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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단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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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거리, 마실거리 그리고 주전부리 / 이구용(62)
<한국에서의 산행> 1. 날두부와 김치 <사진원본 이구용_1><사진설명:65년1월 북한산 비봉 진흥왕 순수비 앞에서> 64년 늦겨울, 록클라이밍 파트너인 권오찬(현재 LA 거주), 양영삼과 가벼운 일요일 하이킹 코스를 북한산성 비봉으로 잡고 자하문 밖 버스 종점에서 만나 출발했다. 아직 잔설이 적지 않게 남아있었는데 문수암을 거쳐서 비봉으로 향하는 능선은 찬바람이 제법 드세었다. 중간지점 쯤이었을텐데 점심시간이 좀 지났던 듯, 갑자기 시장기가 느껴지는가 했더니 위장을 쥐어뜯기라도 하듯 허기가 오는 것이었다. 하긴 아침에 서둘러서 집을 나서느라고 물 한모금 안마셨던 터였다. 일행의 배낭 속을 점검해 보니 요리안하고 그냥 요기할거라곤 날두부 2모와 병에 담아 온 김치가 전부였다. 안면몰수하고 게눈 감추듯 찬두부와 김치로 요기를 하고 나니 살것 같았다. 그 코스가 수년 뒤 북괴군 124군 부대 김신조 일당이 침투해서 청와대를 목표로 행군하던 중 경복고교 뒷담까지 도달했다가 아군 군경에 의해서 괴멸되었을 때 이용되었던 코스였다. 아무튼 이후부터 우리들 사이에 누구 입에서든 ‘날두부’소리만 나오면 그때 일을 떠올리고 서로 웃곤 했다.
2. 장구벌레와 원효대사 63년 한라산 하계는 임신철 부장을 비롯 박병일선배 등 부원 22명이 참가, A팀은 제주-관음사-탐라계곡-백록담에 오르고, B팀은 중문리 천제연에서 시작, 오백나한을 거쳐서 백록담에서 A팀과 합류하여 함께 서귀포로 하산할 예정이었다. B팀인 우리는 천제연의 우람하고 시퍼런 폭포물의 유혹을 못이겨 실컷 수영을 즐긴 후 출발이 좀 늦어져서 오후 반나절을 뙤약볕 아래 강행군 한 끝에 해가 질 무렵 겨우 해발 1,300미터 지점의 밀림지대에 캠프를 설치할 수 있었다. 허기가 질대로 진 터라 취사가 급선무였는데, 다행이 멀지않은 바위 틈 사이에서 용케도 물을 발견, 밥을 지어 먹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튿날 날이 밝은 후 그 물속을 들여다 본 우리들은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구벌레들이 우글거리는 게 아닌가! 해골바가지에 고인 물을 마셨다는 원효대사의 고사를 연상하고 쓴 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3. 암치국과 양양 약주 64년 설악산 하계는 수락산우회를 이끄시는 당시 동대산악부 지도교수 정종 선생의 권유로 내가 가이드를 맡았다. 정교수님은 설악산에 베테랑이시지만 대원들 중 전남대 노교수님, 박세영 변호사 내외분 등이 고령인 점을 감안하여 기본코스인 백담사-오세암-봉정암-대청봉-마등령-신흥사 코스를 택했다. 일은 2박째인 오세암터에서 저녁 취사준비 때 생겼다. 박변호사 사모님과 저녁거리를 꺼내던 중 며칠전 남대문 시장 건어물상에서 사온 암치에서 꼬물거리는 생물체들을 맞닥뜨린 것이었다. 순간 박사모님은 얼른 내 입을 손으로 막으시며,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데 뭘 그래.” 하시고는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말란다. 그 날 저녁 식사 때 암치국에는 눈길 한번 안주었던 건 불문가지다. 포식하던 대원들에겐 못내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지만. 하산 후 양양의 술도가에서 구입한 약주 한 말은 술맛이 하도 좋아서 윤길중 형제 등 젊은 대원들과 경포대 해수욕장까지 두고두고 음미하던 생각이 난다.
