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2-동악40년사

I. 동악 40년 약사
1976년 ~ 1980년

최성침

1. 76년 1월 토왕성 빙폭 하단 초등

70년대 후반기 동악의 서장을 연 것은 76년도 1월의 토왕성빙폭 하단초등이었다. 토왕성 빙폭은 스케일에서나 난이도에서 단연 국내 최상일 뿐만 아니라 세계수준으로 견주어 볼때에도 손색이 없는 등반대상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토왕성 빙폭은 국내 등반 인에게는 난공불락의 대상으로 여겨졌고, 일본 미국 등의 외국 등산인들의 시도가 있었으나 희생만을 요구한 채 토왕성은 그 처녀성 을 내어주지 않았다.
동국산악회가 이 토왕성에 도전하고 또 기어이 초등을 이루어낸 것은 동국산악회의 개척자적 전통과 막강한 저력을 다시한번 확인시켜준 일대 사건이었음이 분명하다.

훗날 77년 에베레스트 원정대 대원으로 참가한바 있는 도창호 회원은 75년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하여 산행을 다시 시작하면서 기왕 산행을 하는 것인데 그 무엇인가 동악을 위해 뜻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당시 4학년이었던 이동훈 회원과 토왕성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 받다가 이 난공불락으로 남아있던 토왕성에 도전하는 것이 현 단계에서 가장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하고 토왕성 초등을 위한 구체적인 행동으로 돌입하였다.

체력훈련으로 시작하여 빙벽장비에 관한 자료수집과 분석 그리고 경비와 장비조달을 위해 선배들을 찾아 다니는 하루하루를 보냈다. 피켈과 아이젠, 스크류 등 빙벽장비에 관해 많은 연구와 제작경험을 가지고 있는 오영복 선배가 있는 경주에 수차례 내려가 조언을 들었고 그 결과 오영복 선배가 당시 ‘모레내 금강’의 이수길씨와 같이 제작한 M.K. 피켈과 아이젠 등을 주요 장비로서 사용하기로 결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충분한 장비를 확보하기에는 한정된 예산으로는 태부족이었다. 당시 학교에 있는 빙벽장비라야 고작 스크류 열댓개와 웰체밧티 대여섯개가 고작이었던 것이다. 우선 동계 장비를 가지고 있는 선배들을 찾아가 빌릴 수 있는 것은 모두 빌렸다. 비브람에서 피켈, 아이젠, 심지어 양말에 이르기까지. 그 외에 대학산악연맹의 일원인 연세대 산악부에서도 아이스바일과 여러개의 아이스하켄을 지원해주었다.
이렇게 빌릴 수 있는 것은 빌리고 나머지 소요장비는 학교보조금과 개인등반비를 모아 우선적으로 구입하였다. 등반비를 장비구입에 다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머지 등반비용을 확보하기 위해 선배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밖에 없었고, 선배들은 헌신적으로 도움을 주었다.

도창호, 안병준, 이동훈, 신인섭, 이상선, 김형태, 안호근, 김용일, 이문기, 김성배, 안규섭, 심우일 등으로 등반대가 구성되어 드디어 76년 1월 6일 역사적인 등반이 시작되었으나, 말로만 듣던 고드름의 빙벽 앞에 서니 자신의 미약한 존재를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거대한 빙벽은 직벽이 아니라 오버행처럼 덮칠 듯이 위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신과 통할 수 있었고 제2의 생명을 지녔던 바 과감한 돌진을 감행할 수 있었다”고 도창호 회원은 술회하고 있다.(<동국산악> 6호, 1992, ‘우리는 이렇게 올랐다’)

톱 도창호, 세컨드 이동훈, 그리고 나머지 대원들은 이 두 자일파트너의 등반을 위해 그야말로 헌신적인 써포트를 해주었다. 심지어 강정수, 김충배 선배는 스태미너를 유지시켜주기 위해 속초에서 생태며 각종해물을 손수 조달 요리해 주셨다.
세컨드인 이동훈 회원이 강풍에 날려 슬립하는 등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하단 성공의 가장 큰 난관인 고드름 지대를 통과하여 ½지점에 확보용 하켄을 박으며 등정을 확신할 수 있었고, 드디어 1월 12일에는 역사적인 등정이 시도되었다.

