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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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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문헌에 나타나는 선조들의 등반행태 / 윤태영(84)
‘옛날 桓因(환인)의 庶子(서자)
桓雄(환웅)이 天下에 뜻을 두고 人間世上을 탐내거늘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三危太白(삼위태백)을 내려다보매 人間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한지라, 이에 天符印(천부인) 세 개를 주어 다스리게 했다. 桓雄이 그의 무리 삼천 명을 이끌고 太白山(태백산·현 백두산) 神檀樹(신단수) 밑에 내려와 神市(신시)라 이름하니 이 분을 桓雄天王(환웅천왕)이라
한다.’ 三國遺事(삼국유사) 紀異篇(기이편)에
기록되어있는 檀君神話(단군신화) 또는 개국신화(開國神話)라고도 불리는 내용의 일부분으로 여기서 말하는
삼위태백(三危太伯)의 뜻은 太伯山이라는 설도 있으며, 또 太伯山도 구체적인 지명이 아니고, '제일 높은 산.아주
높은 산'을 일컫는 말이라는 설도 있다. 위에 소개한 단군신화의 내용에서도 볼 수 있듯이 고대 선조들은
개국의 시초가 되는 산을 신성시 생각하는 숭천숭산사상(崇天崇山思想)을 지녀왔다. 또한 산은 높고 물은 맑다 하여 국호를 산고수려((山高水麗)의 약칭으로 ‘고려(高麗)’라 하였고, 고려때는 사악신(四嶽神)으로 지리산, 삼각산, 송악산, 비백산을 삼고
제사를 지냈으며 조선시대는 오악(五岳)을 정해서 동악에 금강산, 서악에 묘향산, 북악에 백두산, 남악에 지리산, 삼각산을 중악으로 삼아 산제(山祭)를
지내고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였다고 한다. 이상과 같이
선조들의 숭산사상은 등산의 시초가 되었으리라 생각하며 역사서 속에 나타나는 산행행태를 살펴보기로 하자. 본 내용은
선조들이 기록한 많은 산행 기록서들 중에서 당시의 등산행태와 등산목적, 당시 사회의 풍속 그리고 문화상을 알아볼
수 있는 부분을 찾아내어 등산행태를 중심으로 발췌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삼국사기 권 제 23 백제본기 제 1(百濟本紀第一)에는
백제의 시조 온조왕은 아버지가 추모이다. 혹은 주몽이라고도 한다. 주몽은 북부여로부터 난을 피하여 졸본 부여에 이르렀다. 부여왕은 아들이 없고
세 명의 딸만 있었는데, 주몽을 본 후, 그가 비상한 사람임을 알고는 그에게 둘째 딸을 시집보냈다. 그 후 얼마 안되어 부여왕이 죽고 주몽이 뒤를
이었다. 주몽은 두명의 아들을 낳았다. 맏아들은 비류, 둘째 아들은 온조라고 한다.[혹은 '주몽이 졸본에서 월군 여자를 취하여 두 아들을 낳았다'고도
한다.] 주몽이 북부여에서 낳았던 아들이 이곳에 와서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자신이 태자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걱정되어, 마침내 오간·마려
등 열 명의 신하와 함께 남쪽 지방으로 떠났다. 백성 가운데 그들을 따르는 자가 많았다. 그는 주1)한산에 도착하여 주2)부아악에 올라가 거주할만한 곳을 찾았다. 비류는 바닷가에 거주하기를 원하였다. 열 명의 신하가 간하여 말했다. ○원문<百濟>始祖<溫祚王>,
其父, <鄒牟>, 或云<朱蒙>. 自<北扶餘>逃難, 至<卒本扶餘>. <扶餘>王無子, 只有三女子,
見<朱蒙>, 知非常人, 以第二女妻之. 未幾, <扶餘>王薨, <朱蒙>嗣位. 生二子, 長曰<沸流>, 次曰<溫祚>.[或云:
"<朱蒙>, 到<卒本>, 娶<越郡>女, 生二子."] 及<朱蒙>在<北扶餘>所生子,
來爲太子. <沸流>·<溫祚>, 恐爲太子所不容, 遂與<鳥干{烏干}> ·<馬黎>等十臣南行, 百姓從之者,
多. 遂至<漢山>, 登<負兒嶽>, 望可居之地, <沸流>欲居於海濱. 十臣諫曰:"惟此<河南>之地,
北帶<漢水>, 東據高岳, 南望沃澤, 西阻大海. 其天險地利, 難得之勢, 作都於斯, 不亦宜乎?" 주1) 한수는 지금의
한강, 한산은 지금의 남한산을 말하는 것으로 그 다음 고구려의 남진으로 인하여 이 지역은 고구려의 북한산군으로 불려지며,
한산은 남한산의 대칭으로 불리던 북한산의 원명 주2) 부아악은 문헌에
보이는 북한산의 가장 오랜 이름으로 삼각산의 한 봉우리인 인수봉 뒤에 튀어 나온 바위가 꼭 어머니가 어린애를 업고 있는 형상이기 때문에 이를 한자명으로
표기한 것으로 해석된다. 인수봉의 모양이 그 밑에서 보면 남근과 비슷하여 불알의 음독이라는 설과 부아는 불뫼(火山)의
불을 말한다는 설도 있다. 부아가 불의 표기이므로 부아-불-火-華로 바뀌어 화산이 되었다는 풀이도 있다. 또 북한산의 순수한 이름은 산을 신처럼
숭배해 온 사람들에 의해 산신령의 산이란 뜻으로 '부루칸모로'라고 했다는 설도 있다. 『삼국사기』제사지(祭祀志) 권32에 부아악은 북한산주에 있다고만 하였다. 그러나 『동국여지승람』 한성부 산천조에서는 삼각산을 일명 화산이라
하고 신라에서는 부아악이라 하였으며 동명왕의 아들 비류 · 온조가 한산으로 와서 부아악에 올라가 거주할 만한 지방을 본 것이 곧 이 산이라고 하였다. <출처 : history.seoul.go.kr/view/view2_02_1.html 역사책 들여다보기 서울의 산 중 에서> 세조실록 "경신년(1440년) 10월에
세종이 친히 규표(圭表)를 제작하고 세조와 이용(李瑢)에게 명하여 보현봉(普賢峰)에 올라가서 해가 지는 곳을 관찰하게 하였는데, 산봉우리의 높이가
