안나푸르나, 초오유, 시사팡마 등을 정복한 동국산악회는 본교 개교 1백주년이 되는 2천 6년까지 히말라야 8천미터 이상의 고봉들을 모두 오른다는 야심찬 계획을 가지고 있다. 그동안 선배들이 쌓아놓은 명성이 이번 원정에 조금은 부담이 되었다는 김헌상군. 『선배님들 못지 않는 후배가 되야지요』라며 앞으로의 각오를 밝힌 그는 『힘든 일을 잘 안하려는 세대라서 그런지 97학번 새내기가 많이 들어오지 않네요』라고 아쉬움을 표했다.

『대학을 언제 졸업할 지 모르지만 앞으로도 많은 동국인들과 함께 산에 오르고 싶어요』라고 작은 소망을 밝힌 그는 동국산악회의 모든 등반에 주역으로 참여하고 싶다고.

산을 사랑하는 산과 함께 살고 싶다는 그에게서 진정한 「알피니스트(Alpinist)」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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