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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북한산 백운산장과 이영구
윤길중
바쁜 도시생활에 쫓기어 생활을 하다보면 자연에 대한 그리움은 점점 주체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 인지상정인가 보다. 문명이 발달하고 그속에 안주하는 것이 행복이라 믿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건강한 정신속에서 늘어가는 것을 보면 그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도심의 대명사로 불리우는 서울의 가운데서 평생을 산과 같이 생활해오신 분이 있다.
이글을 읽고계실 많은 선배님들을 비롯해 산을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백운산장지기 이영구씨를 아실 것이다. 그분의 삶의 조명을 통해 백운산장과 북한산의 현대사를 엿보고자 한다.
백제 침류왕 2년부터 지금의 백운산장터에는 백운암이라는 암자가 있었으며 이 암자터에 1920년대 초에 이영구씨의 조부님이 북한산에 들어와 약초를 캐시며 근근히 생활해 오다가 등산객이 간간히 있었으며 이러한 등산객들이 그야말로 집도 절도 없는 막막동산에 대고 절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때 비로소 그곳이 과거 백운암의 절터였던 것을 아시고 그 터에 산악인들과의 의기투합으로 움막을 지으셨고 헐렸다 지었다를 몇차례 하던차에 1933년 경성영림소의 묵인하에 번듯하게 건물을 지으셨다.
그 어려운 시절에 산장에서 무얼 먹고 사셨을까 걱정하는 후배들의 노파심어린 질문에 과거에는 쌀, 불, 소금만 있으면 얼마든지 살 수 있다고 믿었던 시절이라 그런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1948년 해방의 기쁨도 잠시, 할아버님은 우차에 치이시어 돌아가셨다. 할아버님의 대를 이어 아버님이 산장운영을 맡게 되셨다. 해방이후 한국산악계의 면모는 조금씩 갖추어지기 시작했다. 한국산악회 초창기 멤버들이 산장에서 같이 묵으며 활발한 산행을 했으며, 6.25당시에는 정보원이 산장으로 피신해 지내기도 하였고, 또 한번은 나중에서야 자기 신분이 문교부 차관이란 것을 밝힌 사람이 은거하기도 했는데, 이 일로 인해 6.25당시 오해를 받아 보위부에서 악질이라며 사형을 당할 뻔도 했으나 그때당시 산장에 자주들르던 사람중에 고위에 있는 사람이 말하길 산에서는 그러한 일 - 물고픈 사람 물나누어주고, 배고픈 사람 밥나누어주고, 잘곳없는 사람 재워주고 등 - 은 당연한 것 아니냐며, 이사람(이영구씨 아버님)은 절대 악질이나 그런 부류의 사람은 아니다. 내가 보증을 서마하고 이해를 시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셨다. 이영구씨의 아버님은 산에 올라오신지 일주일만에 돌아가시게 되었다. 산장은 폐허가 되어 다시 지어야 했으나 지을돈도 없고 막막하기 그지없을 무렵, 서울산악회(초대회장:정인호 옹)와 한국산악회 원로들이 그동안 선친의 신세를 갚을 좋은 기회라며 산장짓는 일에 많은 도움을 주어 4년에 걸친 끝에 60년에 산장을 완공하였다. 이렇게 되므로써 ‘백운산장(白雲山莊)’이란 공식명칭을 비로소 갖게 되었다. 그 이후 긴 세월 백운산장은 많은 산악인들에게 쉼터를 제공하고, 북한산을 찾는 모든 이들에게 마음의 고향이 되어갔다. 그러던 중 지난 92년 6월 버너사용의 부주위로 화재가 발생하여 산장지붕이 타버리는 사고를 당한다. 다행히 사상자는 없었지만 그로인해 한동안 천막용 포장으로 지붕을 대신해야 했다.
