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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단 - 심층탐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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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나드의 바위사랑 / 이구용(62) <한국을 찾게 된 미군 클라이머> 1960년대 초반 주한 미군으로 한국에 근무했던 이본 취나드(Yvon Chouinard)는 북한산과 도봉산일대의 암벽코스를 한인 클라이머들과 자주 올랐고, 그의 이름을 붙혀준「취나드코스」를 남긴 만큼 한국의 클라이머들에게는 가까운 산 친구다. 요즈음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끊임없는 산행과 장비의 개량 및 제작에 힘쓰고 있는 그는 일찍부터 미 대륙과 캐나다, 멕시코 그리고 남미의 파타고니아 등 극한등반을 감행했으며, 여러 암벽코스에 초등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중 기록적인 초등의 하나가 1964년 10월 유명한 요세미테(Yosemite) 국립공원의 엘 캐피탄(El Capitan)에 있는 북미벽으로, 다른 세 명의 유망한 캘리포니아 클라이머들과 함께 올랐던 일이다. 북미벽이란 이름은 엘 캐피탄 직벽 중간지점에 큰 덩어리의 검은색을 띤 바위부분이 지도상에 있는 북미주의 모양을 닮았다고 해서 붙혀진 것이다. 아직까지 세계적으로도 가장 힘들었던 암벽등반으로 기록되고 있는 이 사건은 네 명의 클라이머가 열흘 동안을 바위에 매달려 비박해가며 900미터 (3,000피트)의 직벽을 완등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초등 기록들 보다도 취나드의 진면목을 돋보이게 하는 것은, 그의 끊임 없는 장비개량에 대한 노력과 생산 보급에 힘쓰고 있는 점이며, 깨끗한 등반으로 바위와 자연환경의 오염을 극소화하고자 하는 자연 사랑의 정신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취나드는 세계적 규모의 등산 장비제조회사를 경영하며, 록클라이밍용 하드웨어 즉 넛트, 자일, 아이스햄머, 아이젠, 카라비나, 하켄 등과 소프트웨어 즉 클라이밍 바지, 셔츠, 스웨터, 랩색 등을 생산해서 자신의 유통회사인 파타고니아(Patagonia)를 통해서 판매하며, 이 제품들은 등산장비의 바로미터가 되어있다. 그를 잘 아는 주변 사람들은, 「그는 자신이 쓰는 등산 장비를 보고 쓸 적마다, 개량할 점을 염두에 두지 않고 사용하는 법이 없을 정도」라고 평하곤 한다. 그의 진솔함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다.
<등산 장비의 개량과 응용> 취나드는 1959년 ~1960년 사이에 테튼(Tetons, 註: 와이오밍 주에 있는 암벽군)의 암벽들을 오를 즈음 초크(chock)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때의 초크는 비행기에 사용되는 알루미늄으로 만든 너트(nut)들을 응용한 것이었다. 이것이 실제로 암벽등반에 진지하게 사용되어지기는 이보다 10여년이 지난 후 부터였다. 그는 요세미테의 암벽들이 하켄에 의해 마구 손상되어 가는 데에 가슴 아파했다. 사실상 하켄의 사용으로 인해 좁은 크랙(crack)들은 파괴되어 가고 ,많은 코스에 흉한 자국들을 남겼던 것이다. 심한 묘사일지 몰라도 「하켄의 사용으로 남겨진 크랙의 상처들은 마치 우표의 가장 자리처럼」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의 말을 빌리면, “나는 항상 록클라이밍이야말로 남을 다치게 하지 않는 완전무결한 스포츠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이제 나는 이것이 바위를 크게 훼손시키는 행위라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다.” 작은 하켄으로 충분했던 좁은 크랙이 점점 더 큰 하켄을 쓰지 않으면 안 되게 변해가므로, 바위의 모습은 더욱 더 흉하게 되어 버리는 것이었다. 취나드와 그의 친구 토마스 후로스트(Trost 註: 1964년 엘 캐피탄 북미벽 초등때 멤버)는 갖 가지의 초크들을 생산해 내기 시작, 록클라이밍의 패턴에 변화를 시도했다. 한편으로는 젊은 클라이머들로부터 거센 비난도 받았는데, 화살의 촛점은 「자신은 모든 어려운 코스에 갖가지 하켄을 모두 써서 올랐으면서, 이제 와서 결과가 확실히 증명되지도 않은 생소한 장비를 권장한다는 게 말이 되는냐」는 거였다. 그런 공격에 답이라도 하듯, 취나드는 1973년에 워싱턴 클라이머인 브루스카슨(Bruce Carson註: 1975년 인도에서 등반중 사망)과 함께 초크만을 써서 요세미테에서도 어렵다는 엘 캐피탄의 노우스(nose)코스를 완등 함으로서 쏟아진 비난을 잠재웠다.