4. 라면 중식과 똥돼지 <사진원본 이구용_2><사진설명:안개낀 노고단에서의 휴식 앞줄 왼족부터 윤용규, 이규복, 이구용, 유부열, 이영구, 뒷줄 왼쪽부터 고수명, 이중웅, 박진혁, 정광조 대원> 64년 하계 지리산 종주 등반때는 애당초 계획이 중식 메뉴는 그때 막 시중에 인기를 얻으며 시판되던 라면으로 하기로 하고 여러 박스를 구입해서 포장했다. 초기의 라면은 튀긴 기름의 질이 좋지 않은 터라 등반 이틀째 중식부터는 끓인 라면의 냄새와 기름맛에 비위가 상해서 아무도 젓가락질을 안했다. 의논 끝에 만장일치로 라면박스는 무더기 폐기처분됐다. 구례 화엄사를 출발 노고단 1박, 벽소령-장터목-세석평전 1박, 천왕봉 정상에 섰다가 백무동 깊은 골짜기로 하산, 민가집 뜰에서 저녁식사를 준비하는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눈이나 갓 떴을까 한 도야지 새끼들 7,8마리가 우르르 마당으로 나와 천방지축 노니는게, 아마도 우리가 끓이는 고기국 냄새를 맡았나 보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 화장실에 갔다가 기겁을 하고 내렸던 팬츠를 황급히 올리며 밖으로 튀어나왔던 건, 바로 어미돼지가 예의 장소에 버팅기고 있음을 알아챈 순간이었다. 육지에도 또다른 제주도가 있었을 줄이야......
5. 밀전병과 고염 <사진원본 이구용_3><사진설명:희양산 암벽코스 개척팀, 앞줄 왼쪽부터 이영구, 故김진수 뒷줄 왼쪽부터 강성윤, 김재경, 故김충배, 이구용> 64년 11월 문경소재 희양산 암벽코스 개척 때는 타계하신 김진수 형님이 리더로 마포형(고 김충배)과 강성윤군 등 6명이 그때까지 국내 최대의 바윗덩이로 알려져 왔던 울산암과 비견할만한, 아니 덩치로서는 그보다 더 크다고 할 암벽의 루트 탐색에 나섰다. 그 때 중식으로 준비한 것이 마포형이 주도한 밀전병 부침개였다. 암자에서 그 전날 저녁식사 후 열심히 부쳐놨던 게 이튿날 종일토록 일행이 바위에 매달려 사활을 걸었을 때 먹은 것의 전부였던 것 같다. 코스를(뒤에 D-1코스로 명명) 거의 마친 지점에서 날이 저물어 두 팀으로 나누어 비박을 했다. 이튿날 새벽 마지막 피치를 끝내고 올라가보니 바위틈에서 나무를 때고 새우잠을 잤던 강성윤, 이영구, 김재경군 등은 연기에 그을려서 그야말로 너구리 삼촌들이 되어있었다. 지친 몸을 끌고 하산 길에 보니 민가 몇 채 있는 마을 빈터 나무에 잘익은 주)고염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게 아닌가. 이게 웬 떡이냐고 모두들 달려들어 허기졌던 배를 고염으로 채웠을 즈음 일이 터졌다. 설은 감 먹었을 때처럼 떫기도 하고 아리기도 한 입안을 처리할 수가 없어서 쩔쩔매며 봉암사에 당도했는데 까닭을 물으신 스님이 묘방을 일러주셨다. 생무를 먹으라는 거였다. 절간 밭의 김장무 뽑고 남은 게 있어서 깎아 먹었는데 그건 정말로 신통한 처방이었다. 주) 고염 : 소시(小枾) 혹은 우내시(牛?枾)라고 하는데 엄지손톱 굵기만한 앙증맞은 감모양의 열매가 지천으로 달린다. 열매는 딸국질을 멎게하는 하는 약제로도 쓰였으며 감나무를 접붙일 때 대목으로 쓰인다.