다음은 도창호 회원의 술회
< 4/5지점을 오를 때였으리라. 난 스크류도 다 써버려 이젠 프론트포인팅으로 오르기로 작정하고 조심스럽게 움직이려는데 본능선에서 소리가 들린다. “도형 픽켈좀 휘둘러요” 난 깜짝놀라 소리난 곳을 쳐다보니 기록을 위한 무비카메라 기사 양반이 외치는 것이 아닌가! 난 화보다도 어이가 없어 그 자리에 픽켈을 거두고 담배를 하나 꺼내물고 말았다.
그런 상태로는 도저히 감행할 수 없었다 ...... 두려운 마음에 픽켈과 아이스 햄머(이때 아이스 햄머는 서울 모 등산점 제품이었는데 이미 자루가 덜컥거리고 있었다)를 찍어가며 올라가기 시작했다.
다른 곳이 이 정도 경사라면 아마 쉽사리 올랐으리라 생각이 드는데 이곳에서는 과감한 행동이 나오질 않았다. 조심하며 약 20미터를 기어오르고 나니 두 손을 들 수 있는 상태다.
나도 모르게 손을 번쩍 치켜드는 순간 밑에서 와 함성이 터졌고 “짠짠” 부가도 들려왔다.> (<동국산악> 6호, 1992, ‘우리는 이렇게 올랐다’)

도창호 회원으로서는 하단 성공 후 계속 상단에 돌진할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이때는 이미 모든 등반조건이 무너진 상태였다. 식량에서부터 장비 그리고 하단벽 성공으로 긴장들이 풀려서인지 도무지 오를 상태가 아니였던 것이다.
하단 등정 자체가 너무도 컸던 것이다. 초등의 의미란 이런 것이다. 다음 등반은 이제 하단에 대한 심리적 부담이 해소된 상태에서 상단에 초점이 맞추어질 것이며 그러므로 상단은 하단초등을 인정한 후에만 가능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쨌든 등반대는 상단에 대한 미련은 있었지만 하단초등에 대한 자부심을 안고 베이스캠프를 철수하였다. 다음은 빙벽등반 중 저녁이면 캠프로 돌아와 대원 모두가 머리짜내어 지은 ‘토왕성찬가’의 일절.

“흰 계곡에 캠프치고
파란빙벽 토왕성
우리 모두 노래불러
톱의 고독 달랬네
아이스 햄머와 하얀 핼멧은
스크류를 조이고 래더를 걸었네”

2. 79년 하계 소백산맥 종주 필자는 산에 다니면서 산이란 인간이 깃들어 사는 보금자리라는 생각을 갖게되었다. 능선과 능선 사이로 형성된 계곡으로 물이 흐르고 그 계곡들이 합쳐져 시내와 강을 이루며 인간은 그 시내와 강을 젖줄로 삼아 산자락에 깃들어 산다. 또한 큰 산줄기는 사람들을 능선 양편으로 나누어 서로 다른 삶의 모습을 주조해낸다.
이처럼 산은 인간에게 삶의 터전과 자양이 되며, 삶의 방식을 구획하여 인간의 삶을 다양하고 풍요롭게 한다.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건 그곳은 산의 일부이며, 우리는 이 산을 통해서 너와 내가 하나로 이어져 있다.
마치 한 가닥 자일을 통해 자일파트너가 하나로 이어지듯이 너와 내가 각기 단절되어 있지 않고 서로 이어져 있다는 의식, 산은 그러한 의식을 가져다 준다. 능선종주등반의 매력은 바로 그러한 ‘이어져 있음’의 의식을 온몸으로 느끼는 행복한 순간을 경험케 해준다는 데 있다.

지금은 백두대간 등반이 유행처럼 번진지 이미 오래된 상태이지만 79년 당시에는 우리 고유의 산줄기 개념 대신 산줄기를 절단하여 여러 산맥으로 토막낸 일제식민주의자들의 이른바 ‘산맥개념’이 지배하고 있었다. 당시 필자는 남한의 중심부를 관통하는 소백산맥이 태백산맥의 지릉 정도로 인식되고 있는 것에 강한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한반도를 관통하는 주능선은 지리산에서 시작되어 소백산맥을 이루어 태백산으로 이어지는 다시 설악산으로 이어져 그 줄기가 북한으로 계속 뻗어나간다는 결론에 도달 하였다. 물론 대동여지도와 산경표가 일반인들에게 알려진 지 오래인 지금은 백두대간으로 통하고 또한 백두산이 그 기점이 되고 있지만 그 당시 상황으로서는 북한지역의 지형을 정확히 파악하기란 불가능하였다.
어쨌든 79년도의 소백산맥종주 초등은 그러한 인식에서 출발한 것이며, 그러한 인식은 본질에 있어서 지금의 백두대간의 개념과 동일한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한해 전인 78년도 청화산악회의 소백산 - 지리산 종주등반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대학팀들이 80년도 중반 이후 백두대간을 대상지로 하여 등반을 하게 된 것도 79년도의 우리 소백산맥 종주 등반이 끼친 영향과 무관하지 않다. 백두대간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고 남원우 회원의 말은 한 번 상기해 볼만 하다.