만 길이며 돌계단의 길이 험준하여 말을 타고 올라갈 수 없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말을 버리고 도보로 올라가는데, 세조는 홀로 활과 화살을 가지고
올랐으나 빠르기가 마치 회오리 바람과 같아서 아무도 따를 자가 없었고, 백운곡(白雲谷)으로 내려올 때도 사람들이 모두 미현(迷眩)하여 엎어져 넘어졌으나
세조는 달려 내려오기를 평탄한 길같이 하였다." 세조가 그의 형제들과 함께 경신년 10월에 북한산에 올라 규표로 태양고도를 관측했으며 세조가 함께 산에 갔던 이용이란 세종의 세째 아들 안평대군(安平大君)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세종은 둘째 수양대군(뒤의 세조)과 안평대군을 시켜 산에 올라가 태양의 높이를 관측해오게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진 사람과 산 1999년
12월호 조선시대 암벽등반 민화> 고경명(高敬命,
1533~1592, 중종28~선조25)의 유서석록(遊瑞石錄) 제봉의 나이 42세 되던 해(선조 7년. 1574) 4월 20일 광주목사 갈천(葛川) 임훈(林薰)의 초청으로 지금의 무등산인 주1)서석산에 오른 등산기행문(登山紀行文)이다. 산행코스는 다음과
같다. 4월 20일(甲子) 맑음: 취백루(翠栢樓)-
증심사(證心寺) 4월 21일(을축) 맑음: 사인암(舍人岩)-
증각사(證覺寺)- 중령(中嶺)- 냉천청(冷泉亭)- 입석대(立石臺)- 불사의사(不思議寺)- 염불암(念佛庵)- 덕산(德山)너덜-지공(指空)너덜 4월 22일(병인) 맑음: 상원등(上元燈)-
정상삼봉(頂上三峯)- 서석대(瑞石臺)- 삼일암(三日庵)과 금탑사(金搭寺)- 은적사(隱迹寺)- 석문사(石門寺), 금석사(金石寺), 대자사(大慈寺)-
규봉암(圭峯庵)- 광석대(廣石臺)- 문수암(文殊庵)- 풍혈대(風穴臺), 장추대(藏秋臺)- 은신대(隱身臺) 4월 23일(정묘) 맑음: 영신(靈神)골-장불천(長佛川)- 창랑천(滄浪川)- 적벽(赤壁)- 소쇄원(瀟灑圓)- 식영정(息影亭)- 환벽당(環碧堂) 갑술년(1574년) 4월
20일(甲子) 맑음 초여름 광주목사 갈천 임 선생께서 한가한 날 빈객들과 함께
서석(무등산)에 오르려 하는데 동행할 수 있겠느냐는 글월을 보내어 나를 초청해왔다. 나는 어른들과의 약속을 어길
수 없어 4월 20일 산에 오를 행장을 갖추어 먼저 증심사에 가서 기다리기로 하였다.<중략> 사인암(舍人岩) 중령(中嶺) 차를 마시고 길을 떠나 이정(梨亭)을 거쳐 중령(中嶺)으로 올라간다. 깎아 세운 듯한 가파른 길은 하늘에 닿을 듯하여 사람들은 마치 물고기를 꿰미에 꿰어놓은
듯도 하고, 꿰미가 줄지어 서로 붙들고 개미 기어가는 듯 하였는데 한자를 올라가면 한 길쯤 뒤로 물러난다. 이윽고 평평한 곳에 이르니 시야가 탁
트이며 상쾌한 기분이 마치 바다에서 배 뚜껑을 젖히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다. 중머리재에서 산길을 따라 왼쪽으로 돌아서니 밀림이 우거져서
구름과 햇살을 볼 수가 없고 높고 험한 등성이는 허공에 걸쳐 있어 다만 새가 빠르게 날 때 푸른 이끼가 나부낄 뿐이었다. 지팡이에 의지하고 노래를
읊조리며 오르노라니 잠시나마 등산의 힘겨움을 잊게 해준다. <출처 : http://my.netian.com/~ko012/frm_data5.htm> 주1)서석산(瑞石山) 무등산은 대체로
육산(肉山 또는 土山)으로 되어 있으나 그 특색은 오히려 웅장한 암석미에 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서석대,
입석대, 규봉 등이다. 정상을 중심으로 하여 서쪽에 서석대가, 남쪽에는 입석대가 위치하고 있는데, 특히 서석대는 마치 수정 병풍을 둘러친 것처럼
아름다운 직절상(直截狀)의 석조(石條)로 이루어진 총석(叢石)의 집단이며 이곳을 '서석의 수정병풍' 이라고도 한다. 무등산을 서석산이라
부른 것은 고려 때의 일로 추측된다. 무진주를 광주로 고쳐 부른것은 940년(태조 23년)인데, 『고려사 지리지』는
'무등산'이라 적고 혹은 '무진악이라 하고 혹은 서석산이라한다(一云 武珍岳, 一云 瑞石山)'고 그 명칭의 유래를 기록하고 있어 서석산이란 이 름이
이때부터 무등산의 별칭 또는 애칭으로 함께 불려왔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있다. 『동국여지승람』은
『고려사』의 기록을 그대로 인용, '이 산 서쪽 양지 바른 언덕에 돌기둥 수십개가 즐비하게 서 있는데 높이가 가히
백척이나 된다. 그래서 산 이름을 서석이라했다 (山西陽崖 數十櫛立 高可百尺山名瑞石 以此)'라며 서석의 유래를 밝히고 있다. 송강 정철은
성산별곡에서 '천변(天邊)에 뜨는 구름 서석을 집을 삼아'라 하였고 제봉 고경명도 『遊瑞石錄』을 남겨 무등산을 예찬하고
있어 서석산은 조선시대의 문인들 사이에서도 즐겨 쓰였던 이름임을 알 수 있으며, 현재까지도 무등산의 별칭으로 이어지고 있다. 무등산에는 현재 우리가
서석이라 부르는 서석대 말고도 입석대, 규봉, 그리고 정상 3봉을비롯한 의상봉, 새인봉, 중봉 등 직립형 돌무더기가 곳곳에 흩어져 있어 절경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돌무더기를 우리 조상들은 '선돌' 또는 '신돌'이라 불렀던 것이니 뜻을 취하면 '立'이 되고 음을 취하면 '瑞'가 되었던
것이다. <출처:무등산 pp. 31 - 40, 박선홍, 금호문화> 농암 김창협(金昌協,
1651 ~ 1708)의 <동유기 東遊記> 김창협 [金昌協, 1651 ~
1708] 조선 후기의 학자 ·문신. 본관 : 안동 일기체로 된 기행문으로 전노정을 12개의 코스로 나누어 단락으로 구성함. "외금강의 중이 가마를 가지고
와서 (안무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따금 가마가 천길 가파른 언덕을 올라갈 때는 곧추 허공에 매달린 듯 몸을 가누기가 거의 불가능하였다.....