6. 과일바구니와 파인애플 <사진원본 이구용_4><사진설명:동포(東埔)에서 바라본 타이완 위산(3,997m)> 65년 1월 중국청년등산협회의 초청을 받아 한국특수체육회 학생산악연맹의 일원으로 박철암(경희대교수)교수를 대장으로 타이완 위산(3997m)에 원정갔을 때다. 대원은 원정희(경희대 산악부장), 전황규(고려대 산악부장), 손용일(성균관대 산악부장), 한균달(중앙대 산악부장) 그리고 동국대의 나였다. 타이베이에서 각 대학 방문과 등반준비로 5박한 후 타이완 중부의 자이시를 거쳐 등산열차편으로 아리산역에 도착, 유명한 아리산(2265m) 원시림대를 지나 이틀동안의 캐러번 끝에 해발 3천미터의 설선 부근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했다. 고산병 증세에 시달리면서 다음날부터 위산을 비롯한 주변의 높은 봉우리들을 차례로 올랐다. 하산길에 타이완 제일의 큰 호수 일월담을 둘러보고 조그만 시골마을 식당에서 중식을 마친 후 밖으로 나오는데, 주방에서 중년 여자분이 따라 나오셨다. 알고보니 한국인인데 한국말은 한마디도 못하시고 박교수와 중국어로만 대화가 가능했다. 부산이 고향으로 19살에 중국인 남편에게 시집와서 30년 살았는데 그 이후로 한국사람을 처음 만났다며 눈물만 흘리시는 거였다. 우리의 등산복에 부착된 태극마크를 보고 알았을 터였다. 타이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아주머니가 열대과일을 한 바구니 잔뜩 사서 주시며 찻간에서 먹으라고 한다. 계속 눈물이었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달리면서 한동안은 계속 눈물이 나왔다. 타이중을 거쳐 타이베이로 귀환한 며칠 후 귀국하기 위해 전세기를 타러 타이베이 공항에 나갔다. 여기서 또 한번 해프닝이 있었다. 발단은 같은 전세기로 함께 타고와서 타이완의 주요도시들을 돌아다니며 시범체조를 보여준 경희대 기계체조단이 조영식 총장께 드린다고 파인애플, 바나나 등 열대과일을 한 보따리 준비했는데 검역을 안받아서 비행기에 못 싣고 폐기처분해야 된다는 거였다. 할 수 없이 모두들 먹어치우기로 했다. 내 평생 바나나로 배를 채운 건 그 때였다.
7. 동태국과 김치찌개 <사진원본 이구용_5><사진설명:대관령 스키장의 내차항 슬로프에서 박경태(오른쪽 당시 육군 스키부대 소속)군과 함께> 68년 2월 대관령에 스키를 짊어지고 갔다. 육군 제대 말년인데 북괴124군 김신조 일당이 서울을 침입한 사건으로 해서 복무기간이 6개월간 연장되었다. 마침 서울의 장군 숙소에 파견근무할 때라 사모님께 허락을 받아서 그동안 미뤄왔던 휴가를(사실은 홧김에, 그것도 비상시국에?) 떠났던 것이다. 때마침 전국체육대회 동계스키대회가 진행중이어서 대한스키협회 임원들이 묵고 있던 대관령 산장을 빼면 숙박시설이 거의 전무했고, 민박이 고작이던 시절이어서 서울, 강릉간 국도변 민가에 유숙했는데 서울서 준비해간 김장김치 몇포기와 동네가게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꽁꽁 얼어붙은 동태가 반찬 준비의 전부였다. 그래서 대관령에 있었던 열흘 동안 매일 김치찌개와 동태국만 끓여 먹었다. 그곳에서 스키협회 임원과 현역 선수로 활동하고 있는 많은 선후배와 산사람들을 만났다. 스키협회 소속 동대 선배로 최영식, 김종섭, 윤두선(이상 작고)형들, 그리고 김재택, 이석환, 박문부, 이성화, 임경순 선배들과 전영욱(한양대), 박경택(현 캐나다 토론토 거주)군은 육군 스키부대팀 소속, 한국산악회 김정태(작고)선생 등 거의 모두가 산사람들이었다. 하긴 그 시절은 산사람들이 스키도 하던 때라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기도 하다. 스키를 처음 배운 건 전담 형님(한양대,현 한국산악회 부회장)한테서 구인모(한양대)군과 함께 수락산 모래언덕에서였다.