“어쨌건 그 이후 소백산맥이 주목의 대상이 되었고 또 그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즉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은 완전히 별개의 것이거나 아니면 소백산맥은 태백산맥의 지능 정도로 인식되어 왔으나 백두대간은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을 하나의 줄기로 파악하는 개념입니다.
청화산악회에서 소백산맥을 소백산에서 지리산까지로 본 것은 바로 분리적 사고의 결과인 반면 79년 선배님들은 소백산맥을 태백산에서 지리산까지로 생각했는데 명칭은 같지만 하나의 맥으로 보았다는 점에서 개념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사실 백두대간의 개념과 동일한 것입니다.” (<동국산악> 6호, 1992. ‘동악 35년 회고와 전망’)

앞서 말했듯이 청화산악회에서 소백산-지리산 구간을 동계종주를 한 적이 있었으나, 79년도 우리의 소백산맥종주(태백산 - 지리산) 는 우선 앞서 말한대로 기본적 개념면에서 차이가 있고, 능선 상에서 식수 조달이 어려운 하계등반이었다는 점에 또다른 등반사적 의미가 있었다.
캠프를 치고 나면 우선 계곡으로 떨어져 하루치의 식수를 받아와야 했다. 보통 2~30분이면 계곡에 닿았으나 어떤 때는 1시간 이상 내려가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장장 45박 46일이 소요된 등반대의 대원은 유태원, 이종량, 최광회(이상 복학생), 최성침(대장), 정갑영(부대장), 신병래, 정광진, 이범균, 김복환, 호경필, 김환기, 윤범섭, 전정희, 윤영환 등이었다.
구간별 써포트 방식으로 진행되어 애초 6명의 완주대원을 편성하였으나, 여러 가지 사정이 겹쳐서 필자와 1학년이었던 호경필, 윤범섭 등 3명만이 완주할 수 있었다.

소백산, 속리산, 덕유산, 지리산 등 큰 산을 중심으로 한 능선길을 양호한 상태였으나 그외에는 거의 길이 나 있지 않은 상태라 전진 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고, 무엇보다 태풍을 세 차례나 만난 것이 말해주듯이 등반기간의 60퍼센트가 비오는 날이어서 독도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46일 간을 먹고 걷고 자고를 반복하는 도중에 대원들은 모두 지쳐갔다. 마지막 지리산 구간에는 모두들 거지 중의 상거지가 되어 있었다. 바지는 찢어져 반바지가 되어 있었고, 셔츠는 너덜너덜 구멍이 나 있어서 어깨끈만 간신히 남아있는 상태가 되었다.
마지막 남은 단벌은 귀성을 위해 배낭 깊숙히 남겨두어야 했다. 나중에는 아예 날짜 계산을 포기해버렸고 단지 천왕봉에 도착하는 날이 등반이 끝나는 날이 될 거라고 생각하며 먹고 걷고 자고를 반복하였다.

이런 생각하며 먹고 걷고 자고를 반복하였다.
이런 힘든 등반이 무사히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들 나 아니면 등반이 성공할 수 없다 생각하며 자기가 맡은 일을 끝까지 포기 하지 않고 수행해 주었던 대원들의 책임감과 희생정신 때문이었던 갔다. 그리고 그런 책임감과 희생정신은 늘 흔들리는 등반대에 활력을 주곤 했다.
당시 하중을 줄이기 위해 감자, 양파, 호박 대신에 말린 호박으로 대체하였는데 지금처럼 말린 호박을 구입할 수 없었던 때라 식량 담당이었던 이범균 대원은 그 여름에 방에 불을 때서 호박을 널어말렸다. 그러니 집안에서는 별 미친 짓 다한다고 난리를 칠 수밖에......
더 기막힌 것은 호박을 대여섯 자루 사다가 그 쿠사리를 먹으며 말려 놨더니 겨우 반 자루가 될듯 말듯 하더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말린 호박 덕분에 우리는 한결 효율적인 등반을 할 수 있었다.