영은암을 지나고부터는 산세가 점점 가파르고 길이 또 미끄러워 가마를 메고 가는 중이 열 걸음에 한번씩은 미끄러지므로 늙은 중은 옆을 부축하고 젊은
중은 뒤를 밀게 하여야만 진전할 수가 있었다...." <그림
g12.jpg><그림설명:나귀를 타고 산행을 하는 양반> <그림 사람과 산 1999년12월호><그림설명
나귀를 타고 유람하는 사람> 겸재의 <금강산화첩>
중 '백천교' 그림에는 유점사 아래 백천교에서 가마중과 나귀꾼이 양반을
기다리는 모습을 그린 것이 있다. 여기가 요즘으로 치면 환승 구역이어서 가마를 타고 산을 넘어 온 양반이 바야흐로
나귀로 갈아타는 곳이다. 겸재는 바로 그것을 진경 풍속으로 그린 것이었다. <그림
g2.jpg><그림설명: 겸재의 <금강산화첩> 중 '백천교'> 유홍준, <나의 북한
문화유산답사기 下 (229 ~ 233쪽)>에서 인용 가마꾼
중과 악독한 관리<만폭동전설> 옛날에 거만하고 독살스럽고 매정하기로
이름난 여씨 성의 벼슬아치가 있었다. 그는 백성들을 가혹하게 착취하여 제 몸만 불리던 자로 몸집이 절구통만하였다. 어느 여름날 금강산 여행을 떠난
그는 가마꾼이야 어떻게 되든 제 몸이 편안하니 빨리 구경을 하자고 철령을 넘어서부터 다그쳤다. 보통 사람이면
장안사에서 하룻밤 묵고 다음 날 만폭동으로 구경 가는 것이 관례였지만, 이 사나운 벼슬아치는 금강산에 도착한 그 날로 만폭동 구경을 하겠다고 서둘렀다.
장안사의 가마꾼들은 그래도 비교적
평탄한 길을 가게 되어 좀 나았지만 고생하게 된 것은 표훈사 중이었다. 그 날 가마를 매게 된 중들은
이른 새벽부터 땔나무를 하고 방금 돌아온 참이었다. 가마를 준비해 가지고 삼불암까지 내려가니 이미 그 벼슬아치를 태운 가마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벼슬아치는 표훈사 가마꾼을 보자 왜 늦었는가를 추궁하고 빨리 가자고 독촉했다. 두 사람은 어찌나 무거운지 몇 걸음을
못가서 땀이 비오듯 하였다. 얼마 후 가마는 표훈사 앞뜰에 도착하였는데 벼슬아치는 절간구경을 안해도 되니
빨리 만폭동으로 가자고 요구하였다. 벼슬아치는 그 좋은 구경을 감상하면서 천천히 가자고 말하기는커녕 해가 지기 전에 오늘 팔담을 모두
보자고 하였다. 가마를 맨 두 중은 이대로 가마를
매고 가다가는 죽을 것 같았다. 죽을 힘을 다해 한 걸음씩 올라가던 그들은 진주담 옆 벼랑길에 이르렀다.
이때 중 한 사람이 그만 미끄러져 가마가 곤두박질할 뻔하였다. 겨우 일어선 그는 다른 중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우리가
죽기는 매일반이니까 그럴 바에야 저 놈과 함께 물에 빠져 죽는거야" 하자, "그렇게 하세" 라며 동의했다. 모진 마음을 먹은 그들은 진주담의
폭포가 내리는 높은 벼랑에 이르자 실수하는 척하고 낭떠러지로 떨어져 물에 빠졌다. 그 뒤부터 양반 관료들은 가마를
탈 때마다 이 일이 생각나 행패를 부리지 못했다고 한다 <그림
g1.jpg><그림설명 : 가마를 타고 산행을 하는 모습. 가운데 중절모를 쓰고 가마에 앉아 있는 양반네와 가마꾼들의 행렬> 김종직(金宗直, 1431~1498)의 <유두류록 遊頭流綠> 김종직(金宗直, 1431~1498)의 호는 점필재이고 본관은 선산이다. 김종직은 그의
나이 42살. 경상도 함양군수로 있던 1472년에 그이 제자 조위, 유호인, 한인효 등과 함께 음력 8월 14일부터
19일까지 5일 동안 지리산을 기행하였다. 추정 등산로 : 함양 - 하봉 - 중봉 - 천왕봉 - 세석고원 - 백무동 – 마천 8월 15일 오후에 천왕봉에 올랐다.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여 온누리가 어둡고 중봉도 보이지 않았다. 해공과 법종이 먼저 성모묘에 들어가 조그마한 부처에게 날씨가 개게 해달라고 빌었다. 나는
처음에는 장난치는 줄로만 알았다. 그랬더니 그들은 속설에 이렇게 하면 하늘이 갠다고 하였다. 그래서 나도 의관을 바르게 입고 세수하고 돌길을 더듬어
사당에 들어가 술과 과일을 차려놓고 성모에게 빌었다. 이렇게 제사를 지낸 뒤 다함께 신위 앞에 앉아서 술 몇 잔씩을
나누어 마신 다음 일어섰다. 성모사당은 단지 3칸으로 엄천리에 사는 사람이 고쳐 지었다. 못을 단단히 박은 판자집인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바람에 날려가기 때문이다. 두 중이 벽에다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음산한 바람이 이리저리 거세게 몰아쳤다. 성모사의 지붕옷이 모두 젖었다. 네 사람이 모두 사당 안에 자리를 깔고 누웠다. 찬 기운이 뼛속까지 스며들어 다시 두꺼운 솜옷을 껴입었다. 하인들이 모두 온 몸을 떨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어 큰 나무 서너 그루를 가져다 불을 피우고 쬐게 하였다. 8월 16일 비바람이 아직도 세차게 몰아치고 있었다. 그래서 먼저 하인을 향적사(제석봉 남쪽 장터목 산장에서 5분 거리에 있었던 절)로 보내 밥을 지어 놓고 내려갈 수 있는
길을 뚫은 뒤 모셔 가도록 하였다. 정오가 지나서야 비가 조금 그쳤다. 돌길이 몹시 미끄러웠다. 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면서 조금 내려왔다. 쇠사슬을
박아 놓은 길이 있었으나 매우 위태로웠다. 그래서 그냥 돌 구멍을 뚫고 나와 힘을 다해 걸어서 향적사에 도착하였다. 주)지리산은 백두산의 산맥이 뻗어 내렸다 하여 두류산(頭流山)이라고도 하는데 간혹 남해바다에
이르기 전 잠시 멈추었다 해서 두류산(頭留山)으로 적기도 한다. [동국여지승람] <그림 g3.jpg><그림설명: 해동지도에 나타난 피아골><그림
g4.jpg><그림설명: 옛지도에 나타난 화개동천> 조식(曺 植,
1501~1572)의 <유두류록 遊頭流錄> 조식(曺 植,
1501~1572)은 호가 남명으로, 경상도 합천 삼가에서 태어나 과거에 급제한 부친을 따라 서울에서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그러나 그의 숙부
조원경이 1519년 기묘사화 때 억울한 죽임을 당하고 그의 부친 역시 관직을 박탈당하자, 벼슬길을 포기하고 재야에 묻혀 학문에 정진하면서 제자
양성에만 전력하였다. 그리고 1561년에는 지리산 덕산으로 들어와 산천재를 짓고 생을 마칠 때까지 지리산에 묻혀 살았다. 1. 일시: 1558년(명종 13)
4월 10일∼4월 26일 2. 동행: 김홍·이공량·이희안·이정·조환·원우석·이백·김경·김사성·백유량
및 기생·종 등 3. 일정 삼가 계부당(진주 금산에 있던
이공량의 집)→사천→장암 쾌재정→사천만→곤양 앞바다→하동포구→하동→악양→삽암→도탄→정여창 구거지→<화개>→쌍계석문→쌍계사→불일암→지장암→쌍계사→신응사