<한국에서의 아름다웠던 추억들> 취나드는 1962년 겨울 미 육군에 징집되어 2년 동안 복무했다. 미사일 병기 주특기를 받은 그는 한국 근무를 명령받았다. 한국으로 떠나기 전 그는 한 한국인을 만났는데, 그가 바로 선우문옥(註:서울공대 산악부 O.B)씨였다. 그는 자신의 동생인 선우중옥(註:한양공대 산악부 O.B로 후에 취나드의 초청으로 미국에 가게 된다)을 소개해 주며, 한국에서 바위 잘 하는 클라이머의 하나이니 꼭 만나보라는 권유를 받게 된다. 그의 술회를 그대로 옮겨보자. “서울 근교에는 화강암으로 이뤄진 멋진 바위들 뾰족 봉들과 돔(Dome)들이 있어서 좋은 암벽등반코스를 제공하고 있었다. 일단 한국의 록클라이머들과 연락이 닿자, 그들은 나를 자기 집에 데리고 가서 준비했던 민간 복장으로 갈아 입혀 주었다. 나는 미국에서 록클라이밍 장비를 보내오게 했다. 한국의 기존 암벽코스들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해서 개척된 것들이었다.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에게서 바위에 오르는 방식을 배웠다. 한국 사람들은 일본인들이 해 놓은 코스들을 거의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 사실 코스를 새로 만들만한 데가 많았다. 일단 한국인들과 시작은 했으나 그들은 실제로는 상당히 뒤져 있었다. 우리는 비박을 해가면서 바위를 오르는 등 꽤 수준급의 등반을 했고, 얼마 안 가서 산에서는 모두들 나를 알아보게 되었다. 내 자신도 군대에 있는 몸이 아닌 것 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이러한 일들로 해서 한국에 있었던 동안의 경험은 내게 있어서 훗날 아주 아름다운 추억이 될 수 있었다 “ 사실 한국 근무 초기에 취나드는 어려움이 많았다. 군대에서는 주말 외출증을 얻어 근무지를 이탈하기가 거의 불가능 했다. 그래서 산에 갈 수 있는 자유시간을 얻어내기 위해서 그는 별다른 일을 벌여야 했다. 다시 그의 말을 인용해 보자. “나는 단식 투쟁에 돌입했다. 적어도 두어 번의 비교적 장기적인 단식투쟁과 명령 불복종 이런 거였다. 그 밖에도 의도적으로 거의 발작적인 반미치광이에 가까운 행동들을 벌인 결과 상관들은 나를 풀어줬다. 중대장은 직권으로 나를 미사일에 종사하는 민간인들과 일하게 해주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이란 게 아침에 몇 개의 발전기들을 작동시키고, 밤에 전기 스위치를 끄는 게 전부였다. 나머지 시간에 나는 산에 갈 수 있었다."
<클라이머의 윤리와 스타일> 취나드는 「클라이머의 권리장전」이란 최근의 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당신은 클라이머로서 어디에서나 어떤 스타일로도 바위에 오를 권리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다음에 그 코스를 오를 사람에게, 그 어떤 형태로든 지장이나 영향을 주지 않는 범위 내에 머물러야 한다. 이것은 아주 간단한 일이다. 만약에 초크를 쓰거나 볼트나 하켄, 또는 고정 자일이나 쓰고 남은 산소탱크, 쓰레기를 버리거나 바위 위에 배설물을 남긴다든가 하는 일은 모두 윤리에 어긋나는 일들이다. 초크나 볼트를 쓰는 게 뭐가 잘못된 일이냐고 반문 할 것인가? 누군가가 당신이 즐겨 오르는 바위 코스에 홀드마다 「왼쪽」혹은 「오른쪽」이란 글들을 페인트로 써 놓았다고 가정해 보자.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표시대로 따라 오르는 것은 싫다. 만약에 코스마다 분필로 표시되어 있고, 안전장치가 되어 있는 바위를 오르라고 한다면, 나 자신이 누구인가한테 당하고 있는 듯한 느낌일 것이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가정을 예로 들고 있다. “만약에 100명의 로타리클럽 회원들로 구성된 원정대가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랐는데, 베이스캠프에 설치된 초대형의 산소탱크에 연결된 파이프를 통해 산소 공급을 받았다고 해도 나는 상관하지 않겠다. 그로 인해서 산의 모양이 바뀌지 않는 한, 또 그런 식의 등반이 다른 사람들의 등반에 방해가 되지 않는 한 말이다. 