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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동대 산악부, 히말라야 그리고 나
오국근
1980년 5월에 나는 인도 뉴델리에 있는 네루대학에서 교환교수로 인도학생들에게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가르치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 서울의 본교에서 전보가 한통 날라왔다. 「본교 산악부가 마나슬루 등정에 성공하여 카트만두로 돌아오고 있으니 곧바로 카트만두로 가서 환영해 주기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부랴 부랴 카트만두에 도착하고 보니 카트만두가 온통 동대의 등정 성공에 들끓고 있었다. 눈에 검게 탄 수염투성이의 이인정 대장을 비롯한 일곱명의 대원들과 멀리 서울에서 환영차 나온 설조스님(재단), 최재구의원(동창회), 정진영동문(산악회), 그리고 학교를 대표한 내가 어울린 우리 동국대학교 산악부(회)팀은 몇 안되는 현지 교민들의 따뜻하고도 융숭한 대접을 받으면서 그야말로 「마나슬루 높다 하되 동대 아래 뫼이로다」의 기상을 한껏 떨쳤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마나슬루가 어떤 산인가.
우리나라 전체 산악인들의 세 번에 걸친 도전에도 꿈쩍하지 않고 아까운 산악인들을 20여명 그대로 삼켜버린, 우리나라 산악인들에겐 문자 그대로 눈물의 산이요, 원한의 봉우리가 아니었던가. 그것을 단일 대학팀이 등정에 성공했으니 우리나라 산악사에 큰 획을 그은 역사적 쾌거라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사흘간 카트만두에 머물던 우리 일행은 삭막한 카트만두 공항에서 전송하고 나는 혼자서 네팔에 사흘 동안 더 머물다가 뉴델리로 돌아갔는데 이 일이 바로 동대산악부, 히말라야, 그리고 나의 인연의 시작이 되리라고는 미쳐 몰랐던 일이다.
나는 동대산악부와는 아무런 인연이나 관계가 없이 지내왔다. 동대산악부가 창설된 1958년은 바로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한 해였기 때문에 산악부 창설과 활동을 그저 곁에서 듣고 구경만 했지 공식적으로는 어떤 관계를 맺지를 못했던 것이다. 단지 최영식, 정진영 동문 등 산악부 관계자들과 개인적인 친분을 갖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인도에서의 교환교수 생활을 마치고 귀국후에도 여전히 산악부는 직접적인 관계를 갖지 못한, 말하자면 남이였다. 그러나 남치고는 매우 친숙한 남이었다. 마나슬루 이래 산악부(회) 사람들과의 개인적인 친분은 더욱 두터워졌을 뿐만 아니라 근 20년을 맡아 온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나는 동대산악부와 그 역사를 동대의 가장 자랑스러운 전통의 하나로서 극구 찬양해온 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80년 중반(기억이 확실치 않다)쯤 느닷없이 최영식 회장등 산악회 간부들이 나를 찾아와서는 산악부 지도교수를 맡아 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때 수중탐험부 지도교수를 맡고 있던 나는 입장도 거북하고 해서 사양했더니 막무가내로 맡아야 한다고 떼를 쓰다시피해서 억지춘향이 격으로 어떨결에 산악부 지도교수라는 막중(?)한 자리를 맡게 되었고 그러므로서 산악부(회)와 공식적인 관계를 본격적으로 맺게 되었다.
그후 10여년 산악부와 산악회 활동에 내 나름대로 정성을 쏟았지만 너무나 보잘것이 없어 부끄럽기만 할 따름이다. 그러는 중 1989년에 우리학교의 이름을 건 최초의 히말라야 원정대가 장도에 올랐을 때 나는 박영석, 윤태영, 김형우 군들과 함께 겁도 없이 따라 나섰다. 랑탕리룽의 베이스캠프에 가는 도중 제일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이름도 없는 마을(마을 이래야 집이 다섯채 정도이다)의 롯지에서 근 보름을 혼자 있으면서 원정대의 성공 소식만을 기다리는 동안에 히말라야의 자연과 생활의 여러가지 신기한 모습들을 체험하였다. 예정보다 일찍 등정에 성공하여 돌아온 대원들과 함께 돌아오는 길은 무척이나 흐뭇하였고 즐거웠다. 그후 1993년에는 우리가 그렇게도 바라고 기다렸던 에베레스트 원정대가 조직되어 출발하였는데 대원은 박영석, 이종량, 김진성, 김형우, 남원우, 안진섭, 김태곤군 7명이었다. 일행이 떠난지 한참 지난후 나는 혼자서 카트만두로 가서 베이스캠프를 찾아 나섰다. 루크라까지 비행기로 가서는 포터 한사람을 데리고 베이스캠프까지 가는 지루한 산행이 사흘간 계속되었는데 마지막 코스인 로브제에서 베이스캠프 가는 험난한 길목에서 폭설을 만났을 때 포터를 미리 보낸 바람에 길을 잃고 하마터면 큰일을 당할 뻔 했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앞이 아찔하다. 에베레스트 등정 50주년을 맞아 각국에서 모여든 16개팀의 공식 대원중에서 나는 최고령자라 하여 외국팀에서도 대우를 톡톡히 받았는데 마침 우리나라에서는 우리 동대팀 말고도 여성팀, 전북연합팀이 와서 한국의 국력과 실력을 한껏 과시하고 있었다. 아침마다 우리팀을 비롯한 모든 팀들의 안전과 성공을 불교식으로 기원하면서 열흘 가량 베이스캠프에서 지내다가 마침 그곳까지 온 한국 트레킹 대원들과 함께 하산하였다. 학교가 허가한 출장기간 때문에 혼자서 귀국하여 성공소식을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데 예정보다 한달 가량 뒤에 성공의 기쁜소식이 들려와 환호성을 올리고 있는데 바로 뒤따라 들려온 소식은 이 무슨 날벼락인가. 남원우군과 안진섭군이 조난당했다는 기막힌 소식이였다. 제2캠프에 있던 나는 남원우군과 매일 워키토키로 교신할 때 남군이 「교수님 이곳까지 꼭 한번만 올라오세요」하던 목소리가 지금도 귀에 남아있고 하산때 절을 하고는 손을 흔들던 안진섭군의 모습이 눈에 선한데 그 두사람은 끝내 에베레스트에 젊음을 불사르고 돌아오지 못하고 만것이 정말로 가슴아프고 안타깝다. 삼가 남군과 안군의 명복을 빈다.
다시 1997년 바로 작년 봄에 다울라기리 원정대가 학교의 지원에 힘입어 떠날때 나는 또 따라나섰다. 박영석, 김헌상, 김대원, 정광교군 등 먼저 떠난 대원들을 뒤쫓아 이인정 산악회장과 나는 카트만두를 거쳐 포카라에서 등정을 기다리는데 날씨가 계속 나빠 일정을 미루고 코스를 바꾸는 바람에 베이스캠프 가는 도중에 나는 혼자서 하산, 귀국하였다. 무사히 등정에 성공하여 귀국한 대원들과 학교 아래 「강서」에서 등정 성공의 조촐한 자리를 가졌는데 가만히 꼽아보니 히말라야와 동대산악부와 나의 인연도 제법 깊다하지 않을 수 없다. 남들은 한번도 가기 힘들다는 히말라야, 히말라야를 배경으로 한 어느 영화의 포스터에 나와 있다는 명언대로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그 히말라야를 직접 밟아 본것이 벌써 세번인데 이것이 모두 동대산악부와의 인연 덕이라 생각하니 동대산악부와 산악회, 그리고 모든 회원들이 참으로 고마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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