쌍계사 앞→화개→악양현 현창(1박) →악양현→삼가식현→횡포역→두리현→정수역→정수역→칠송정→다회탄→뇌룡사 19일 호남에서 온 네 사람과 백유량·이씨 두 유생이 동행하였다. 북쪽으로 오암을 오르는데, 나무를 잡고 잔도를 타면서 나아갔다. 원우석은 허리에 찬 북을 치고,
천수는 긴 피리를 불고, 두 기생이 그 뒤를 따르면서 선두 대열을 이루었다. 나머지 여러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물고기를 꼬챙이에 꿴 것처럼
줄지어 앞으로 전진하면서 중간 대열을 이루었다. 강국년과 요리사 및 음식을 운반하는 종 등 수십 인이 후미 대열을 이루었다. 승려 신욱이 앞에서
길을 안내하며 갔다. 이우옹과 내 동생 및 원생 등 몇 사람이 나무를 부여잡고
내려가 서성이며 이리저리 둘러보고서 올라왔다. 나이가 젊고 다리가 튼튼한 사람은 모두 향로봉까지 올라갔다. 다시
불일암에 모여 물을 마시고 밥을 먹었다. 절 문 밖 소나무 밑에 나와 앉아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한껏 술을 마셨다. 아울러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고 피리를 부니, 그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지고 산봉우리에도 메아리쳤다. <출처 :
http://chss.pknu.ac.kr/~history/dabsa/dabsa.htm> 박장원(1612~1672)의 <유두류산기 遊頭流山記> <그림 g5.jpg><그림설명: 박장원(1612~1672)의 遊頭流山記 원문> 박장원(朴長遠, 1612~1672) 1636년에 과거에 급제, 1639년 선조실록의 수정본 편찬에도 참여 추정코스 : 함양 - 백무동 - 제석봉 - 천왕봉 – 백무동 1643년 음력 8월 20일부터 29일까지 함양-백무동-제석봉-천왕봉-백무동 코스로 지리산을 등반한 기행문 1643년 8월 23일 며칠째 맑았던 날씨가 연일 비가 올 것만 같았다. 기온은 매우 따뜻하였으나 안개가 걷히지 않았다. 이날 천왕봉에 오르려 하자, 노승들이 모두 "저희들은 천왕봉에
오르는 많은 사람들을 보아왔습니다. 비록 쾌청한 날일지라도 중봉에 닿기도 전에 번번이 구름이 일고 비가 쏟아져 진퇴양난에 빠지곤 하였습니다. 하물며
오늘처럼 이 절을 떠나기도 전에 구름이 이미 사방에서 모여들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원컨대 헛걸음을 하지 마십시오"하며 천왕봉에
오르는 것을 만류하였다. 우리 네 사람은 "이번 산행을 결코 중지하기 어렵다. 우리들이 신선과의 인연이 있고 없고는 오늘 결정될 뿐이다"하고
길을 나섰다. 이내 말을 몰아 십리 떨어진 주1)백무당에 이르렀다. 이 당집은 바로 음란한 사당으로 무당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이곳을 유람하는 사람들은 당직으로 불리는 자에게 복종하곤 하였는데,
그것은 주2)용유당도 마찬가지였다. 당 안에서 잠시 쉬었다. 그런 다음 말을 버리고 가마를 타고 하동바위에 도착하였다. 곁에 있던 중이 "옛날 하동군수가 이곳에 이르러 비를 만나 길을 잃고 헤맸기 때문에 이 바위를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하였다.
이곳부터는 산이 더 험준하고 길이 더욱 위험하고 좁아졌다. 그래서 우리 네 사람은 죽 늘어서서 갔다. 드디어 옛 주3)제석당터에 도착하였다. 비로소 좌우가 탁 트였다.
수많은 골짜기와 봉우리는 붉은 단풍으로 불타오르는 것 같고 그 사이사이로 푸르고 노란 빛의 소나무와 회나무가 섞여 있었다. 그리고 구름과 안개가
물결치면서 순간순간 갖가지 모습으로 변하니, 비록 그것이 괴산이 만든 괴이한 현상이라 할지라도 몰래 와서 구경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제석당에 이르렀다. 당집과
천왕봉은 겨우 10리인 만큼 제석당의 높이를 알 만하다. 잠시 가마를 쉬게 하였다. 중들이 흰떡을 주었는데, 모두 제석당 당직이 제공한 것이며
천왕봉에 이르렀을 때도 그러하였다. 제석당에 도착하였을 때 구름과 안개가 모두 걷히었다. 하늘은 높고 넓었으나, 바람이 매우 세차서 거의 견딜 수가 없었다. 곁에 있던 중이 "이곳에서 만약 바람을 걱정하면
정상에 올라가기 어렵습니다" 하였다. 해가 지는 것을 굽어보고 급한 마음에 일행을 재촉하였다. 제석당 뒤쪽으로 걸어 올라가니, 남해 바다가 시야에 들어왔다. 영호남의 바닷가와 고을이 줄지어 서 있는 것이 보였고 그
수를 헤아릴 수 있을 정도였다. 이윽고 배바위를 지나쳤다.
스님이 이르기를, 이 산이 바다에 있을 때 배를 정박하던 곳이라 하였다. 문암에 들어갔다. 그 바위에는 돌문(통천문)이 있고 문에는 긴 나무사다리가
가로 놓여 있었다. 천왕봉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은 모두 이 문으로 들어가 사다리를 건넌 뒤에야 정상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래서 문암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내 바위를 잡고 기어올라 곧바로 천왕봉에 올랐다. 봉우리 위에는 또 하나의 사당이 있었는데 성모사였다. 그곳 외에는 몸을 보호할 곳이 없었다. 천왕봉에서는 위로는 별을 딸
수 있고, 아래로는 드넓은 산하를 굽어볼 수 있었다. 하늘과 바다가 서로 맞닿아 있는데, 단지 한 기운만이 하늘과 땅 사이에 가로 펼쳐져 있었다.
마치 흰 비단이 펼쳐져 있는 것과 같았다. 눈 아래의 산하는 모두 흙덩이 같고 실 같아 매우 밝은 눈을
가진 자가 아니면 자세히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나의 눈과 재주는 궁색하여 언어문자가 아니면 만에 하나밖에
형용할 수 없었다. 잠시 둥근 해가 바다에 지는 것을 보니, 괴기한 자색과 붉은 색의 온갖 형상이 뒤섞여 나타났다. 사람들이 모두 박수를 치면서
"저 경이로운 색상이 무엇이냐. 저 장관이 무엇이길래 나로 하여금 이곳까지 오게 한 것인가"하고 놀라워하였다. 석양 노을을 본 뒤 성모사로 들어가 서로를 베개 삼아 누웠다. 바람이 노한 듯이 휘몰아쳐 판잣집을 날려 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자 주4)성모사를 지키는 사람이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오늘 바람은 바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익숙해지면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하면서 우리를
안심시켰다. <그림
g5.jpg><그림설명: 천왕봉 정상의 마고 석상(1973년 6월 촬영)> 한밤중에 바람은 진정되었다.