반면에 김복환 대원 같은 경우는 색다른 방법으로 등반대에 활력을 주곤 했다. 등반 도중에 뱀을 잡아서 라면 봉지에 담아 배낭 캡에 넣어두었다가 캠프를 치면 굽기도 하고 끊이기도 해서 반 강제적으로 대원들에게 먹이는 것이었다. 심지어 한번은 고슴도치를 잡았는데, 그것을 요리해 먹을 생각을 하고 나한테 맡겨놓고 물뜨러 계곡으로 내려간 사이 내가 그것을 놓쳐버렸는데, 그것을 알고 어찌나 불평이 많은지 후배들 보기가 민망할 정도였다.
문경세재에서 오랜만에 긴장을 풀고 휴식을 하던 중 신선한 부식을 밑에 마을에서 조달해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복환이에게 오이며 통조림 등을 사오라고 돈을 주어 내려보냈더니 풋고추 몇 개만 달랑들고 와서 이 마을은 물가가 비싸단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내가 준 돈으로는 막걸리를 사 마시고 올라오는 길에 고추밭에서 몇개 슬쩍해 가지고 온 것이다. 같이 내려가 의외의 회식(?)을 하고 올라온 호경필은 다음부터 장보러 갈 때는 김복환의 꽁무니를 절대 놓치지 않았다고 한다.

정갑영의 무용담 또한 빼어놓을 수 없다. 태원이 형을 꽁꽁 묶어서 정광진만 남겨놓고 전대원이 달라붙어 길이 없는 산비탈을 길을 내면서 곧장 내려갔다. 아침에 출발하여 산 밑 천평 마을에 도착하니 오후 4시가 넘었다. 차가 들어오는 곳까지는 아직도 6킬로미터 나 남았다.
이대로는 너무 힘들 것 같아 시골에서 경운기를 운전한 경험이 있는 갑영이가 마을 이장한테 경운기를 빌려 후송하게 되었다. 그런데 잘 가던 경운기가 절벽을 낀 내리막 길에서 갑자기 속도가 빨라졌다.
내리막 길에서 한 번 빨라진 경운기는 겉잡을 수가 없이 내달리더니 점점 낭떠러지 쪽으로 가기 시작했다.
다들 놀라 “어? 어?”하더니 순식간에 뛰어내리고 갑영이만 낭떠러지로 진입하는 경운기 핸들을 계속 잡고 있었다. 대원들이 경운기를 뛰어 따라가면서 어쩔 줄을 모르는 사이 한 바퀴가 낭떠러지 쪽으로 벗어난 경운기가 가까스로 멈췄다.
갑영이는 새파랗게 기가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경운기에 당카 째 꽁꽁 묶어 있던 태원이 형은 아무 영문을 몰랐던지 “야, 왜 그래?”하며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태원이 형의 말

“나는 흔들리지 말라고 당카로 꽁꽁 묶은 채로 한참을 쿠당탕거리며 가는데 갑자기 우당탕거리며 대원들이 순식간에 뛰어내리는 거예요. 나중에 알고보니 경운기가 절벽으로 떨어질려고 하는데 글쎄 나만 꽁꽁 묶어놓고 전부 뛰어내린 거야. 다행이 운전하던 갑영이가 핸들을 잡고 간신히 정지했는데......” (<동국산악> 6호, ‘동악 35년의 회고와 전망’)

담배를 몇 대씩 피고 난 후 우리는 타기싫은 경운기를 그래도 또 타야 했다. 이런 많은 사건들이 있었지만 그래도 제일 고마운 것은 힘든 등반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따라준 당시 1학년 대원들이다.
얼마나 힘들었던지 3구간이 끝난 써포트 지점 예비일날 선배들은 저수지에서 낚시를 하며 망중한을 즐기는 사이 1학년은 자유시간을 허락받아 마을 어귀에 상점으로 가서 사이다며 과자를 사먹다가 집단탈출을 모의하고 도망가기로 결정하였다.
그 상점 앞이 버스 정류장이어서 버스만 타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행동으로 옮길 순간 “그런데 우리가 가면 저 짐들을 누가 다 지고 가지?”라는 누군가의 바보같은 질문에 부딪쳤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고 한다.
사실 나 자신도 지쳐 있었고 지리산이 너무도 멀리 생각되었던 것 같다. 그 다음날 우리는 가기싫은 걸음을 떼어놓았고 결국 4구간도 마치고 마지막 5구간을 단숨에 주파하여 머나먼 장정을 마쳤다.

