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

II. 8000m 와 박영석
김환민

산악부를 처음들어와 말도 안되는(?) 짐을 메고, 산행을 하면서 산이 아닌 인생의 쓴맛을 알게 되었고, 그런 쓰디쓴 인생을 강요하는 이상한 무리들속에 유난히 한삶의 목소리는 크게 들려왔다. 그 사람은 동대 산악부를 들어오기 위해 재수를 하면서까지 다른 많은것을 포기했다고 했다. 믿을 수 없는 얘기. 적어도 그때는 그랬다.

몇년이 지난 지금 그는 아직도 가끔씩 부실에 찾아와 신입생이라 인사하는 후배들에게 같은 얘기를 한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그얘기에 아무런 의심을 느끼지 않는다. 사실이든 아니든 그건 중요치 않다. 그간 그가 보여준 산에 대한 정열과 동대산악부를 통해 보여준 애정은 그 이상의 많은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박영석(83학번)회원. 그가 이 글의 주인공이다. 이미 영석이형은 한국산악계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인물. 하지만 지금 글을 쓰고자 하는 인물은 그렇듯 화려한 스폿트라이트 아래서의 어쩐지 낯선 그가 아니라 희가에 나와있듯이 한핏줄 동악의 가족으로써 그를 대하려고 한다.

수없이 많은 산행을 해왔고 앞으로도 많은 계획을 가지고 있는 그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산행은 무얼까? 영석이형은 기억하기도 힘들텐데.... 사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동악회원 모두에게는 결코 흐릿해질 수 없는 기억의 한 순간들일 것이다. 1학년 동계때라 얘기했다. 마장동 수도여관에서 선배들의 환송식으로 밤새 술을 마시고, 다음날 마산 정상까지 올라가는 내내 과도한 되새김질을 했다고 한다. (뒤에서 들려오는 괴성과 함께 몽롱한 정신속에 아른거리는 흡사 도깨비 방망이는 얼마나 너울너울 춤을 추었을지) 그때 그곳에 뿌리고 온 술이 아까워 그랬는지 그 이후 영석이형은 2학년 집회때마다 발그스레한 얼굴로 참석을 해서 부가 중간중간 구령을 붙여가며 열창을 했다고 그당시 남산의 부장님(KP)이 증언을 했다. 엄숙한 집회분위기와는 전혀 맞지 않는 당돌함에 형들은 오히려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사실 집회날 술을 먹는 일은 얘나 지금이나 동악의 전통. 영석이형은 단지 남들이 집회후에 먹는 술을 집회전에 미리 속을 풀어 둔 죄밖에는 없을것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혹시나해서 찾아보았지만 회칙에도 집회전에 술을 먹지 말라는 조항은 없다.)

본격적인 질문에 들어가 영석이형의 해외원정에 대한 계기를 물었다. 첫원정은 85 일본 동계 북알프스. 영석이형과 성훈이형(83)은 다른 대원과 같이 동계도 같이 못 들어가고 원정 참가 대원들의 여권마련과 다른 모든 준비를 했다. 당시 여권 발급은 매우 까다로운 절차. 겨우 겨우 모든 대원의 여권을 마련했지만 진성이형(83)의 개인사정으로 등반을 함께하지 못해 가장 아쉬웠다고 한다. 그해 일본의 겨울은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다고 한다. 북알프스 등반도중 눈사태에 휘말려 많은 사람이 죽었고, 다른 모든팀들이 고개를 젓고 돌아서는 다소 무리한 여건 속에서 그들은 등반을 성공리에 마쳤다.

영석이형은 그 이후, 군대를 갖다와서 본격적으로 원정에 대한 꿈을 실현해 나간다. 알프스(아이거 북벽), 랑시샤리 Ⅱ, 랑탕리 동계초등, 코뮤니즘, 에베레스트무산소 등정, 칸텐그리, 맥킨리, 시샤팡마/초오유, 안나푸르나, 다울라기리, 로체, 가셔브롬Ⅰ, Ⅱ, 마나슬루. 나열하기도 힘들만큼의 숱한 원정. 중간 중간 겪게되는 많은 시련과 역경 그리고 슬픔.......... 이 모든것은 필자 임의로 생략하기로 하겠다. 영석이형은 원정 초창기, 철저하게 등정주의 보다는 등로주의를 추구했다. 그래서 많은 원정에 비해, 남들이 얘기하는 8,000m급 봉우리와는 거리가 있었다. 그런데 어느순간 자신이 준비하는 원정에 쏟는 열정과 노력, 시간, 경비등을 100으로 보면 같은 100의 노력으로 8,000m급 원정을 한번 더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런 생각끝에 제작년(96년) 영석이 형은 한해 6개봉 8,000m급 등정을 목표로 준비하기 시작했고, 지난해(97년) 세계 어느 누구도 해내지 못한 ‘한해 8,000m급 6개봉 등정’을 이뤄낸 것이다.

그런 그였지만 올해 IMF라는 정복이 불가능해 보이는 거대한 산을 대하고 당황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전부터 돈에 여유가 있어 산에 다닌것은 아니었다. 산을 향한 끊임없는 정열과 불굴의 의지만이 그가 가진 유일한 재산이었다. 그는 올해에도 조심스럽게 원정을 준비하고 있다. 그리고 주변에서 항상 도움을 주시는 분들께 가족에 대한 사랑은 산을 향한 믿음 만큼이나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듯 했다. 그는 부모님께는 죄인이라 말한다. 원정을 나갈때 현관앞에 누우셔서 당신을 밟고 가라 하시며 결사적으로 말리시는 어머님을 뒤로 한채 끝내 공항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던 그였지만 그런 부모님의 걱정을 너무도 잘 알기에 항상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부모님앞에 나타나는 자식의 마지막 도리도 잊지 않았다.

짖궂은 생각에 성우/성민(두 아들네미 이름)이가 나중에 커서 전문 산악인이 되겠다고 한다면 어떻게 하겠냐는 질문에 영석이형은 전혀 뜸을 들이지 않고 대답했다. ‘팍팍’밀어 주겠노라고. 그는 정말 산을 사랑하는 것 같았다. 아니 그보다 우선해서 얘기하는 중간중간 동악을 진정한 가족이라 여기는 당연한 논리에 나 자신은 순간 뜨끔함을 느꼈다.

영석이형은 항상 신선한 느낌을 준다. 얼굴이 깨끗하고 좋은 화장품을 쓰기 때문이 아니다. 언제나 새로운 도전에 목말라 하고, 긴장하는 모습에서 세월을 잊고 사는 듯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원한 물 한잔이 아니라, 정상을 향해 끊임없이 도전하며 타오르는 갈증일 것이다.

東岳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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