달이 뜨고 별자리도 초롱초롱 나타나니, 반짝반짝하는 별빛이 촛불로 변하여 하나의 은색 세계를 만들었다. 피리 부는 사람이 사당 뒤편에 있는 일월대로
나와 앉아 허사한 곡주를 쾌연히 연주하니, 몸이 차고 혼이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두 어깨가 들썩이는 듯하니, 중국 당나라 현종과 월궁 양귀비의
놀이도 부럽지 않았다. 어느덧 달도 지고 바람도 가시었다. 이내 앉아서 새벽을 맞이하니, 새벽 기운이 점점 무르익었다. 붉은 해가 떠오르면서 세상이 비로소 밝아지고 있었다. 가마를
매는 중들이 무려 70여 명이나 모여들었다. 그들은 모두 해돋이를 보고 감탄하면서 "우리들이 지금까지 어깨에 가마를 매고 이 봉우리에
이른 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해가 지고 달이 뜨고 해가 떠오르는 것을 모두 본 것은 한두 번에 불과합니다. 우리 어르신이
신선의 기술을 터득한 것이다"하였다. 주1) 전국 무당들의
우두 머리가 천왕봉의 성모사를 받들고 있었기 때문에 이곳에는 언제나 1백명의 무당이 진을 치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원래의 이름은 '백무동(百巫洞)'으로 불렸다. 또 다른뜻으로 '백무(白霧)동'으로 일컬어진 때도 있었는데 안개가 많은 마을이라 하여 그렇게 썼다.
현재는 이도 저도 아닌 백무동(白武洞) 으로 불리고 있는데 지금도 '백무'는 여전히 사라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주2) 칠선계곡과
백무동, 뱀사골의 물줄기를 하나로 묶어 흐르는 엄천강변의 용류담은 우선 산속의 호수와 같은 경관만으로도 치성객을
끌 수 있는 곳이다. 주3) 제석봉(1,896m)의 남쪽에는 옛날 산신의 제단인 제석단이 있다. 주4) 지리산은 무속신앙의
발원지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출처 http://www.ofof.net/> 정시한(丁時翰, 1625~1707)의
산중일기(山中日記) <산중일기>는 정시한(丁時翰)이
60세가 넘어서 산천을 유람하며 쓴 기행문으로 17세기 조선 불교사를 이해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자료로 알려져 있다. 정시한(丁時翰)
(1625~1707) 조선후기 유학자 대표적인 퇴계 이황의 계승자로 알려져 있다. 1686년 4월 19일 맑고 추웠음 군자사 승려 법안과 선보 등이 가마꾼을 데리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냇물을 건너서 나귀를 타고 10여리를 간 다음, 비로소 가마를 타고 5리쯤 가서 두타암에 이르렀다. 노승
원혜와 그의 상좌 영인이 나와서 영접하였다. 한동안 앉아 있다가 남여는 보내고 걸어서 무량굴에 올라가니 수자인 의철이 나이가 을축생인데 나와서
영접하였다. 저녁을 먹은 뒤에 무주암에 올라가니 벼랑에 매달아 놓은 듯한
석벽이어서 애써 올라가야만했다. 5리 쯤 가는 동안 열 걸음마다 한 번씩 쉬어야 했다. 겨우 올라가서 동대에 앉아서
쉬었다. 돌 위가 평평하여 지리산의 여러 봉우리가 한 눈에 늘어서 있고 주산의 석봉이 기괴하여 무엇이라고 이름할 수 없었다. 이동항(李東沆,
1736~1804)의 방자유록(放恣遊錄) 이동항(李東沆,
1736~1804) 경기도 광주가 본관으로 조선 정조 때의 학자, 자는 성재, 호는 지암 1767년에는 속리산을, 1790년에는
지리산을, 1791년에는 금강산을 유람한 뒤 각각 기행문을 남기었다. 1790년 음력 3월 28일부터 5월
4일까지 경상도 칠곡-함양-지리산-진주 등지를 유람한 뒤 지은 기행문 등산 코스는 함양 군자사-제석봉-천왕봉-제석봉-백무동-군자사로
이어지는 오늘날의 백무동 코스로 3박 4일 소요되었다. 4월 17일 지난 번 능중이 건네준 점필재 김종직의 [유두류록]을 소매 속에서 꺼내 보았다. 거기에는 지리산의 산, 암자, 마을, 골짜기, 봉우리의 이름이 대부분 실려 있었다.
지리산 아래에 살고 있는 한생이 하나하나 자세히 대답해 주었다. 대체로 김종직이 지리산을 오른 것은 이 엄천사의 앞산에 있는 회람사에서 능선을
따라 올라갔다. 지금의 백무동 길과는 동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데, 그 길은 지금 없어지고 이른바 지장암과 선열, 신열, 고열 등과 같은 암자는
그 터만 남아 있을 뿐이다. 4월 18일 나는 감기가 들어 밤새도록 고생하였다. 그러나 산에 올라가기 위하여 억지로 일어나서 머리 손질을 하고 밥을 먹은 뒤에 군자사로 내려가 길을 떠날 준비를 하였다.