8. 군용건빵과 알사탕 <사진원본 이구용_6><사진설명:대승령에서 서북주능 코스로 들어가기 전 박병일 부장(오른쪽)의 격려를 받는 이중웅 코스개척 조장, 왼쪽부터 이구용, 故이헌정, 김우식, 조정래, 박정성, 임신철, 故김충배 > <사진원본 이구용_7><사진설명:대승령에서 바라본 서북주능, 멀리 대청봉이 바라 보인다. 왼쪽부터 김우식, 이구용, 박정성, 이중웅> 62년 하계 설악산 서북주능 코스개척은 그 당시로서는 엄청난 시도였다. 일행은 남교리를 출발, 12선녀탕골로 해서 대승령에 올라 박병일 대장팀은 백담사-영시암-쌍폭-봉정암 코스의 지원팀으로, 코스개척조는 이중웅, 박정성, 김우식형들과 내가 막내로 참가, 플라스틱 물탱크 운반의 중책을 맡았다. 당시 다른 산악부가 엄두도 못 낸 서북주능 코스를 해발 1300m의 대승령과 대청봉(1708m)를 연결한다는 비장한 각오로 임했는데, 전인미답의 가시넝쿨을 나다(정글용 긴 칼)로 치고 길을 만들며 헤쳐나가는가 하면 이끼 낀 암벽들을 넘고 돌아 힘들게 전진하는 악전고투의 연속이었다. 식수 통제라 밥은 못해먹고 비상식으로 끼니를 때우는 형편이라 군용건빵을 물도 없이 씹어서 목구멍으로 넘기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 알사탕을 입에 물고 건빵을 씹으면 삼키기가 용이하다는 걸 알아냈고 모두들 그 방법으로 허기진 배를 달래면서 서로의 얼굴을 쓴 웃음으로 바라보았다. <추기-이 원고를 탈고할 무렵 로스앤젤레스에 계시던 정산스님(이헌정 형님)이 입적하셨다는 소식을 뒤늦게 접했다. 삼가 스님의 명복을 빈다.>
9. 머루주와 김치안주 69년 섣달 그믐날 손수남(현 캘리포니아 팜스프링 거주)군과 둘이서 연초의 사흘 휴가를 이용해서 설악산 동계 종주 등반에 나섰다. 그때 우리는 둘다 군제대와 대학 졸업 후 직장에 다니고 있었다. 사실 2박 3일의 설악산 동계 종주는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되도록 짐을 줄이려 했는데도 막상 배낭을 꾸려보니 작지 않았다. 신흥사-양폭산장-봉정산장-백담사코스였는데 첫날 오후 비선대 뒤 천불동 초입에서 캠핑하고 있던 영남대 산악부를 만났다. 마침 영남대 총장 이선근박사(후에 동국대총장을 역임)의 비서인 이범수형이 리드하고 있었다. 이 형은 경희대 OB로 학교시절 대학신보사 편집장을 역임했던고로 동대신문 취재부장을 했던 나와는 구면이어서 자고 가라는 청은 굳이 뿌리치고 갔지만 권하는 머루주 두어잔은 얻어마시고 김치안주까지 걸친 다음에 다시 오련폭을 지나 양폭산장으로 향했다. 일정이 촉박해서였다. 무릎까지 빠지는 눈과 씨름하며 천신만고 끝에 당도한 양폭산장은 먼저 묵고 간 사람들이 문짝을 뜯어서 땔감을 했던 듯 눈바람이 세차게 드나들어 그 추웠던 밤에 군용 슬리핑백의 신세를 단단히 졌다. 