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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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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上無住의 지씨보살
김장호
‘상무주’란 삼정산 눈썹위에 올라앉은 암자이름이다. ‘삼정산’이란 또 지리산 북쪽가지에 솟은 봉우리 이름이다. 정확하게는 지리산 주능선의 중간지점이 되는 삼각고지에서 경상남도와 전라북도와의 경계를 가르며, 동으로 백무동과 서로 달궁골 뱀사골을 양옆구리에 끼고서 북쪽 실상사의 임천강까지 뻗어내리는 지맥 가운데 최고봉이 삼정산(1,225m)이요, 그 정상아래 놓인 정갈한 암자가 상무주(1,120m)이다.
따라서 상무주에서는 그 놓임새 덕분으로 천왕봉에서 일어 반야봉까지 활개치는 그 지리산의 전모가 한눈에 든다.
산에 들어 그 산을 바라볼 수 없는 바에. 그 산에서 벗어나서 땀으로 얼룩진 봉우리며 골짜기를 되돌아보는 맛은 한결 정겨운 것인즉, 더구나 웅(雄)하고도, 장(壯)한 지리산연봉의 파노라마를 이런 정확한 위치에서 일망무제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여간한 천생연분이 아닌 것이다.
하기야 지리산에는 이 밖에도 그만한 높이에 올라앉아 있는 사암(事庵)이 아주 없는것은 아니다. 그러나 반야봉 동쪽비탈에 놓인 모암앞이며 토끼봉 남쪽의 칠불암에서는 각기 지리산의 북쪽과 남쪽자락이 내다보일 뿐이다. 지리산을 멀리서나마 바라보기로는 또 함양의 백운산이 제격이지만, 거기서는 아무래도 거리가 있어 언감생심 시야에 드는 봉우리 구비구비에 실감이 나지 않고, 또 하나 가깝기로는 하동 청학동의 삼신봉이 있지만, 거기서는 우람은 할망정 지리산 동쪽 봉우리들만 쳐다보일 뿐이다.
높이에 올라앉은 암자이름으로도 ‘상무주’는 훨씬 고답적이다. 변전무쌍한 인간 세계를 굽어보며 깨달음을 얻는다면 지나치게 상식적인 해석이다. 그 모든 속세간의 애환을 초탈하여 안으로 그윽한 법열에 잠긴다는 뜻으로는 속리산의 상환암(上歡庵)이란 이름이 어울리지만, 일찍이 위아래없이 인간을 떠나서 인간의 본디를 깨친다는 수행자의 근본을 설파한 것은 원효의 대승육정참회(大乘六情懺悔)이다. ‘비록 머무는 곳 없을지라도 머물지 않는 곳 또한 없느니, 비록 행하는 바 없을지라도 행하지 않는 바 또한 없느니(雖無所住 而無子住 雖無所爲 而無子爲).’ ‘무주(無住)’에 관하여 <동국여지승람>에는 이런 사연이 전한다.
「보한집(補閑集)에 이르기를 무기(無己)라는 스님이 스스로 대혼자(大昏子)라 호하고 이 산에 숨어들었다. 장삼 한벌로 30년을 지내되 해마다 겨울과 여름에는 나다니지 않다가, 가죽띠를 허리끈 삼아 배에 두르고서 봄가을에만 그 배를 두드리며 산을 돌아다녔다. 하루에 서너말을 먹되 한번 자리에 앉으면 대개 열흘을 배기다가 일어나 가면서는 의례 게(偈)를 지어 읊었다. 산중에 70여 암자가 있는 중 한 암자에 한끼를 얻어먹고서는 꼭 게 한수씩을 남겼으니, 무주암의 게는 이렇다. 이승이 본디 무주(無住)인데 누가 이 집을 일구었는가, 오로지 무기만이 예외여서 가고 있고에 거리낌이 없다네. 말은 드물고 쉽지만 그 뜻이 높고 깊어 사뭇 한습(寒濕)의 흐름일세.」
보한집은 고려중기 최자(崔滋, 1188~1260)의 시화집이고, 또 끝머리 한습이란 한산(寒山)과 습득(習得)을 말함인 즉 두사람 다 중국 당나라때 선시(禪詩)의 고봉이다. 한편 이 무기스님을 가리켜, 그 자(字)를 영기(永己), 무의자(無衣子)라 한 고려때 진각혜심(眞覺慧諶 1178~1234)으로 추론한 이는 <다큐멘타리 지리산>의 저자 김경렬씨 이지만, 그 진각스님은 또 송광사를 처음 일군 불일보조(佛日菩照) 지눌(知訥, 1158~1210)에 이어 여기 상무주에서 3년간을 수도했다는 것이 기록에 전한다.