먹을 쌀과 소금, 장, 술을 비롯해 솥, 그릇, 의복, 이불, 깔개자리와 점심 밥그릇들을 갖추어 짊어지니, 모두 12사람이나 되었다. 이 모든
것은 모두 노선국 형제가 준비한 것이었다. 백무당에서 서쪽으로 걸어갔다. 비로소 산에 오르기 시작하였다. 우리 일행은 숨을 헐떡이며 조금씩 올라가 하동바위에 이르렀다. 산세는 거대한 벽을 매달아
놓은 듯하고 제멋대로 자란 나무들은 하늘을 가려 햇빛이 스며들지 않고 있었다. 한 가닥 실같은 등산로는 매우 좁고 돌부리가 층층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지팡이를 짚고 온 힘을 다 써도 마치 계단을 오르는 것만 같았다. 앞에 가는 사람을 올려다보면 이미 나무 끝에 있고, 뒤어 오는 사람을 돌아보면
그의 이마가 나의 발 밑에 있었다. 참샘을 지나 15리를 걸어
고갯마루에 올랐다. 천왕봉을 둘러보니, 아직도 하늘의 한복판에 있었다. 일행 모두 웃옷을 풀어헤치고 서늘한 바람을 쐬었다. 나는 피곤하여 풀 위에
누웠다. 배도 고프고 몸도 아팠다. 결국 그릇들을 풀어 점심을 먹고 한잠씩 잤다. 드디어 천왕봉 일월대를 내려와 당집(성모사)에 들어갔다. 이 당집 역시 판잣집이었고 그 안에 돌부인을 모셔 놓았다. 옛날부터 돌부인은 석가의 어머니인 마야부인이라고
하였다. 당집은 원래 일월대 위에 있었는데, 어느 해에 일월대 아래로 옮겨 세웠는지 알 수 없다. 처음에는 이 당집에 들어가 밤을 보낼 계획이었다. 그러나 얼었던 땅이 녹기 시작하여 축축하여서 잘 수가 없었다. 당집 아래 남쪽 벽면을 등지고 깔자리를 편 뒤 자리를 정하여
앉았다. 따라온 사람들을 시켜 나무 삭정이를 주워다가 차가운 밤을 보낼 땜감으로 쓰도록 하였다. 노생 형제는 제석당에서 밥을 지어 가져왔다. 그리고 나의 몸을 돌아보니,
이미 하늘나라로 가는 길의 문턱에 가까이 와 있는 듯하였다. 피리 부는 사람을 시켜서 <보허사> 한 가락을 불게 하였다. 맑은 소리가
간드러지게 울려퍼져서 푸른 하늘 위로 흩어져 올라갔다. 이문과 안기가 학의 등을 타고서 난새가 조각된 생황을 불고 구름 위의 하늘에서 옥피리를
불었다는 것이 바로 우리들을 두고 한 말이었다. 어느덧 피리 소리도 그쳤고 동쪽이 밝아오기 시작하였다. 차가운 기운이 마치 살을 에는 듯하여 음력 10월의 날씨와 비슷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모두 무릎을 쬐고 어깨를 가지런히 하여 서로 끌어안고서 앉아 있노라니, 마침 호남사람 4,5명이 우리보다 먼저 산에 올라와 있어서 그들과 함께 즐겼다. <출처 [지리산에 가련다] 중에서... 김양식 지음 - 도서출판 한울> 이의철(李宜哲, 1703~1778)의
<백두산기 白頭山記> 이의철(李宜哲, 1703~1778)
이의철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용인(龍仁)이며, 자는 원명(原明), 호는 문암이다. 『백두산기(白頭山記)』는 이의철(李宜哲 :1703~1778)이 갑산 부사로 재임할 당시인 1751년 (영조27) 백두산에 다녀와 남긴
한문으로 된 기행문이다. 신미년(1751년) 5월24일
경자 갑산부를 출발했다. 신미년(1751년) 5월25일 견여(두 사람이 메는 가마)를 타고 백덕령에 올랐다. 고갯마루 이후부터는
산길이라 해도 지세가 평탄하고 넓어 말을 타고 갈 수 있었다. 신미년(1751년)윤 5월3일 백두산에 들어갈 때 길 닦는 백성을 20여 명 정도 뽑아 3일 전에 먼저 보내면 임시 숙소와 길을 닦는 것 등은 충분히 해결된다. <출처 : http://www.baikdoo.pe.kr> 박종(朴琮, 1735~1793)의 <백두산유록 白頭山遊錄> 『 백두산유록』은
조선 후기 함경도 경성의 유학자 박종이 지은 백두산 유람기이다. 1764년(영조 40) 5월 14일부터 6월 2일까지
당시의 경성부사 겸 북병사 신상권 일행과 함께 백두산을 다녀오면서, 도중에서 견문한 내용과 자신의 감상을 일기의 형태로 기록한 것이다. 갑신년(1764년) 5월 14일 백두산으로 출발하다. 지닌 물건이라고는 산천도(山川圖)
1장과 책 몇 권뿐이었다. 갑신년(1764년) 5월 18일 기사 아침 식사 전에 궂은 비가 내려 긴 장마가 시작될 것 같았다. 점심 무렵 구름이 걷히고 해가 밝게 비치니, 그 기쁨이란 가히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행장 도구 등을 준비하느라고 하루를
유숙하였다. 하인 8명을 먼저 산으로 보내어 길을 닦고 임시 움막을 설치하도록 하였다. 갑신년(1764년) 5월20일 신미 백두산 근처는 추워서 풀이 자라지 않으므로 말을 먹일 목초가
없다고 하여, 행장을 꾸릴 때 말 먹일 꼴을 실어야 하였다. 산에 들어가는 사람은 위아래 사람을 합쳐 37명이었고,
말은 모두 13필이었다. 길잡이 전통성全通成이라는
사람을 고용하였는데, 그는 삼산에 사는 사람으로 지금 동네의 이장[約正]이었다. 자기 말로 열두 번이나 백두산을
다녀왔다고 하였다. 인부들이 나무를
찍어 움막을 지어 놓았는데, 나무껍질로 지붕을 덮어 겨우 방 1칸을 만든 것으로 매우 협소하였다. 갑신년(1764년) 5월22일 계유 맑음 노기(길안내서) 몇 권을 가지고 왔으나, 거리가 한결 같지 않아 모두 표준이 될 수 없었다. 다만 원지가 가지고 온 노기만이 딱
들어맞아 착오가 없었다. 일찍이 임술년(1742,영조 18)에 담와 홍계회 선생이 왕명으로 갑산에서 무산으로 들어와 백두산을 두루 보고 무산 사람
백찬귀를 시켜 거리를 측량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그 때 만든 것이라고 한다. 갑신년(1764년) 5월23일 갑술 남쪽 가장자리를
따라 담을 쌓고 목책을 설치하였는데, "평사 이명환이 2월에 산 아래 도착하였으나, 눈이 심하여 보지 못하였고, 이 도사는
6월에 등정하였느나, 바람이 급하여 갓을 짊어지고 겨우 한 번 보았을 뿐입니다. 종성 부사 조 대감 역시 눈이 많이 내려 도보로 겨우 산상에 이르러
천지를 반쪽만 내려다 보았을 뿐이고 최정상에는 한 번도 올라가 보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대개 최정상에 오르지 못하며 중간 산의 벽에
가려서 천지의 전면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주1) 1712년(숙종 38) 백두산에 세운 조선과 청(淸)나라 사이의 경계비. 정계비라고도 한다. 백두산이 청조(淸朝)
발상의 영산(靈山)이라 하여 그 귀속을 주장하던 청은, 12년 오라총관(烏喇摠管) 목극등(穆克登)을 보내어 국경문제를 해결하자는 연락을 해왔다.
조선에서는 참판(參判) 권상유(權尙游)를 접반사(接伴使)로 보내었으나, 청의 사절이 함경도로 입국함에 따라 다시 참판 박권(朴權)을 접반사로 출영(出迎)하게
하였다. 이때 조선측의 접반사는 산정에 오르지도 못하고 목극등 자신이 조선측의 접반사 군관(軍官) 이의복(李義復), 감사군관(監司軍官) 조태상(趙台相),
통관(通官) 김응헌(金應R) 등만을 거느리고 산정에 올라가 거의 일방적으로 정계비를 세웠다. 그 지점은 백두산 정상이 아니라 남동방 4 km,
해발 2,200 m 지점 분수령 위의 호랑이가 엎드린 듯한 바위를 그대로 비석의 귀부(龜趺)로 하여 높이 72cm, 아랫부분 나비
55.5cm, 윗부분 나비 25cm의 정계비를 세웠다. 출처 http://ipcp.edunet4u.net/~baikdoo/special/백두산유록/ 서명응(徐命膺, 1716~1787)의 <유백두산기 遊白頭山記> 서명응(徐命膺, 1716~1787)조선 후기의 학자·문신. 본관 달성(達城). 자 군수(君受). 호 보만재(保晩齋)·담옹(澹翁).