이튿날 희운각을 거쳐 대청봉에 올라 새해 첫날을 맞았고 봉정암 산장에서 일박, 다음날 밤새 내린 눈으로 미끄러운 길을 내려오다 실족해서 계곡에 추락, 얼굴이 두배로 부어서 귀경길 버스에서 검문 때마다 신분증 제시를 요구당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10. 감자밥과 오징어 <사진원본 이구용_8><사진설명:화채능 능선, 왼쪽부터 권오찬(단국대 O.B), 강성윤, 손수남, 이구용> <사진원본 이구용_9><사진설명:천불동 특수골 백미폭(百米瀑) 자일하강> 학생산악연맹의 설악산 동계등반은 전국의 20여 대학교 산악부원들과 임원 등 100여명 가까이 참가한 대규모 훈련등반이었다. 버스 두 대에 분승해서 서울을 출발, 백담사 계곡에서 캠핑한 날 저녁에 박철암(경희대교수)대장을 비롯한 본부 임원들은 인근 농가에 저녁식사를 의뢰했는데 들여놓은 밥을 받고 보니 감자 반, 쌀 반이었다. 소금을 뿌려가면서 감자를 으깨어 먹었는데 그 맛이 괜찮았다. 동대 캠프에 가서 맛본 마포형이 끓여준 생강차도 일품이었다. 이튿날 밤은 쌍폭계곡에서 비박했는데 영하 35도의 매서운 추위 속에서 밤새도록 모닥불을 쬐면서도 등이 시려서 잠 한 숨 못잤다. 대청봉, 화채봉 능선을 지나 하산길에 특수골의 백미폭 자일 하강은 스릴 만점이었다. 서울로 귀환하는 버스 안에서 생긴 일-진부령을 넘어 원통-인제로 돌아오는 길에 한참 노래가 흥겹게 어우러지고 있었는데 언제부터인지 뒷칸에 앉은 대원들이 무언지 열심히들 씹어대고 있는 거였다. 알고본즉 오징어 다리였는데 출처는 뒷칸에 쌓인 궤짝들이었다. 급기야는 찻간에 탄 거의 모두가 그 오징어를 서울에 당도할 때까지 씹어댔으니......
11. 가재미회와 감자부침 84년 가족과 함께 한달 동안 한국을 방문할 때였다. 생후 6주된 작은 딸애는 장모님께 부탁드리고 5살된 큰딸과 처와 함께 강원여객 버스편으로 설악산으로 향했다. 설악동 입구의 대포동 횟집에서 늦은 점심 겸해서 산가재미회를 먹었는데 아뿔싸! 쟁반에 올라온 아직도 숨을 할딱거리는 회접시를 앞에 놓고 거북해하는 처와 딸애의 표정에 나의 실수를 탓했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새로 개발했다는 척산온천호텔에서 일박, 이튿날 아침 설악동의 모관광호텔 식당에서 토스트와 계란후라이, 커피를 주문했는데 토스트해 나온 식빵에 퍼런 곰팡이가...... 매니저를 불러 얘기했더니 가져갔다가 다시 가져온 게 같은 식빵을 가장자리를 도려낸 것들인 듯 아직도 푸른 곰팡이였다. 기가차서 더 이상 말않고 값은 치르고 나왔다. 외국인 손님들에게나 안 그랬기를 속으로 바라면서. 권금성을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기도 처음이었지만 마침 산장주인 털보형은 출타중이시고 대신 아가씨가 즉석에서 갈아 타 준 커피맛은 일품이었다. 하산 길에 들른 식당에서 부쳐준 감자부침도 맛있었다. 미국에서 늘 느끼한 음식에 길들여져 있던 우리에게 색다른 미식이었다. 그날 밤 늦게서야 창서형이 호텔로 찾아오셨다. 오랜만에 반가운 상면이었다. 덥수룩한 털보에다 파이프 담배는 여전했다.