이 상무주 말고도 약수암, 삼불사, 문수암, 영원사, 도솔암 등 사암이 촘촘하여 그 이름인 여기 견성골(見性骨)에서는 까치 까마귀도 경을 외운다는 말이 전하지만, 그 아래 임천강 물고기는 또 등에 가사무늬를 걸쳤다고 하여 아예 그 이름마저 가사어(袈娑魚)라 부른다는 것은 이 역시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이다. 이중환(1690~1756)의 <택리지>에 쓰였듯이 이 골짜기야말로 ‘촌거(村居)와 승사(僧事)가 섞여 살았다’는 말도 빈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상무주는 지리산 북쪽기슭을 온전히 휘감아도는 임천강을 거슬러 마천도 가흥리에서 남으로 치오르되, 백무동계곡을 버리고 하정, 양정, 음정의 그 삼정리마을 끝에서 치올라 영원사를 거치는 것이 수월하다. 빗기재까지의 돌길도 운치가 있지만, 고갯마루에서부터 치오르는 등성이 가쟁이로 우거진 산죽이며 두세군데 날등을 타고 넘는 구비도, 헤벌어진 지리산 주능선길에 비하면 훨씬 소담스럽다. 삼정산 정상을 밟고 되내려 동쪽비탈로 감아돌면 저만치 암벽과 노승이 어울린 속으로 상무주가 추성리 출생이라는 임삼송(林三松)이라는 이의 <와유강산(臥遊江山)>이란 글에 실린 한시가 여기 정경을 이렇게 읊었다. 「머물데 없는 높은 암자가 벽공에 머물었으니 쇠북소리만이 백운속에 울리고, 시비소리가 미치지 않는 안개속에 속세간 티끌 정감을 쓸어내는 저녁바람이 인다.(無住高庵住碧空 錐聲兄在白雲中 是非不入烟 却盧情立晩風).」물론 조선조 초기에 함양 군수를 지내며 지리산을 두루 밟았다는 김종직(金宗直)이나 그 문하인 김일손(金馹孫)의 발길도 여기까지는 못미쳤다.
들어서지 말라고 뉘어놓은 버팀목을 굳이 넘고 들어서면, 자주 암자를 비우는 터라 36개 문과 창을 2중으로 봉해놓았다는 선방과 그 아래 법당에서 소릿기 없더니, 사진을 찍느라 뜨락을 서성거리는 한참만에야 안에서 보살이 하나 고개를 내어민다. 흠칫 놀라 미안한 기색을 보였더니 화사한 얼굴에 티없는 웃음을 흘리면서 고로쇠물과 당귀차를 툇마루에 내어준다. 흠씬 땀을 흘린 뒤여서 염치없이 그것을 단숨에 들이켰더니, 덩달아 그녀는 공양주답게 이번에는 또 부엌문을 열어뵈준다. 암자 뒤를 받쳐주는 암벽 밑구멍에서 사철 변함없이 솟아나는 석간수를 자랑하고 싶었던거다.
그러고 보면, 법당마루 천정에 껍질을 벗긴 옥수수가 송알송알 매달리고, 뒤란에는 또 겨울이 다 갔다는데도 여태 때고 남은 장작이 차곡차곡 쌓였다. 더 살펴보나마나 시주도 하나 얼씬거리지 않는 산꼭대기 암자 살림살이가 구석구석이 살뜰하다.
그러지 않더라도 5남매를 시집장가 다 보내고 영감마저 여의고 난뒤, 마천에서 사나흘마다 여기를 오르내린다는 지씨보살 얼굴에는 군살은커녕 어느 한군데 찌든 구석도 엿보이지 않는다. 산청의 덕천강상류 백운동에 산천제(山天齊)를 엮어 평생을 대쪽같은 기풍으로 지리산만 쳐다보고 산 그 조식(曺植, 1501~1572)도 ‘백수로 돌아와서 무엇을 먹을꼬, 10리 은하수가 먹고도 남겠네(白首來何 物食 銀柯十 有)’하지 않았던가 산자락의 절깐바다가 기복(圻福)신도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는 마당에, 호젓하다못해 적막하기만 한 여기 상무주에서 지리산을 통째 쓸어안고 앉았으면 사실 배고픈 것도 잊게 될지 모른다.
77살이라는 나이가 거짓말같은 지씨보살은 그런데도 아무것도 ‘몰라요’일색이다. 스님은 어디 갔느냐고 물어도 모른다더니, 소리치면 메아리가 되돌아올 것 같은 벽소령 곁의 봉우리 이름도 ‘몰라요’다. 도시 까막눈이라는 그녀가 처마끝에 걸린 ‘上無住’라는 현판글씨를 누가 썼는지 알까만, 그 치졸하리만큼 비툴비툴한 경봉스님의 떼를 벗은 글씨에서 눈을 떼지 못한채 듣고 있느라면 그녀의 ‘몰라요’가 ‘沒我要’로 들린다. 체하는 그 나를 벗어버려라는 꾸지람같다. 달통하면 알량한 지식나부랑이도 한갖 남루한 껍질이거니, 차라리 무구(無垢)의 경지에서 눈앞의 천지를 자유로이 헤엄칠 수 있다는 것일까. 그렇지, 이 높이에서야말로 ‘속세간 탐욕을 벗어나 비로소 눈앞이 활짝 트이는 것(非貪)’일지도 모른다.
아니 거꾸로 지씨보살처럼 눈앞이 탁트인 여기 상무주에서 저도 모르게 탐욕을 벗어던지게 된 것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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