시호 문정(文靖). 유백두산기(遊白頭山記)는
1766(영조 42년) 徐命膺[서명응](1716~1787)이 조엄 등과 함께 백두산에 오른 후 돌아와 쓴 백두산 유람기로서 그의 문집인 보만재집(保晩齋集)에
살려 있다. . 이들 두 사람은 유배길에 서로 만나 백두산 근처에 유배된 것을 계기로 백두산에 오를 것을 합의하고 갑산 부사 민원, 삼수 부사
조한기 등과 함께 왕복 8일에 걸쳐 백두산에 올랐다. 주1) 갑산(甲山)부 함경남도 갑산군(면), 혜산군, 풍산군 서문 지금 유배지가 백두산 아래에 있으니 하늘이 혹시 나로 하여금
백두산 유람을 시키려 하는 것 아니겠는가?"하니, 조엄이 기뻐하며 말하였다. 갑산 부사 민원(閔源)과 삼수
부사 조한기(趙漢紀) 모두 산수 유람을 좋아하는 자들로 기꺼이 동행하를 원하였다. 내 손님인 최우홍과 홍이복, 조엄의 손님인 이민수, 민원의 아들
민정항이 모두 동행하였다. 백두산 도로를 잘 아는 갑산 선비 조현규, 군교 원상현이가 길안내를 하였다. 산에서 나오자마자 용서한다는 임금님의 명령이 이미 내려와
있었다. 아! 두 사람이 임금님께 죄를 얻어 이 곳에 온 것은 하늘이 이로써 백두산에 오랫동안 갖고 있던 묵은 빛을
갚게 하고자 함이 아니겠는가? 두 사람의 행적이 여기에서 그쳤으니 이 또한 기이한 일이 아니겠는가? 집에 돌아와 각각 한 부씩 기록하였다. 관직
생활을 마치고 야인으로 돌아가 한가로이 지내면서 소일거리로 삼았으면 한다. 또한 후일에도 금일의 수고로움을 잊지 않고자 할 따름이다. 6월 11일 운총진을 출발하여 심포(深浦)에
이르다. 검천을 따라
상류의 남쪽 언덕에 이르렀다. 혜산의 백성들이 먼저 막사를 지어 놓고 삼나무를 베어 들보와 기둥을 세우고 자작나무
껍질을 벗겨 지붕을 덮고 또 삼면에 보루를 세웠다 산에서 구한 것인데도 비바람을 막을 수 있었다 만약 남쪽 백성들에게 이 일을 하도록 한다면 한
해가 끝날 때 까지도 쉽게 할 수 없을것이다 부엌일 하는 사람이 점심밥을 내왔는데 밥상에 큰물고기가 반찬으로 올라왔다 물고기 이름이 여항(餘項)인데
맛이 달고 좋았다 그물로 잡은 것이 아니라 앞 냇가에서 때려 잡은 것이라고 한다. 6월 12일 심포를 출발하여 어수참(魚水站)에
도착하다. "옛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할 때 늘 몇 가지 일을 겸하였다. 우리가 여기까지 와서 한갓 산천의 경치나 즐긴다면
천박란 일이 될 것이다. 변경의 방비를 위한 자세를 살펴보는 것도 좋겠고 북극성이 떠 오르는 것을 관측하는 것도 좋겠다." 그래서 재목과 목수를 구하여 상한의(象限儀)라는 관측기구를 제작토록 하였다. 여기에 도착하여 천구의 별
하나를 관측하니 별은 땅에서 42도 조금 못 되는 곳에서 나왔다. 6월 14일 연지봉(檎脂峰) 밑에서 출발하여 백두산 위에 오르다. 이 날 일찍
일어나니 하늘은 한 점 구름도 없고 솟은 해가 빛났다. 일행 여러 사람들은 혹 가마를 타기도 하고 혹 말을 타기도
하고 혹 걸어서 서서히 산에 올랐다. 그 위에 오르니
사방의 여러 산이 모두 자리 밑에 있어 눈이 하늘 끝까지 가서 한 번에 다 들어왔다. 몸을 돌려
두 봉우리의 사이에 서니 봉우리 밑에 5,600장(丈) 정도 거리에 텅비고 평범한 곳에 큰 못이 있다. 둘레가
40리인데 물이 매우 푸르러서 하늘빛과 위아래가 한색이다. 사슴들이 무리를
지어 있는데, 물을 마시거나 걸어다니거나 누어 있거나 느릿느릿 달리기도 한다. 검은 곰 두세 마리가 벽을 따라 오르내리고, 신기한 새 한 쌍이 물에 점을 찍듯 오락가락 날아다니니,
마치 그림 가운데 장관을 보는 것 같았다. 사방이 조금
평펴한 봉우리에 앉으니 봉우리에 오석烏石이 많았는데, 작은 것은 주먹만하고 큰 것은 말斗만 하였다. 뒷면에 검푸른
모래 같은 점이 박혀 있어, 갑산인들이 이를 갈아서 갓끈 장식으로 만들어 사용한다. 조현규를 시켜
붓과 벼루를 가지고 그 경치를 그리게 하고 지남침을 이용하여 그 봉우리를 위치를 알아냈다. <그림 g10.jpg><백두산 부분만 삽입> <그림 g11.jpg><그림설명:박종과 서명응의 백두산 행적도><이동경로 표시할것> 백두산의 명칭
유래에 대해선, 백산(白山)이라는 산이름이 멀리서 바라보면 흰 독을 엎어 놓은 것 같은 그 산정(山頂)의 모습에서 유래했다고
한다.(成海應의 '東國名山記') 또한 산이 극히 높아서 산마루에는 사계절 언제나 빙설이 희게 덮혀 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한 것 이라고도 전한다.(李裕元의
'林下筆記') 또한 백두산의
이명(異名)인 '불함(不咸)', '개마(蓋馬)', '도태(徒太)' 등은 모두 '밝달' '한밝달'의 의미가 한자로
이기(異記)된 것 뿐이며 백두산이 명칭 역시 '밝달'-'백산(白山)'의 과정을 지나 정착된, 고귀한 정신적 의미를 담은 것이라는 설도 있다. <그림 g7.jpg><그림설명:동국여지지도속의 백두산 천지> <그림 g8.jpg><그림설명:대동여지도속에 백두산 천지> <그림 g9.jpg><그림설명: 함경북도 <동국지도(東國地圖)> 18세기 중엽. 채색필사본.