12. 복어국과 산성막걸리 66년 봄 전방에서의 초년병 생활을 끝내고 부산의 육군군수기지사령부 비서실로 전출을 갔다. 고교 동창생 허우원군을 만나니 대뜸 복어국을 먹으러 가잔다. 그때까지 복어알 먹고 죽었다는 신문기사를 이따금 접해왔던 나로서는 움찔 놀랐으나 한번 맛을 본 뒤로는 내가 앞장서서 복국집으로 가는 것이었다. 대륙산악회 성산(용철)형, 고려산악회 김정봉, 김관묵, 정방운 형들 그리고 부산대 산악부 박철호 부장 등 여러 악우들이 반갑게 맞아주어서 2년간의 부산생활은 낯설지 않게 시작되었다. 실상 어릴 적 피난 시절의 기억이 있어서 부산은 내게 결코 낯선 곳은 아니었다. 주말이면 늘 근교의 산행에 이들과 어울렸다. 그러자니 사령부 안에 소문이 나서 주말이면 산행에 따라 나서는 동료사병들, 또 캔틴(군용수통)을 주면서 산성가면 막걸리 받아와 달라는 부탁들이 끊이지 않았다. 말이 나온 김에 말이지만 산성막걸리(동래금정산성 밀주)맛은 실로 일품이었다. 그 독특한 누룩의 전래비법때문이리라.
13. 경단과 추석송편 59년 추석 전날 중동고등학교 산악반을 이끌고 속리산 등반길에 나섰다. 당시만 해도 속리산은 접근이 쉽지 않아서 대전역 앞에서 버스를 타고 보은까지 가서 다시 미니밴(마이크로버스)으로 갈아타고 가다 말티재를 오를 때는 승객들은 내려서 걸어 올라가고 빈 차만 영 마루턱까지 올라가서 손님을 다시 태우고 정이품송을 지나 내속리면까지 태워다 주곤 했다. 군용 배낭에 군용 스키파카, 워커부츠, 군용슬리핑백, A텐트, 버너, 반합, 나침반, 군용삽, 도끼, 장갑 및 숟가락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빼놓지 않고 군용품 일색이니까 야간 열차칸에 함께 탄 휴가길 군인들이 “어디에 훈련 가느냐?”고 우리에게 묻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우리를 무슨 특수 임무를 띤 현역군인들로 오해했던 터였다. 탈골암 부근에서 캠핑을 하고 이튿날 일어나니 마침 추석날이라 가을하늘은 차가운데 처량한 생각이 들었다. 마을로 내려가 보기로 하고 가벼운 차림으로 나섰다. 법주사 입고 수정교 옆 수정암은 비구니들이 거처하는 곳이었다. 들은 정보가 있었던지라 여승암으로 향했다. 과연 그곳은 공양하는 아낙네들로 법석이었고 좋은 음식냄새가 났다. 인심도 좋았다. 학생들이 객지에서 고생한다면서 송편에다 나물, 전, 그리고 경단까지 듬뿍 담아서 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불도는 자비라 하지 않던가.