다시 말해서, 30개의 사다리나 3,000미터의 고정자일이 등반로에 남겨지거나, 헬리콥터가 붕붕거리고 날거나 쓰레기더미가 여기 저기 남겨졌다고 한다면, 그거야 말로 윤리상, 질서상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 보자. “어떤 모험을 즐기는 삶이 「어드벤처 여행」즉 래프팅 이나 가이드 등반을 가고자 할 적에, 안내서에서는 아주 위험이 적다고 강조할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서 정말로 모험을 즐기려고 기대 한다면 오산이 될 것이다. 내 경험상 얘기한다면, 고생 된 일이 많았을 수록 기억에 남는 등반이었다고 솔직하게 말 할 수 있겠다. 사실 위험한 스포츠라는 것은 배우고, 갈고, 닦아서 가진 바 기능을 유용하게 활용할 때에 제 모습을 갖출 수 있으며, 그때에 비로소 마음과 육체가 최상의 상태를 누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이상의 도를 넘으면 안 된다. 너무 무리하게 움직이면 죽음을 부르게 된다. 삶에 있어서 최대의 승부수란 자신의 한계를 알고, 그에 걸맞게 행동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취나드와 산과의 인연> 1938년 11월 9일생, 미국 메인주 루이스톤에서 프랑스계 캐나다인 부모들 사이에서 태어났다. 캐나다 국경에 가까운 마을 인구의 절반이 프랑스계로, 집안에서 불어만 사용했으므로 영어를 배우기 시작한 것은 7살 때 이사를 간 로스앤젤레스 가까운 버뱅크시의 초등학교에서였다. 본격적으로 등산을 하게 된 것은 50년대 전반 고교시절 시에라 클럽(Sierra club)의 록클라이밍부에 들어가서 로얄 로빈슨(Royal Robbins), 척 프랫(Chuck Pratt, 註: 두사람 모두 64년 엘 캐피탄 북미벽 초등 때 멤버)등 수준급의 클라이머들과 함께 어울리면서였다. 대학에 들어가서 2년 간 지리학을 공부했다. 18살 때 부모에게 빌린 돈으로 공작기계와 드릴, 그라인더 등을 마련, 알루미늄을 재료로 카라비나를 손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미국서는 거의 모든 등산 장비를 유럽에서 수입하고 있었다. 이어서 하켄을 생산, 손으로 두드리고 줄로 갈아서 만든 것들을 클라이머들을 찾아다니면서 팔았다. 수입제품보다 질이 좋으니까 수요가 계속 늘어갔다. 1962년 여름 캘리포니아 뿐만 아니라 와이오밍과 캐나다의 암벽들을 오르고, 뉴욕시에서 가까운 동부지방 록클라이밍의 중심 쇼왕겅크(Showkinggunk, 註: 캣츠킬 산맥 남단에 위치한 암벽군)를 등반, 그해 가을을 지날 무렵 군소집 영장을 받아, 이 후 2년간 한국등지에서 복무했다. ㆍ 군에서 제대한 후 1965년부터 버뱅크의 부모 집 뒤뜰에서 장비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이어서 벤추라(Ventura)로 옮겨서 사업을 확장해 나갔는데, 고용인들 중엔 한국인들도 몇 사람 일하게 된다. 그 중 공과대학 출신들이 있어서, 모형의 개량과 제작에 공헌했다고 한다.
참고자료 (1) Climbing in North America by Chris Jones-Published for the American Alpine Club by th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Berkeley, Calif. (2) Cloud Dancers-Portraits of North American Mountaineers, edited by Jonathan Waterman-Published by American Alpine Club, Golden, Colorado
(3) Voices from the Summit-The World's Great Mountaineers on the Future of Climbing, edited by John Amatt and Bernadette McDonald-National Geographic Adventure Press, Washington, D.C.
이 구 용 (PAUL Y. LEE) 주 소 : 63-25 BURTON ST. #3B REEO PARK, N.Y 11374, U.S.A. 직 장 : WONDERLAND 1HOUR PHOTO, WC. 301 TTH AVE. BROOKLYN, N.Y 11215 U.S.A. 연락처 : 집전화: (718)335-1554 집FAX: (718)335-8834 E-Mail: PAUL1207@AOL 직장전화: (718)768-0341 직장FAX: (718)768-0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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