3. 80년 마나슬루 등정

동국산악회의 80년도 마나슬루 등정은 새삼 논할 것도 없이 한국등산사에 큰 획을 그은 일대 사건이다. 한국은 그때까지 8,000미터 봉우리를 겨우 에베레스트 하나밖에 오르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도 범 국가적 지원 아래서 매머드한 대의 규모로 겨우 해낸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동국산악회가 단일 단위산악회로서 마나슬루를 오른 것은 동국산악회의 막강한 힘을 만 천하에 과시한 것이 아닐 수 없다.
한국으로서는 두 번째로 8,000미터급 봉우리 등정인 데다가 단일 단위산악회로서는 8,000미터급 봉우리 등정의 효시를 이룬 것이다.
이러한 영광은 결코 우연히 주어진 것이 아니며 동국산악회의 막강한 저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 저력이란 전통 속에 살아 있는 막강한 팀웍과 끊임없는 도전과 개척정신이다.
이인정(대장), 이영진(부대장), 김광진(등반대장), 유태원, 서동환, 양명수, 이종량 등 불과 7명으로 구성된 등반대는 그야말로 일당 백의 투지로서 우리는 한 번 한다면 한다는 정신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정상공격 당시 가지고 있던 서동환 회원의 다음과 같은 각오는 왜 동국산악회가 등정할 수밖에 없는가 라는데 대한 해답이 될 것이다.

“장갑을 벗으니 손가락에 물집이 생겼다. 동상이다. 아찔하다. 셀파들은 한국등반대는 마나슬루와 인연이 없다고 하며 동상을 구실삼아 철수하고자 종용한다. 그러나 동국대 마나슬루 등반대는 죽을 각오까지 하고 서울을 떠나왔다. 물론 내가 철수하면 3차 공격조가 편성되어 공격하겠지만 나에게 주어진 임무를 스스로 포기할 수가 없었다.”(<동국산악> 6호, ‘여기는 정상이다’)

이와 같이 동국산악회 마나슬루 등반대의 각오는 확고했다. 2차로 안되면 3차, 3차로 안되면 4차......죽을 각오까지 하지 않고는 실제로 8,000미터 등정은 보장되지 않는다. 한 번 해본다는 식으로 도전하지 않았던 것이다.

마나슬루 등반에 기록은 이미 많이 알려져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한동안 있었던 등정 시비에 관해 다시 한 번 언급하기로 한다. 서동환 회원의 등정 사진으로 보면 정점에 서있지 않고 정점 바로 아래 암봉 중간에 서있다. 이것을 두고 이견을 제시하여 정상봉 우리가 아니고 전위봉이라고 주장한 사람이 있었다.
이에 대해 본회에서는 1992년도 본회 회지 <동국산악> 6호를 통해 충분히 납득할 만한 자료를 제시한 바 있다. 여기서는 등정자인 서동환 회원의 말을 인용해 보겠다.

“제가 셀파 2명과 정상 부위 10여미터 암부 중간에서 사진을 찍고 바위틈새에 눈을 파고 태극기와 부기를 묻었습니다. 정상은 삼각 뽀족지점으로 당시 바람이 심해 그 위에 선다는 것은 생각도 못했고 일본팀 초등사진도 정상에 서지 않고 손을 쭉 뻗어 바위 끝에 매달려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따로 말이 필요치 않습니다......
정상 전에 있는 전위봉으로 인해 많은 논란이 있는데 내가 c5에서 올라가다 그 전위봉을 우측으로 보면서 지나갔고 또 그날 날씨도 쾌청해 정상으로 착각할 여지가 전혀 없었습니다. 셀파들과 제게 전위봉이다고 말하며 올라갔고, 그리스 베이스 캠프에서 찍은 정상처럼 보이는 피나클은 왼쪽 저 아래로 보였습니다.” (<동국산악> 6호, ‘동악 35년 회고와 전망’)

마지막으로 1980년 4월 28일 13:30 정상등정의 순간을 기록한 서동환 회원의 육성 증언을 들어본다.

“정상 가까이 온 것 같다. 고도계를 확인한다. 8,100m를 가리킨다. 셀파 아지와가 손짓을 한다. 고개를 들고 앞을 바라보니 정상의 암봉이 보인다. 마음이 조급해진다. 한걸음 두걸음 정상으로 향했다.
드디어 정상 암봉아래에 도달했다. 13:30분이다. 정상에 도착했다. 어려운 역경과 험한 길을 헤쳐 한국의 산악인이 마나슬루를 등정한 것이다.
셀파들과 포옹을 했다. 티벳쪽에서 강풍이 불고 있다. 오른쪽은 완전 90도의 절벽이다. 몸이 날아갈 것 같다. 무전기로 B.C.를 불렀다.
여기는 정상이다. 여기는 정상이다. 이인정 대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동국산악> 6호, ‘여기는 정상이다’)

[RETURN HO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