8폭 병풍의 하나> 이중하(李重夏,
1846~1917)의 <백두산일기 白頭山日記> 백두산 일기는 1885년
8월 토문감계사로 임명된 이중하(李重夏, 1846~1917)가 중국측 감계관진영, 덕옥,가원계와 함께 백두산 정계비와 토문강 발원처를 조사한 기록으로서
그 사료적 가치가 크다. 이중하(李重夏,
1846~191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 전주(全州). 자 후경(厚卿). 호 규당(圭堂)·탄재(坦齋). 1882년(고종 19)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85년 안변부사(安邊府使)로서 토문감계사(土們勘界使)가 되어 청나라 차관(差官) 가원계(賈元桂)와 백두산 정계비를 답사, 국경분쟁의 해소에
노력했으나 양국의 견해차로 실패했다. 을유년(1885, 고종 22) 10월 6일 모두 가죽 신발과 털 속옷으로 바꾸어 입고 단단히 졸라매었다. 출발할 때 서로 돌아보니 사냥꾼으로 분장한 것 같았다. 10월 16일 40리를 가서 직동에 이르렀다. 머물러
쉬는 막사가 있었는데 사냥꾼들이 자는 곳이었다. 그 집의 구조는 양 기둥에 서까래를 걸고 지붕이 없어서 바로 바깥으로 통하여 앉아서도 하늘을 볼
수 있고 비와 이슬이 흘러 내렸다. 대개 사냥꾼이 와서 자는데 불을 때서 추위를 막는다. 이와 같이 하지 않으면 연기와 불꽃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10월 18일, 19일 때는 차가운 눈이 흩날리고 달빛이 비쳤다 가렸다 하였는데
눈을 뚫고 길을 열었다. 대각봉 북쪽 낭떠러지를 따라 올라가는데, 그 옆은 천 길이나 되어 깊이를 알 수 없는 계곡이
있었다. 한 번이라도 혹 실족하면 생사를 알 수 없었다. 앞서 가며 짐을 짊어진 역부가 이렇듯 매우 추운 혹한에 배는 고프고 얇은 옷을 입었으니
추위에 얼어 쓰러질까 매우 염려되었다. 그런데도 오히려 힘을 다해 앞으로 나아가 나무를 베고 산을 뚫고 눈을 뚫어 길을 내는데, 마치 싸움터에
나가 적을 대하는 기세와 같이 어려운 기색이 조금도 없으니 그 정성이 더욱 감탄할 만하였다. 내가 몇 리를 걸어 가다가 눈이 깊어 발을 옮길 수가
없었다. 드디어 오위장 최오길을 말에 올라타 눈을 뚫고 절벽을 따라 나아갔다. 말이 혹 넘어지고 혹 엎어지니 그 고생이 갖가지였다. 정리 우리의 선조들은
산을 신성시하였으며 이러한 숭산사상에서 산은 신앙 활동의 터가 되어 산에는 산신당과 사찰이 있고 선조들은 신앙 활동을 위해 산을 오르기도 하였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지리산 천왕봉 정상의 성모사에 치성을 드리는 사람들이 "풍기문란"과 "실농위기"를
맞을 만큼 극성스러웠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전국 무당들의 우두 머리가 천왕봉의 성모사를 받들고 있었기 때문에 이곳에는 언제나 1백명의 무당이 진을
치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원래의 이름은 '백무동(百巫洞)'으로 불렸다할 정도로 당시 지리산은 무속신앙의 발원지로 자리매김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 권 제 23 백제본기
제 1(百濟本紀第一)에는 “그는(백제시조 주몽)한산에
도착하여 부아악에 올라가 거주할만한 곳을 찾았다.”라는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산을 오르는 이유에는 신앙활동 목적이외에도 국가의 수도와
도읍을 정하고 외부로 부터의 방어를 위한 축성을 위해서도 등산은 이루어졌다. 조선시대에는
명산 순례 같은 유람등산이 주된 등산 사조였으며 이러한 유람등산은 주로 양반 관료들을 중심으로 행해졌다. 유람등산의
기록들을 보면 거의 모든 기록에서 양반 관료들을 맞이하는 중과 양반 관료들을 가마에 매고 등산을 하는 가마중의 모습이 나타나며 유람등산을 하는
양반관료들은 산 초입까지는 말과 나귀를 타고 이동하며 가마가 들어갈 수 있는 곳까지
가마 중 들이 매는 가마를 타고 이동을 하였다. 농암 김창협의 <동유기東遊記>에는
“가마를 매고 가는 중이 열 걸음에 한번씩은 미끄러지므로 늙은 중은 옆을 부축하고 젊은 중은 뒤를 밀게 하여야만 전진할 수가 있었다."라는
기록과 유점사 아래 백천교에서 가마중과 나귀꾼이 양반을 기다리는 모습을 그린 겸재의 <금강산화첩> 중 '백천교' 그림에는 당시 유교가 국교였던 조선후기 당시 불교의 위상과 점유하고 있는 위치를 짐작할 수 있는 기록들이다. 백두산 같이 규모가 큰 등산에는 산길이 워낙 험난하기도 하지만 길이 멀고 인적이 드물어
당시의 보통 서민들이 엄두도 내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간혹 그 지방에 파견되는 관리들 중에 뜻 있는 사람들은 많은
군사를 동원하여 길을 닦으면서 다녀오는 경우가 있었으며 보통 하루에 68리~75리, 맑은 날에는 100리~110리를 여행하였고 민가에서 유숙하였다. 이의철의 <백두산기 白頭山記>의 기록을
보면 “4,5일 전에 이미 먼저 색리와 운총 혜산 별사 세 고을의 백성 약 100명을 선발대로 보내어 길을 닦고 점심 먹고 잠잘 곳마다 모두 임시
숙소를 마련하도록 하였다. 견여(두 사람이 메는 가마)를 타고 백덕령에 올랐다. 고갯마루의 길은 조금 평평해서 말을 타고 몇 리 정도를 갔다. 내려오는 길은
다시 가마를 탔다.”라고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많은 규모의 산행인력이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산행장비로는 이전 산행자가 기록한 산행기록을 참고하였으며
지도(산천도, 노지)와 나침반을 보유하기도 하였다. 이동항의 <방자유록 放恣遊錄>을
보면 “지난 번 능중이 건네준 점필재 김종직의 [유두류록]을 소매 속에서 꺼내 보았다. 거기에는 지리산의 산, 암자, 마을, 골짜기, 봉우리의
이름이 대부분 실려 있었다. 지리산 아래에 살고 있는 한생이 하나하나 자세히 대답해 주었다.”라는 기록과 “먹을 쌀과 소금, 장, 술을 비롯해
솥, 그릇, 의복, 이불, 깔개자리와 점심 밥그릇들을 갖추어 짊어지니, 모두 12사람이나 되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박종의 <백두산유록 白頭山遊錄>에는 “노기(길안내서) 몇 권을
가지고 왔으나, 거리가 한결 같지 않아 모두 표준이 될 수 없었다. 다만 원지가 가지고 온 노기만이 딱 들어맞아 착오가 없었다.”라는 기록과 서명응의
<유백두산기 遊白頭山記>에는 “조현규를 시켜 붓과 벼루를 가지고 그 경치를 그리게 하고
지남침을 이용하여 그 봉우리를 위치를 알아냈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상 선조들의
기록에 나타난 등산의 행태와 등산과 관련된 당시의 풍속과 사회상 등을 소개하였다. 산행 방식에는
현재의 산행과는 많은 차이가 있으나 산행 중에 느끼는 감정과 정상에서 느껴지는 성취감은 오늘의 우리나 옛 선조들이나 벅차 오르는 감정은 마찬가지인
것 같다. 본문에 소개된
내용들을 자세히 읽어보면 그 당시 필자의 의지와 성품을 읽을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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