그래서 산장을 새로 건축해야만 했는데 국립공원과의 마찰 - 국립공원내 건축물이므로 국립공원이 관리해야 된다. 3대 아니 4대째 지켜온 것이므로 기득권을 보장해야한다. - 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결국 산장을 20년후에 국립공원에 넘겨준다는 기부체납형식으로 약정한 후에야 재건축에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백운산장은 국내 국립공원내 유일한 사유산장이며 또다른 역사적 의미는 남한 최초의 산장이라는데 있다는 설명이다. 그리하여 백운산장을 아끼던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모으기 시작했고, 기금마련, 그밖의 후원, 심지어는 북한산을 다녀갔던 일본산악회에서도 백운산장 재건축에 도움을 주어 95년말에 지금의 백운산장으로 새단장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기억에 남는 구조작업이 있으셨느냐는 질문에 이경구씨는 71년 11월의 기억을 더듬는다. 71년 11월 28일 일요일, 그때를 너무도 생생히 기억하고 계셨다. 저물어가는 가을이기는 했지만 그날은 날씨가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많은 바위꾼들이 이번 암벽등반이 올해의 마지막 등반기회라고 생각하여 암벽등반에 나섰다. 그런데 산날씨의 변덕으로 인해 오후 2시부터 갑자기 추워지기 시작했다. 일찌감치 많은 사람들이 하산을 했지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인수봉 정상에서 하강을 하려고 아우성쳤고, 하강을 하기위해 깔아놓은 자일이 강풍에 휘날려 서로 엉키면서 비극은 시작이 되었다. 이영구씨는 당시 산장에 있다가 하산한 산악인의 인수봉 조난소식을 접하자 즉시 인수봉으로 달려가 구조를 시작했다. 50여명에 이르는 조난객들은 강풍과 추위때문에 모두가 몸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져 있었다. 불을 지피고, 뜨거운 물을 주고, 맛사지를 하는 이영구씨의 손마저 얼어붙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당시는 전화가 없었으므로 구조활동을 하면서 하산하는 산악인에게 내려가거든 파출소에 조난신고를 하라고 일러 라디오와 TV에 조난이 알려지고, 결국 9시경에야 구조대가 올라와 구조를 했건만 인수봉 후면으로 하강도중 자일이 엉켜 죽은 5명의 시신과 구조의 손길을 기다리지 못하고 동사한 2명등 총 7명의 사상자를 낸 조난 사고였다. 과거에 지금처럼 당장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면 모두가 생명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이영구씨는 말한다. 결국 오후 11시 40분경에야 구조작업이 끝났으나 자일에 매달린 시체가 바람에 흔드럭 거리는게 꼭 살아있는 것만같아 뒤로하고 발걸음을 떼기가 어려웠다고 그때당시를 회고하신다. 멋모르고 한 구조지만 그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하신다. 그이후 기묘하게도 하강하다가 죽은 그 사람들의 자일로 72년 겨울 18명의 목숨을 구하기도 했으며 84년 구조대가 결성되기까지 여러번의 도움으로 많은 인명이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영구씨에게는 경구씨라는 동생분이 있다. 형님과 아우가 함께 백운산장을 관리하던 1960년대만해도 등산을 와서 나무를 잘라 모닥불을 피우는 사람들이 많았다. 도끼찍는 소리만 나면 달려가서 도끼를 빼앗은 후 하산할때 되돌려 주곤했는데 당시 막대기를 들고 다니며 나무자르는 것을 말렸기 때문에 ‘나무 막대기’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는데 도끼를 하루에 12자루까지 빼앗은 적이 있던 적도 있었다고한다. 지금의 백운산장 근처에 그래도 나무들이 숲을 이루는게 그때당시 욕먹어가며 도끼를 빼앗은 덕이 아닌가 하는 설명이다. 언젠가 한번은 명동 깡패들이 북한산 위문에서 오가는 등산객들의 금품을 빼앗으며 생활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산악인들과 힘을 합쳐 위문에 있던 깡패들을 백운산장에서 위문 올라가는 코스로, 또 한팀은 백운대에서 위문가는 코스로, 나머지는 만경대에서 위문가는 코스로 3면 공세작전을 펴 산에서 깡패를 쫓아버린 적도 있다고 한다. 또 산장을 운영하면서 생겨난 수많은 쓰레기들을 작은 봉투에 조금씩 나누어 담아서 내려가는 등산객들에게 요청을 하니 산더미같이 쌓였던 쓰레기를 게눈 감추듯 사라졌다며 산악인들의 단합된 힘이 있는 한 우리의 산은 황폐화되지는 않을 거라고 말씀하신다.
이영구씨는 65년 4월 25일 백운산장에서 결혼식을 올려 화제가 되기도 했다. 냉수 한그릇을 떠놓고 결혼식을 올리려 했으나 산장을 자주 이용하던 산악인들중에 이 소식을 동아일보에 게재하면서 백운산장과 인연이 있던 모든이들에게 알려지면서 물 한그릇 떠놓고 하려던 결혼식은 아주 성대한 결혼식이 되어버린 것이다. 왜냐하면, 하켄클럽은 양복과 넥타이를 선물했고, 수도여고 산악부에서는 신부한복과 신부화장을, 한대 산악부는 신부반지를, 피톤클럽에서는 밥상, 장비제작의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던 윤상근씨는 밥그릇을, 주례를 맡았던 이숭녕박사는 Y셔츠를 선물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슬하에 2남 2녀를 두고있고, 그중 장남인 인덕씨는 아버님을 대신해서 산장을 지키고 있다.
점점 메말라가는 사회속에서 산사람들의 인심만큼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후하다고 말씀하시는 이영구씨. 산에서 맺은 인연이 시내보다 훨씬 더 정겹고, 모두들 현대의 메마른 인심을 산에서의 정(情)으로 채워갔으면 하고 바램의 말씀을 잊지 않으신다. 젊었을때 너무도 무거운 짐을 지고 산을 자주 오르다보니 지금은 무릎이 안 좋으셔서 일주일에 한 두번 정도밖에 백운산장에 못 들르신다고 한다. 산은 예전과 다름없이 그곳을 지키고 있지만, 사람인 그는 세월의 흐름에 밀려 그곳을 떠나있긴 하지만 평생 그래왔듯이 산장뒤의 우직한 백운대처럼 그는 영원한 산장지기로 우리 산악인들 곁에 머물러 있을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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