14. 산머루와 다래 68년 유엔의 날 연휴에, 한 달 전 OB와 재학부원의 집결체로 발족한 동국산악회는 19명의 대원으로 설악산 12탕골을 목표로 해서 등반길에 올랐다. 그런데 버스가 내설악에 접근할 무렵 꾸물거리던 날씨가 드디어 굵은 빗방울을 뿌리기 시작했다. 첫 탕 부근에서의 캠핑 예정을 바꾸어 남교리 이장댁에서 민박을 하기로 했다. 밤새도록 이장댁 담 뒤의 계곡물에 돌 굴러내려가는 요란한 소리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비는 줄기차게 퍼부어 하루를 더 계속했다. 그 다음날 아침 비는 멎었으나 피해상황을 알아본 우리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원통에서 진부령 사이를 잇는 국도상 다리는 모두 끊겼고 도로 유실도 많았다. 강폭이 불어서 입산도 할 수 없었으므로 오후가 되자 마을 뒷산인 황병산에 전대원이 가벼운 산행에 나섰다. 긴 계곡과 잡목길을 거쳐 능선 부근에 이르렀을 때 잘 익은 다래가 주렁주렁 달려있는 나무를 발견했다. 근처에서 산머루도 찾아내어 맛을 보니 마침 초설이 스쳐 지나간 뒤라 그런지 상큼, 달콤, 시원했다. 등반 일정이 지연되는 무료함을 달래기에 족했다. 그런데 이 날 저녁 가톨릭 의대 산악부의 조난소식을 접하고 OB와 상급생 부원들로 구조대를 편성, 이튿날 날이 밝기를 기다려 12탕골로 진입하여 이틀동안 구조활동을 편 결과 7구의 사체를 모두 발견해내 주민들의 협조로 남교리까지 운반, 생존자 2명과 함께 앰블런스 편으로 서울로 운구했다.
<미국에서의 산행> 15. 그래놀라바(GRANOLA Bar)와 바나나 2001년 10월 둘째주말, 현교명군과 뉴욕주의 최고봉 마아씨산(Mt.MARCY-5344피트,1630m)을 목표로 토요일밤 뉴욕시를 출발, 5시간 가까이 차로 달려서 아디론댁 산맥(ADIRONDACK Mts.)중의 레이크 플래시드(Lake Placid-1980년 세계동계올림픽 개최지)에 도착, 1박했다. 오는 2003년으로 다가오는 미주한인 이민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미국 50개주의 최고봉을 오르고 있었다. 당초 아팔라치안 산악회의 산장에서 숙영할 예정이었으나 인원이 초과돼서 할 수 없이 마을로 내려가 1박했다. 다음주부터 겨울 적설기 동안 등산로가 폐쇄되는 고로 등산하는 사람이 많았던 탓이었다. 이튿날 새벽 아직 어둠이 걷히기도 전에 일어나 행장을 꾸리고 도넛과 커피로 요기한 후 올림픽 스키점프경기장을 지나서 등산로로 접어들었다. 등산로 입구의 캠프장을 지나노라니-밤사이 곰으로부터 식량을 탈취당하지 않기 위해서-캠퍼들이 배낭들을 나무와 나무 사이에 자일을 걸어서 매달아 놓은 것들을 보매 깊은 산속 임을 실감하게 했다. 정상까지의 6마일(약 10Km) 코스를 오르는 동안 작은 호수며, 인디안 폭포며, 아직 울긋불긋 남은 단풍 등 늦가을의 정취를 만끽했다. 그런데 6시간으로 예정된 코스를 3시간 남짓 오른 지점에서 다리에 쥐가 나는가 싶더니 설상가상격으로 허기가 밀려드는 것이었다. 늘 그렇지만 배가 고프면 꼼짝 못하는게 내 습성인지라 현군과 내가 지닌 것 중 그래놀라바(GRANOLA Bar-영양과자범벅)와 바나나로 급한 대로 허기를 때우고 나니 살 것 같아 다시 진행했다. 점심도시락은 정상을 오르고 난 후에 할 요량으로 건드리지 않았다. 다시 걷기를 한시간 남짓 정상이 빤히 바라다 보이는 지점에 이르렀는데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 오면서 빗방울을 뿌리기 시작, 시야를 제한해왔다. 이곳서부터는 사흘 전에 내렸다는 눈으로 군데군데 눈더미가 눈에 띄었다. 정상 부근에는 눈이 하얗게 덮였는데 정작 접근해 보니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것이었다. 세찬 바람과 뿌리는 빗방울로 인해 힘들여 오른 정상에서는 단 몇 분도 지체할 수 없었다. 간신히 기념촬영을 하고 하산길을 서둘렀다. 우리가 올랐던 이 호벤버그(HOVENBERG) 등산로는 마치 설악산 신흥사에서 출발하여 마등령을 역으로 오르는 것 같은 코스인데 끊임없는 오르막길의 연속으로 과히 가파르지는 않으나 잔바위와 나무뿌리가 발에 걷어 채이며 미끄러운 그런 산길이었다. 게다가 하산길에는 줄기차게 내리는 비로 인해서 종당에는 등산화 속까지 물에 흠뻑 젖었었다. 따라서 2시간 예정의 하산길이 4시간으로 늘어져 버렸고 사방이 완전히 어두워진 연후에야 겨우 베이스로 돌아올 수 있었다.
16. 살구통조림과 바비큐 치킨 <사진원본 이구용_10><사진설명:맨스필드산 정상에 성조기, 태극기와 미국 산악연맹기 그리고 동국 산악회기를 드날렸다.> 2002년 2월 마지막 주말, 버몬트(VERMONT)주의 최고봉 맨스필드산(Mt. MANSFIELD 4393피트,1340m) 동계등반에 나섰다. 역시 미주 한인 이민 100주년 기념 50개주 최고봉 등반 행사의 하나였다. 일행 4명(현교명군 부부와 딸 은호, 그리고 나)이 새로 산 현군의 승용밴을 타고 밤새 뉴욕주를 지나 캐나다 국경에 가까운 버몬트 주 북부의 유명한 스토우(STOWE) 스키장 계곡에 도착한 것은 이튿날 동틀 무렵이었다. 맨스필드산은 그 높이보다는 위치가 위치인 만큼 겨울동안에는 캐나다 쪽에서 내려오는 북극권 기압의 영향으로 적설량이 많고 춥고, 바람 세기로 유명한 곳이다. 운 좋게도 그 날은 춥지도 않아서 기온은 화씨 30도 내외, 적설량은 많았으나 바람도 자고 햇볕이 좋아서 실로 오래간만에 하는 동계등반인데도 각오했던 만큼의 고생은 하지 않아도 됐다. 그러나 겨우내 눈이 다져져서 표면이 미끄러운데다 코스가 가팔라서 여간 힘이 드는 게 아니었다. 크램폰(CRAMPONS-아이젠) 과 함께 가져간 스키폴(Pole)은 퍽 도움이 되었다. 천신만고 끝에 정상에 올라서니 사방으로 탁 트인 시야에 멀고 가까운 산봉우리마다 흰눈을 얹고 있는 것이 장관이었다. 서쪽으로는 멀리 지난 가을 올랐던 뉴욕주의 최고봉 마아씨산(Mt. MARCY) 과 화이트페이스산(Mt. WHITE FACE-4872피트,1468m, 1980년 세계동계올림픽 알파인 종목 스키코스)등이, 동쪽으로는 뉴햄프셔(NEW HAMPSHIRE) 주의 화이트 산맥(WHITE MOUNTAINS) 중의 최고봉인 워싱턴산(Mt. WASHINGTON-6288피트,1917m)이, 북쪽으로는 멀리 캐나다의 높고 낮은 봉우리들, 그리고 그 사이사이의 크고 작은 호수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자연미의 극치였다. 하산 길에 첫 번째 당도한 트램(Tram-케이블카) 정류장 부근 산장 식당에서 웨이터가 추천해준 치킨바베큐 요리는 근래에 먹어본 치킨 요리 중 일품이었다. 또한 스토우 스키장에 내려와 남은 시간에 스키를 즐긴 후 베이스 산장에서 먹은, 현군이 준비한 살구통조림은 목타던 터에 오아시스의 상쾌함과 같은 바로 그 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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